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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22일 설교

“준비합니까?” (딤후 2:20-26 ‘하나님께 합당함’ 23.1.22)

우리나라의 헌법 제10조에 보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라고 명문화(明文化)해 놓았다. 우리나라는 국민마다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가짐으로,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고, 그러한 국민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헌법에 분명하게 밝혀놓은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존엄한 존재로 대우하는 일을 당연한 도리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따라서 개인이 나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나라를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마다 독특한 꿈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그 꿈을 이루도록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재능을 주신다. 그러므로 아무런 의미도 없이 우연히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러한 이치를 인정하고 사람마다 인격적으로 대우하자는 것을 우리나라는 헌법에 명문화해 놓았는데, 이것은 성경을 통하여 밝혀진 하나님의 뜻을 철저하게 준수하자는 의도이다. 그런데도 2016년 3월 1일 ‘우리 헌법 읽기 국민운동’이 출범하면서 시작한 구호가 “헌법대로 하라. 헌법대로 살자.”이었다. 이 구호는 바로 헌법 제10조의 실현이요, 국가가 헌법 제10조를 지키지 않는다는 폭로이었다. 국가가 제10조를 성실하게 지키면 대한민국의 양극화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는 국민이 참다못해 ‘우리 헌법 읽기 국민운동’이라는 비영리민간단체를 만들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일은 전문용어로 기록된 헌법이라서 시민들이 읽어볼 엄두도 내지 못함으로 자연히 헌법에 소홀해지는 동안, 법률가와 법학자, 권력자들이 헌법을 독점하고 자기들 입맛에 맞게 악용하여 ‘시체 헌법(屍體憲法)’이나 ‘어용 헌법(御用憲法)’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주체사상을 통치이념으로 하여 계급 독재를 실시하며, 모든 권력을 유일 지배정당인 조선노동당에 집중시켜놓고도 나라 이름은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DPRK)이다. 이름이나 헌법이 중요하지만 올바르게 실현하고 있느냐가 생명력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오늘 설교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목사인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존엄과 가치를 간직하고 행복을 누리는 삶을, 그릇으로 비유하여 강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먼저 설교 본문 20절을 함께 보자. “큰 집”(μεγάλῃ οἰκίᾳ 메갈레 오이키아 “a great house” = 하나님의 집인 ‘교회’나 ‘하나님 나라’), 실제로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는 다양한 일꾼들이 있는데, 금 그릇 같은 일꾼이 있고, 또 은그릇, 나무 그릇, 흙 그릇에 해당하는 일꾼도 많지요. 그런데 이러한 그릇은 다 만드는 재료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요즘 우리의 사회로 말하면 금수저냐 은수저냐 흙수저냐인데, 사람이 태어날 때 부모님이나 빈부의 차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그릇을 재료와 상관없이 사용 용도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하신다. 그게 주인이 귀하게 쓰느냐 아니면 천하게 쓰느냐에 따라 그릇의 가치와 의미를 결정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귀하게”와 “천하게”라는 말씀을 우리가 오해하기 쉽다. “귀하게”는 손님이 올 때나 특별한 행사 때 쓰는 그릇이고, “천하게”는 평소에 아무렇게나 쓰는 그릇으로 속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귀하게”(τιμὴ 티메 estimate of worth, price paid, honour), “천하게”(ἀτιμίαν not 無價値, 수치 되는)이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금 그릇으로 태어났더라도 천하게 사용하시고, 질그릇으로 태어났더라도 귀하게 이용하신다. 교회일꾼의 가치는 금수저냐 흙수저냐 하는 그 출신보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에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어느 그릇에 해당하는지 신중히 자문자답해 볼 일이다. 이 질문은 우리의 출생이 어떠하냐를 묻는 게 아니라, 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는 ‘귀한 그릇’에 도전하고 있다!”라는 대답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수크렁’이라는 풀을 아나요? 개천 뚝이나 산책길에서 쉽게 눈에 띄는 흔한 풀인데, 강아지풀과 비슷하게 생겼다. 그런데 수크렁은 강아지풀처럼 휘어지지 않고 그 끝이 꼿꼿하게 곧은 모습이 특징이다. 또 강아지풀은 1년생이지만 수크렁은 여러해살이풀이다. 수크렁은 해마다 여름이 끝날 때쯤 꽃을 피웠다가 가을 동안에 씨를 맺고 그 씨앗을 모두 바람에 날려 보낸 후에 그대로 말라져서 추운 겨울을 지낸다. 이러한 수크렁의 삶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 삶과 닮았다는 것이다.

자 그러면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받은 귀한 그릇을 어떻게 하면 수크렁처럼 충성으로 지속할 수 있는가? 우리 하나님이 보시기에 귀한 일꾼으로 신앙생활을 해 가자는 것이다. 아멘.

1) 거룩(21)

“거룩하고”(ἡγιασμένον 헤기아스메논 ἁγιαζω의 수동태 완료 분사, ‘보혜사 성령의 역사로 거룩하게 변화되는 것’ ‘세속과 분리되어 하나님께 속함’), ‘귀하게 쓰임 받는 일꾼’은 그 이유가 출생의 금수저나 은수저가 아니라 ‘깨끗한 회개’ 때문이라는 것이다(“누구든지” τις 티스 some one ‘어떤 사람이든지’라고 번역할 수 있음. 자신을 깨끗하게 회개한다면 그 사람이 어떠한 신분이나 전과범이었든지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은 귀하게 쓰신다는 것임). “주인이 쓰심에 합당하며” εὔχρηστον 유크레스톤 useful ‘좋게 잘 사용하심’. 깨끗하게 회개하는 것을 하나님이 그렇게 중요하게 보신다는 것이다. 그렇다. 깨끗한 회개는 절대로 미사려구(美辭麗句)로 말장난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진실이요 실제 삶이다. 아멘.

2) 따르라(22 τὰς δὲ νεωτερικὰς ἐπιθυμίας φεῦγε, δίωκε)

현재 명령형 동사 2개(φεῦγε 퓨게, δίωκε 듀오케. φεῦγω 퓨고 to flee, escape. δίωκω 디오코 to put in rapid motion, endeavor earnestly to acquire. ‘계속 피하면서 계속 쫓아가 획득함’), 그렇다면 목사 디모데가 계속 피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계속 쫓아가서 획득할 게 무엇인가? 그것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또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획득함이었다. 그런데 “청년의 정욕”(τὰς δὲ νεωτερικὰς ἐπιθυμίας 타스 데 네오테리카스 에피쒸미아스 정관사 ‘타스’가 맨 앞에 있음. “Flee the evil desires of youth” -NIV- 청년의 그 정욕은 성적인 충동과 성급한 기질을 말한다. 청년의 정욕은 중년의 야욕으로 노년의 탐욕으로 탈바꿈한다. 그래서 소돔에서 롯처럼,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했을 때 요셉처럼 즉시 도망가는 게 자신을 깨끗하게 지킬 수 있는 비결이다. 하지만 이 비결은 너무나 어렵다.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하라고 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인 법이다. 먹을 가까이하면 아무래도 까맣게 된다. 사람은 누구와 가까이 지내느냐에 따라 생각도 삶의 방향도 삶의 질도 변한다는 말이다. 신앙생활도 그렇다. 그런데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은 신앙관과 신앙고백을 삶으로 이룬다. 이들이 신앙공동체를 이룰 때, 바로 그 교회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로 세상의 빛이요 소금으로 작동한다. 아멘.

3) 마땅히(24)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δεῖ 데이 must 반드시), 다투지 않으려면 바울은 3가지 조건을 강조했는데, 첫째 주의 종은 온유한다. 여기서 “온유하며”(ἀλλὰ ἤπιον 알라 에피온<ἔπος 에포스 ‘말’>에서 파생한 단어. 오히려 ‘상냥하고 온순한 말’을 하는 것이다. 둘째 주의 종은 가르치기를 잘한다. 셋째 주의 종은 잘 참는다. 그런데 23절에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이 다툼을 만든다고 밝혔다. “어리석고”(μωρὰς 모라스 ‘지각이 없는’, 또 ‘무식한’<ἀπαιδεύτους 아파이듀투스 ἀ + παιδεύω[파이듀오 ‘훈련하다’ ‘교육하다’] = ‘훈련을 받지 않은’ ‘교육 부족’. 그러니 무지, 무식하여 분별력이 모자라 다툼에 휘말림. 세상 말로 무식하면 용감한 경우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을 알면 알수록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공감해주면서 전도해 낸다. 설교 본문 마지막 26절 말씀이다.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그리스도인은 성령님께서 감동하실 것을 믿고 기도하며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해 가는 법이다. 그러면 성령님이 그 택하신 자들을 깨우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신다. 성령님께서 나에게 생각나게 하시고 순종하는 나의 언행을 이용하시는 것이다. 이 이치를 알고 순종하는 자가 주의 종이라는 것이다.

길선주 목사님이 평양신학교에 다닐 때 친구 이경식은 진사 어르신으로 아쉬울 게 없이 잘살았단다. 하지만 7년 동안이나 전도했는데, 그는 훗날 장로님이 되고 목사님이 되어 ‘작은 예수님’이란 별명까지 생겼단다. 이경식 집사님이 설날 길거리에서 노비를 만나자 “형님, 세배받으세요.” 하면서 절을 올리고 나서 ‘예수님을 믿자!’고 권했단다. 양반과 상놈의 차별이 철저한 사회에서, 진사 양반이 노비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세배하는 것은 맑은 하늘에 벼락같은 일이었다. 세배를 받은 노비는 얼마나 감격했든지 전 가족 열두 명을 이끌고 교회에 나가 등록하였다고 한다.

자 이제 오늘 설교 말씀이 가리키는 화살표를 확인해 보자. 인생을 가치로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가치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일꾼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깨끗하게 회개한 그리스도인을 귀한 일꾼으로 삼는다. 확실하게 빨리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방법은 하나님이 쓰시는 일꾼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일꾼은 그냥 쉽지 않다. 단단히 마음먹고 각오해야 하는 삶이다. 환장할 일을 수없이 참아내야 한다. 오해받는 일도 많다. 따질 수도 다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만둘 수도 없다. 억울하기 한이 없다. 그래서 은퇴할 때까지 계속되는 자신과 싸움이다. 육신의 생각과 죄의 유혹을 계속 뿌리쳐야 한다. 계속해서 의를 쫓아가야 하고 계속해서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유지해야 한다. 계속해서 경건생활을 해야 한다. 계속해서 성경을 연구하고 배우며 기도해야 한다. 내가 구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다를 때도 많지만 책임과 사명을 계속해서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쉽지 않다는 것이다. 오직 십자가의 길이다. 그래서 다시 저와 여러분에게 질문해본다. 우리는 어떠한 그릇인가?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깨끗한 그릇인가? 아니면 주님이 사용할 수 없어 버려둔 그릇인데도 모르고 있지는 않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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