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1일 설교
"미쁘다 이말이여!"(딤후 2:8-13, 23.1.1)
과거에 루마니아가 공산화될 때 공산당들이 교회를 부수고, 수많은 목사 장로 성도를 잡아 죽이거나 중노동을 시켰단다. 그때 목사님이자 신학박사였던 웜브란트(Richard Wurmbrand) 목사님이 14년간 감옥살이하면서 ‘살아있는 순교자’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단다. 웜 브란트 목사님은 독방 감옥에서 온갖 고문에 시달렸다. 그리고 사모 사비나 웜브란트는 다뉴브 운하 노동 수용소에서 얼어 죽기 직전의 추위를 견디며 3년을 지내면서 남편이 감옥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계속 들었단다. 그러나 믿음의 유혹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놀랍게도 두 부부는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고, 계속 예수님을 전했다고 한다. 웜브란트목사님은 감옥에서도 틈만 나면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고 전도하였단다. 그는 하루에 굶어 죽지 않을 만큼만 주는 밥에서 십일조를 떼어서 옆 죄수들에게 주면서 전도하였고, 목말라 죽지 않을 정도로 주는 물을 십일조하여 옆 죄수에게 주면서 전도하더란다. 그러자 감옥의 죄수들이 점점 예수님을 믿어갔다. 웜브란트 목사는 감옥 당국의 골칫거리여서 몰래 죽여버리려고 하니까 이미 유명한 인물이 되어있었다.
웜브란트 목사님이 감옥에서 성경을 읽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두려워 말라’라는 말이 366번이나 반복되는데 1년 365일보다 딱 1번 더 많았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설명하더란다. “하나님은 2월 윤달까지 계산하셨지요!” 이 소문이 미국에까지 알려졌다. 그래서 미국의 기독교인들이 소련에 협상을 제안하였다. 웜브란트 목사님이 석방할 몸값을 밝히라. 소련은 엄청난 돈을 요구하였다. 그럴지라도 미국 기독교인들은 모금운동을 벌렸고, 웜브란트 목사님은 시베리아 감옥에서 풀려났다.
설교 본문도 전도자를 감옥살이시켜도 복음 전도를 옥에 가둘 수 없다는 이치를 사도 바울이 디모데 목사님에게 깨우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9 “죄인” δεσμῶν<δεσμον 데스몬의 복수형, 족쇄들, 차꼬들> ὡς κακοῦργος<카쿠르고스 κακος ; a bad quality, corrupt, worthless, wicked + ἔργον 에르곤 ; deed = 행악자, 흉악범> 바울은 전도하다가 최악의 형벌에 시달렸음!). 그런데 바울 자신과 다르게 옥중에서도 전도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실 전도는 어느 시대나 어떠한 방해 속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 감옥에 두 번이나 갇혔고 두 번째는 외부와 차단되고 밀폐된 작은 방에서 족쇄들로 묶이고 말았는데도 그는 전도를 계속하였고 옥중 서신들을 기록하여 내보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의 옥중 전도는 놀랍게도 열매를 맺어가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ἀλλὰ ὁ λόγος τοῦ θεοῦ οὐ δέδεται 알라 호 로고스 투 쎄우 우 데데타이 ἀλλὰ = δε의 강조형, δέδεται = 완료 수동태, “the Word of God is not chained or imprisoned!” -Amf-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리 막강한 외부 압력에도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웅변해 주고 있음).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은 가둘 수 있어도 전파되는 복음 자체는 막지 못한다. 이것이 부활복음의 권능이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이하에 보면 바울이 전도하다가 당한 고난을 나열해 놓았다. ‘옥에 갇히고, 매를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고, 한 번 돌로 맞았고, 세 번 파선 당하고,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거짓 형제의 위험이 있었고, 여러 번 자지 못하였고, 목말랐고, 굶었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이 전도하지 않으면 이러한 고통을 당할 이유가 없었다. 복음 전도 때문에 생기는 고난이었다.
사도행전 24:5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이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유대종교 쪽에서 볼 때 바울은 골치거리였다.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 종교의 비중은 막중하였다. 그러한 사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당했다는 사실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는데 바울은 로마시민권이란 초특권을 가졌으면서도 복음 전도 때문에 이단의 우두머리로 몰렸다.
그러고 바울은 디모데 목사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전 1:8),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3),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라고 강권을 반복하였다. 복음 전도는 당연히 고난과 함께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피하면서 감사할도 수 있고, 고난 중에도 전도하면서 살아갈 수도 있다. 물론 고난을 꼭 받아야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이 충성스럽게 복음을 전할 때 고난을 받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지금도 엄청난 고난을 알면서도 낯선 문화권에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님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자 그러면 바울처럼 ‘매이지 않는 복음의 증인’으로 멋지게 믿음생활을 하려면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가? 사도 바울이 아들 디모데 목사에게 전수하고 있는 모습을 눈여겨 살펴보고 필요한 것을 챙기자. 아멘.
1) 기억하라(8)
Μνημόνευω 므네모뉴오 to be mindful of, to fix the thoughts upon 생각을 맞추고 집중함.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본문은 Μνημόνευε(므네모뉴에, 현재 명령형, 계속, 진행, 유지, 영향을 반영함, 순종! 목사님들이 제일 겁먹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아는가? “나, 교회 안 나오겠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 자체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잘 맞춰져 있다고 디모데에게 밝혔다. “내가 전한 복음대로” 약 1:22-25에도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2-25).
2) 영광(10)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으려 함이라.”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순간부터 시작되어 영생 복락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구원은 과거에서 현재로, 미래로 진행되는데, 구원의 완성은 “영원한 영광”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원한 영광은 바로 그리스도인마다 궁극적인 소망이 되겠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순종 때문에 고난을 겪는다면 하나님이 주실 영원한 영광을 보장받는 기회이다. 그러니 순종 중에 생기는 고난은 긍정이요, 영광의 보증인 셈이다.
바울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διὰ τοὺς ἐκλεκτούς 디아 투스 에클렉투스 διὰ + τοὺς 목적격 ‘∼ 때문에’) 무슨 말인가 하면, 바울이 “모든 것을 참음”의 이유가 바로 하나님께서 택하셨을지라도 아직 믿음생활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찾아다니느라고 당하는 온갖 고통을 다 참는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여기에 면류관 상이 확실히 따르는 전도자의 삶이 있다. 아멘.
3) 왕 노릇(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참다’ ὑπομένομεν 휘포메노멘 현재형 “If we continue to endure” -GN-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의 인내는 수없이 반복된다는 사실과 그 고난은 항상 이겨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마 10:22에서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가르치신 바 있는데, “나중까지 견디는 자에게 주어지는 구원”을 바울은 “왕 노릇할 것”이란 말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핍박과 환난 중에 견디기 어려워 결국 믿음을 타협한다면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주님께서도 그를 부인한다는 것이요, 하지만 고난과 핍박을 참고 끝까지 믿음으로 이겨나가면, 주님도 부인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하게 해주신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바울은 롬 8:17에서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히 10:38-39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믿음이 허약해지면 ‘뒤로 밀리는 삶을 살아간다.’라는 것이다. 과거 개역에는 “멸망할 자”를 “침륜(沈淪 잠길 침, 빠질 륜. 물속에 가라앉음. απωλεια 아폴레이아 ruin, state of being destroyed)에 빠질 자”라고 번역했다. 신앙생활을 앞으로 나가든지, 위로 올라가든지 하는 힘이 약하면 어떤 사건이나 환경에서 신앙 삶이 뒤로 물러나거나 밑으로 내려가다가 결국 απωλεια 죽는다고 본 것이지요. 고난에 밀리지 말고 박차고 전진해가는 신앙생활을 해 가길 축복한다.
이제 올 새해의 신앙 삶의 푯대를 확인해 보자. 바울은 설교본문 9절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였다.”라고 디모데 목사에게 증언하였다. 그런데 꼼꼼히 보면 바울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 죄인과 같다고 하였다. 죄인이 아닌데도 죄인처럼 묶였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28:20에는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라고 했고, 에베소서 6:20에는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이라고 밝혔다. 엡 6:20에서 바울이 말한 “이 일”은 복음의 비밀을 알리는 전도였다. 바울은 전도 때문에 여러 번 감옥에 갇히고 쇠사슬에 매였던 사도요, 성경기록자요, 목회자요, 전도자였다. 올해 내내 자주 생각나길 축복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