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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8일 설교

“불의에서 떠났는가?”(딤후 2:14-19 ‘인정받은 일꾼’ 23.1.8)

옛 우리 할아버지들은 ‘아전인수(我田引水)’라는 말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자기 논에 물대기’라는 뜻인데 상대방은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자기에게만 유리하도록 생각하여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 말씀도 아전인수할 수 있다. 자기에게 유리하게 성경 말씀을 이렇게 저렇게 자기 뜻대로 끼워 맞추어 해석하고, 또 설교를 들을 때도 자기에게 유리한 내용만 ‘아멘’한다. 하지만 자신을 고치게 하고 그래서 불편한 말씀은 그냥 모른 척하며 흘려보내고 외면해 버린다. 실례를 들면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8)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자신을 열심히 따르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러면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받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을 해보자. 대답은 “예” 아니면 “아니오” “몰라요”일 것이다. 그런데 이 대답이 어마어마한 수준 차이로 믿음 생활을 하게 한다. 하지만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모두 얻는다면 기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대답을 “아니요”라고 하겠지요. 또 “예”라고 대답하는 성도는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확인하여 보고 기도하고, 그리고 그 말씀을 확신하며 기도해야 합니다.”라고 설명할 것이다.

그런데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은 지나가던 나그네가 한 말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을 깨우치려고 하셨던 가르침 중에 산상보훈에 뽑힌 말씀이다. 그만큼 막중하다는 것이다. 마가복음 10장 3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왜? 무슨 일을 하려고, 기도하는지 모르고 있어서, 예수님의 제자답지 않은 기도라고 지적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 제자들은 자신이 차지할 “최고의 자리” 즉 성공, 출세를 위하여 간구하였던 것인데, 이게 바로 신앙생활의 아전인수인 것이다.

오늘 설교 본문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성경을 해석하고 선동하는 무리를 잘 대응하라고 신신당부하고 있는 바울을 보여 주고 있다(17 “악성 종양” γάγγραινα νομὴν ἕξει 강그라이나<gnow, mortify> 노멘<pasture> 에크세이<ἔχω to have의 미래형> “their message will spread like cancer.” -NKJV- 실제로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ἐστιν 에스틴 is>” 악성 종양인 암은 아무리 철저히 도려내는 수술을 할지라도 그 뿌리는 남아 있기 쉽다. 후메내오를 다시 보자. 딤전 1:19-20에 보면, 이미 바울이 징계하여 교회에서 추방했던 자인데도 여전히 교회를 괴롭히고 있잖아요.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18절에 “후메내오와 빌레도”의 악성 종양인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여 놓았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이 말씀은 ‘부활이 이미 끝났다’라고 주장하며 ‘영혼의 부활’만 강조한 일인데, 이것은 그 당시의 헬라 철학이 육체적 부활을 부인한 탓이었다. 그때의 시대 풍조를 따르면서 교인들을 속이고 혼동시키곤 하였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것 같아 그냥 두면 결국 신앙생활에 치명타를 입혔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18 αστόχεω 아스토케오 to miss the mark, err.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빗나감. 바울은 고전 15:17에도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라고 증언하였음. 부활이 빠진 기독교는 속 빈 강정이라는 것임).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떤가? 오늘날도 여전하다. 교회 안에서조차 세상의 성공이 인기를 얻고 있다. 그래서 말은 하나님이 중심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 세상의 성공중심을 쫓아가고 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도우심을 어떻게 잘 이용하여 내가 원하는 성공을 이루어 보자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이다. 그렇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께 영광’, ‘성경 중심’, ‘교회 먼저’라고 요란한데, 심판대에서는 무시될 성공이다. 그래서 악성 종양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장터에서 마음에 드는 말을 점 찍고 사려고 말 주인에게 물어봤다. “이 말은 경주마입니까?” “이 말은 등에 안장만 올려놓아도 뛰고 차고 난리입니다.” “그러면 짐수레를 끄는 말입니까?” “이 말한테 멍에를 지우면 마구 뛰고 달아나 버립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일을 합니까?” 말 주인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보신 것처럼 말 모양이 멋지잖아요? 스타일을 즐기는 말이지요.” 이 말 주인 같은 신앙관을 교회에서 볼 수 없나요? 타지도 않고, 짐도 끌지 않고, 겉 모양만 잔뜩 기대하게 키우는 목자 말이다. 이런 목회자는 말로만, 외모만 기독교로 보이게 열심히 단장한다.

자 그러면 내용을 밝혀도 부끄럽지 않은 알찬 신앙생활은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는가? 사도 바울이 아들 디모데 목사에게 알려주는 비법을 함께 살펴보고 필요한 것을 챙기자. 아멘.

1) 말다툼(14)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 말씀은 누구를 대상으로 삼는 말인지 먼저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그들로”는 헬라어성경에 없다(Ταῦτα ὑπομίμνῃσκε 타우타<these> 휘포밈네스케<keep remembering them of these things –NIV->) 16절에도 “그들”이 있기 때문에 혼동할 수 있다. 그렇지만 16절은 거짓을 따르던 거짓 교사들을 가리키고, 14절은 진리를 따르는 에베소 교회의 충성스런 성도<2>를 가리킨다. 그리고 “말다툼”은 말씀의 진리를 향한 탐구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거나 잘난 체하는 것이어서 의미 없는 언쟁이나 주장이었다. 한 번 생각해 보자. 코로나 바이러스 때 자원봉사에 임하던 의료진들은 어떠한 준비를 철저히 합디까? 마스크를 쓰고 방호복을 입고 고글 안경을 착용한 후에 확진자를 대했다. 그렇게 중무장을 안 하면 오히려 감염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바울도 디모데 목사에게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고 심각성을 강조하였다. 거짓은 엄중관리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유익이 하나도 없고” 둘째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바울은 디도서 3장 10절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거짓을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하며 피할 줄 아는 것도 지혜라는 것이다. 아멘.

2) 분별(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이것은 디모데 목사에게 필요충분조건이었다. 당장 디모데가 매달려야 할 바는 죽음을 직면한 바울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다. ‘진리인 성경 말씀을 정확히 다루는 실력’이었다(‘옳게 분별하다’ ὀρθοτομοῦντα 오르쏘토문타 ὀρθοτομεω to cut straight 완료 분사. 성경 말씀을 해석할 때, 어느 단어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전체 문장으로는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알아보는 전문가라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진짜 곡해하기 쉽다. 디모데 목사님만 아니라 오늘날 목회자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순종으로 이루어짐으로 말씀 밑에 나를 복종시켜서 머리로만 아닌 마음으로, 손과 발로 순종해야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을 ‘야다 יָדַע’(to know, experience)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知情意)으로 올바로 체험하는 것만큼 악성 종양을 예방하는 지름길은 없는 셈이다.

3) 버리라(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버리라” περιΐστημι 페리이스테미 avoid, to stand around 피하여 있음.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인 “망령되고 헛된 말”은 피하고 또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거짓 선생들의 망령되고 헛된 말을 따르면 경건과 반대의 길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짓 선생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부풀리기만 하고 정작 자신은 못 경건한 삶을 숨기며 살아간다.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면서 순종을 말로만 끝낸다면 사무엘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고 말했겠는가? 그러니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자는 것이다. 가짜들은 하나님의 명령과 법칙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그래서 이웃 교인을 빗나가게 이끌면서 그것을 ‘전도’라고 속인다. 그 전도는 오래되면 점점 더 심해져 망한다. 우리는 잘못된 사이비 종교나 이단에 빠져서 인생을 망쳐버린 교인들을 보게 된다. 그들이 처음에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계속 속임수에 몸담다가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고 만다.

그래서 19절에 보면, 바울은 디모데 목사님에게 “견고한 터”를 처방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교회이면서, 교회에서 증언하는 복음 설교이다. 교회의 복음 설교는 불변이다. 다만 교회의 복음 설교에 이 세상의 것을 섞는 일은 수시로 가능해진다.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불의에서 떠날지어다”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그리스도인을 말하고, “불의”는 하나님의 명령과 법칙을 떠난 이 세상의 것이요, 복음의 독이기 때문이다.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교인(敎人) 신자(信者) 성도(聖徒)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말들을 한자로 직역하면 말씀을 배우는 사람이 교인(敎人)이고, 말씀을 배우고 믿는 사람이 신자(信者) 말씀을 배우고 믿으며 따르는 특별한 사람들이 성도(聖徒 Saint)이다. 그런데 말씀을 귀로 들어보는 것이나 지식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조금만 수고하면 가능해진다. 그런데 말씀의 이해를 자신의 가치관으로 받아들이고, 삶으로 따르며, 지키는 정도는 굉장히 어렵다. 하지만 바울은 디모데 목사님에게 말씀을 증언하여 교인들이 다 따르게 하라고 강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한다.

자 이제 오늘 설교 말씀을 정리하자. 교회를 흔드는 세력이 교회의 안과 밖에 흔해서 목회를 힘들게 할지라도, 사도 바울은 디모데 목사님에게 확실한 처방을 전해주었다. 그것은 진리를 밝히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여도 실제로 진리의 증언이 아닌 다툼이면 아예 멀리하고 오직 경건한 믿음 삶에 집중하며 ‘말씀을 분별하는 일’에 전문가가 되어 오히려 “하나님의 견고한 터”를 지키라고 강권하였다. 세상이 아무리 혼란스러워 괴롭더라도 그리스도인이 가야 하는 좁은 생명 길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울의 처방이 저와 여러분의 해답으로 활용되길 축복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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