2023년 2월5일 설교
“나는 경외하겠노라!”(수 24:9-18 ‘믿음의 결단’ 2023.2.5. 은퇴설교)
성경 66권 중에 가장 긴 책이 시편이다. 150장까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시편은 개인이나 혹은 단체가 신앙고백하며 찬송한 것인데, 그 절반은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하였던 노래들이다. 그리고 시편 73~83편까지 11개의 시는 다윗과 동시대의 인물인 아삽이 지은 것이다. 아삽은 성전에서 찬송하는 무리의 책임자( ≒ 찬양대장)이었다.
그런데 시편 73편의 주제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자”이다. 아삽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올바로 살아보려고 애를 쓰면서, 곰곰이 살펴보니 악한 사람들이 형통하게 살아가는 것을 알고 상당한 혼란에 빠졌던 모양이다. 악인들은 이웃을 압제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교만한 언행까지 하는데도 오히려 착한 교인들보다 형통하고 부유하고, 건강하며, 고난도 없고, 죽을 때 고통도 없었는데, 이러한 사실을 아삽이 보면서 심란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삽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악한 사람들처럼 살아볼까 하는 충동을 받기도 하였지만,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야 악한 사람들의 결말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악한 자들에 대하여 형벌과 상관없이 다 묵인하시는 것처럼 보였으나, 결국 악인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여 파멸에 던지신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심판을 몰랐을 때 아삽은 짐승처럼 무지했다고 고백하였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לֹא אֵדָע 로 예다, 체험적인 깨달음이 없음)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시 73:22). 그래서 아삽은 하나님께 불평하였던 짐승 시절의 신앙 삶을 회개하였으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생 복락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드디어 깨닫고 전도하겠다고 다짐한 일로 시를 끝맺고 있다.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סָפֵַּר 사파르 to write, count, talk, relate. 기록하고 맞나 확인해 보고, 설명하고, 연결시킴. = 이게 전도!).”(시 73:28).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다 보지 않으면 착각하기 쉽고 그래서 삐지고 불평하는 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삐져있을 때는 본인만 모른다는 게 제 목회경험이다.
오늘 설교 본문도 빗나간 신앙 삶을 본인들이 모르고 있어서 그 사실을 드러내놓고 깨우치느라고 애간장을 태우는 여호수아를 보여준다(15 우리가 함께 읽어본 이 말씀은 딱 오해하기 쉽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또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이 말씀 때문에 ‘여호와를 믿든지 다른 우상을 섬기든지 상관없으니 너희 마음대로 해도 좋다’라고 한 말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16절에서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면, 그리고 17절에 “이는”<כִּי 키 because, 출애굽과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기적보호와 인도하심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그 근거를 밝힘!>이라고 대답한 모습은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결단을 끌어내고 있음을 보여주고, 이렇게 이유를 밝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 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함. 사도 베드로도 벧후 3:15-16에 강조해 놓았음.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벧후 3:15-16).
오래전에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작은 마을에 윌리엄이라는 소년이 14살 때 불량소년으로 통했단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그를 지도하려는 선생임이 없었다. 더구나 그는 다른 학생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침으로 퇴학을 고려할 정도였다. 그럴 때 새로 부임해 온 선생님이 윌리엄 소년에 대한 말을 듣고 그를 한 번 지도하여 보겠다고 나섰다. 동료 교사들이 말렸다. 공연히 봉변이나 당할 터이니 손대지 말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 선생님은 윌리엄을 차근차근 관찰해보면서 그의 처지와 성격을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희망이 없어 보인다.’ ‘악한 기질이 틀림없다.’ 등등 다 맞는 소견이었다. 그래서 그 선생님은 윌리엄 소년에게 이해와 자상함과 끈기로 대했다. 그러고 삐뚤어진 성품 그대로 사랑이 무엇인지 경험하도록 그 선생님은 도우미가 되어주었고, 선과 악, 믿음이 무엇인지 잘 볼 수 있게 도와주면서, 참된 자긍심과 산 소망을 심어주고 이루어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물론 그 선생님은 번번이 눈물을 참아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 경험들이 산 소망을 마음에 뿌리내리고 자라게 하니까, 그 소년의 나쁜 버릇이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니 공부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그는 대학에 진학하여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계속 법률을 공부하더니 결국 미국 대법원의 부 판사가 되고, 뉴욕 주의 주지사가 되었고, 미국 국무장관의 자리까지 오르더란다.
한 소년이 인간쓰레기로 점 찍혔으나 한 선생님이 심어준 산 소망에 올바른 이유를 갖추자, 위대하고 값진 인생길로 들어서더라는 것이다. 아멘! 믿음도 자라가야 위대한 인생을 이루게 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또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빌 1:25). 그래서 목사님 같은 장로님이 계시는가 하면, 집사 같은 목사가 실존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의 믿음 수준은 어떤지 냉정하게 자문자답해볼 일이다.
자 그러면 대답을 갖춘 산 소망으로 믿음의 진보를 이루어가는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면 되는가? 설교본문의 여호수아에게서 대답을 찾을 수 있는데 지금 저랑 함께 살펴보자.
1) 경외(14)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יְראוּ אֶת־יְהוָה וְעִבְדוּ 예르우 에트 예흐와 웨이브두 “[reverently] fear the Lord, and serve Him” -Amf- 숭배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예배하며 존경함. 주어진 처지에서 최선을 다하면서도 더 좋고 아름답고 알차게 할 수 없을까 고민함이 있음. 굳이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예를 갖춘 겸손’임). 이러한 겸손을 중요시한 것은 솔로몬이 전무후무한 지혜로 연구 분석, 정리한 결론이 경외이고, 그 실례가 고넬료이기 때문이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3-35)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하였다.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 도다.”(시 33:18-19) 또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 도다.”(시 34:7)
그렇다면 경외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너희 자녀들아, 와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לָמַד 라마드 train, accustom, discipleְ 오랜 기간과 시행착오와 끈기로 이루어짐>”(시 34:11)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신 14:23> 성전에서 헌금과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면서 습득하는 것이라고 설교했음! ‘경외’를 암기로 끝내지 말고 ‘할 줄 아는 해당자’ 실력자가 되라는 것임!). 경외신앙 생활에 익숙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아멘.
2) 진실함(14)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בְּתָמִים וּבֶאֱמֶת 뻬타밈 우베에메트 in upright, in complete, in perfect, without blemish. בֶאֱמֶת in truth, in faithfulness, in Amen).
우리는 해를 그릴 때 무슨 색을 칠하나요? 대부분 아침 해나 석양 해를 생각하고 빨간색을 칠한다. 그런데 유럽이나 미국의 아이들은 해를 노란색이나 주황색으로 표현하고, 중국은 해를 하얗게 그리기도 한단다. 그렇다면 해는 실제로 어느 색이던가? 빨강, 노랑, 주황, 하얀색... 다 맞다. 해는 일출과 석양, 구름 속과 날씨에 따라 빨갛거나 노랗게, 주황색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맑은 날 한낮의 해는 하얗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태양의 색을 특정 색으로 고정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살아온 환경과 삶의 방식, 문화와 가치를 존중해 주고 다양성을 받아들여 온전함을 이루어야지 획일화시켜놓고 ‘틀림’으로 속단하면 굉장한 모순이다. 그래서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하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온전함과 진실함”을 이루는 신앙공동체로 성숙해가자고 여호수아가 역설했던 것이다. 아멘.
프로바둑선수들은 대결한 후에 ‘복기’(바둑을 다 둔 직후에 패배의 수를 지적하고 설명하며 그게 맞는지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것. 이것은 아마추어들에게는 거의 볼 수 없는 모습임)를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 삶도 아멘을 확인해보는 일이 믿음수준을 한층 더 높여가게 하는 좋은 방법이다. 시도해보자. 아멘.
3) 내 집(15)
“나와 내 집은” 이 말씀은 ‘나 혼자 특출하게’보다 더 심오한 신앙 삶의 이치를 말해 주는데, 그것은 ‘가정 복음화’요 ‘교회의 가정화’를 이루게 선택하는 것이다. 어떤 선택의 결과가 성공이냐 실패냐보다 ‘영생복락’이냐 ‘유황불 못’이냐를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여러분, 하와를 보자. 그녀는 선악과를 어떻게 선택할 것인지 그 숙제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선택을 잘못함으로써 하나님과 멀어지고 남편과 함께 죄와 사망에 갇히고 말았다고 보여주는 게 창세기 3장이다. 이처럼 치명적인 선택 인생을 잘하라고 여호수아가 유언적으로 증언하였던 것이다.
“내 평생에 펑펑 울어보기는 처음이었어요. 하나님의 은혜와 오 목사님의 사랑을 죽을 때까지 못 잊겠습니다.”라고, 이런 식으로 말했던 교인들이 수십, 그 가족까지 수백으로 이 자리에 함께 유종의 미를 이루고 있을 법한데... 저의 모자란 목회지도의 탓으로 나 홀로 먼 길을 떠나는 자리가 되고 말았으니 많이 아쉬워지는 게 제 심정이다. 그래서 제 가족과 하나님의 심판대에 은근히 기대를 거는 게 제 솔직한 심정이요 억척이다. 그러면서 한 가지는 분명히 밝혀둔다. “우리는 전에 오 목사에게 이렇게 배웠어요.”라는 말과 그 태도는 무시무시한 억지라는 사실이다. 믿음과 교회의 개혁을 위해서라면 앞장서는 그리스도인이길 축복한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 말씀이 가리키는 신호등을 확인해보자.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 삶의 방향과 그 수준을 “경외”라고 확실하게 보여줬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παρακαλουμεν 파라칼루멘 παρακαλος 보혜사 성령, “we plead with you” -NKJV-)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κενον 케논 vain, empty) 받지 말라.”(고후 6:1,1달란트처럼 은혜를 악용하거나, “다른 복음”<고후 11:4>을 따라감 = 빗나간 변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