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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5일 설교

“미쁜 말이여!” (딤전 4:6-16‘그리스도의 선한 일꾼’ 22.9.25)

더운 지방에는 다양한 꽃을 피우는 사라세니아(Sarracenia)라는 식물이 특이하게 벌레를 잡아먹고 살아간단다. 그래서 개미나 꿀벌 같은 곤충이 사라세니아 잎에 올라오면 쉽게 미끄러져 내려가도록 나팔 구조로 되어있단다. 손가락으로 잎을 살짝 만져보면 밑으로 향한 가시 같은 잔털이 매끄럽게 많이 나 있어서, 곤충이 일단 밑으로 빠지면 위로 올라오는 것을 그 많은 가시털이 방해함으로 미끄러질 때는 융단이지만 올라올 때는 가시밭길로 변한다. 그런 데다가 밑에는 산성 액체가 고여 있어서 벌레를 녹이기 시작한단다. 곤충은 산채로 산성 액체에 녹는데, 도망가지도 못하고 서서히 죽어서 사라세니아의 먹이가 된다는 것이다.

사라세니아 풀이 벌레들을 잡아먹는 방법은 화려한 꽃이나 마취성분을 가진 액체를 나팔 대롱처럼 된 입구에 발산해 놓고 벌레를 유인하면, 걸려든 벌레들이 그 액체를 먹고 비틀거리다 밑으로 미끄러진단다. 식충식물들은 보통 돋보이는 꽃으로 곤충을 유인하는데, 사라세니아 중에 유독 시타시나(psittacina)는 붉은 잎의 꿀샘으로 벌레를 유혹하여 잡아먹는 대식가라고 한다. 꽃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곤충도 여러 종류인데, 꿀의 유혹을 이겨내는 곤충들은 거의 없단다. 곤충들은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꿀을 만났으니 덥석 달려들다가 결국 시타시나의 함정에 빠져 목숨을 바치고 만다는 것이다.

분명히 잘못된 사상인데도 진리인 양 벌꿀처럼 달콤한 설명으로 가려서 교인들을 유혹하는 일은 흔하다. 이러한 유혹이 그리스도인의 신앙 식견을 혼동시키고 빛에서 어둠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그런데 그 달콤한 유혹이 잠시 잠깐 꿀맛인 동안에 그 발걸음은 슬슬 불 못으로 미끄러지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 설교 본문도 바울이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교인들을 예수님의 좋은 일꾼들로 양육하는 일을 올바로 하여 구원을 이루라고 누누이 강권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 주는데 저랑 같이 확인해 보자(16 “구원하리라” σώσεις 소세이스 you will save. 또 “이것”이라는 말씀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지속하는 일’인데 결국 “좋은 일꾼 만들기”이다. 그리고 ‘살핀다’는 말씀은 ἐπιμένω 에피메노 ἐπι + μένω<‘위에 가까이> + 머문다<μένω>’ 그런데 “계속하라”와 “이것을” 사이에 γαρ 가르<because>라는 말이 헬라어 성경에는 있음. 확실한 구원이유를 밝혀줌! “watch yourself and watch your teaching. keep on doing these things, because if you do, you will save both yourself and those who hear you.” -GN-). 이 미래형으로 설명하는 구원이유를 좀 더 정확히 알려면 롬 5:1, 9를 함께 보면 선명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현>.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과>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미>” 바울은 구원을 과거형 구원, 현재형 구원, 미래형 구원으로 나누어서 논증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음!).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어 구원을 받았고, 그 구원을 지속하면서 누리고, 앞으로 사후에 심판대를 거쳐 허락될 천국에서 영생복락의 구원까지, 바울의 권면대로 “이루리라”에 해당하게 신앙생활을 해가고 있다면, 그 성도가 신앙생활을 잘하는 셈이고 진짜 축복을 받은 것이다. 아멘.

예수님이 12제자 가운데 특별히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기도를 하셨을 때, 그 3제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라고 하시고, 한참 기도하시다가 와서 보니까, 3제자가 졸고 있었지요. 주님께서 제자들을 깨우고 말씀하시길,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시고 또 가셔서 피방울 같이 땀방울을 흘리면서 기도하시고, 세 제자에게 다시 오셔서 보니, 그들이 여전히 졸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자고 쉬라.” 그렇다. ‘마음은 원하는데, 육신이 약하다면’ 사명 감당은 필패하게 된다. 원하는 마음에 몸도 따라서 충성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기도하기를 결심해도 몸이 간구할 수 있도록 따라주지 못한다면 베드로처럼 유혹에 걸려들고 결정적인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배신하는 졸장부 짓을 하게 된다. ‘깨어 있으라’라는 말씀을 예수님께 여러 번 들은들 깨어 있는 삶에 순종할 만큼 연단한 몸이 아니라면 믿음생활의 수준은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반대로 몸은 강건한데 마음이 네모반듯하지 못한 교인도 많다. 그러한 마음을 ‘심통’이라고 한다. 심통은 마귀와 어울리지 성령님의 전이 될 수는 없다.

로마의 트라이야누스 황제는 모든 사람에게 황제 숭배를 강요하였고, 기독교인들은 정치적 음모를 꾀하는 비밀 결사대라고 오인하여 박해했는데, 그는 수많은 기독교인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어 핍박할 때 기독교인에 대한 정확한 실상을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했단다. 그 내용을 보면; “기독교인들은 절대 도둑질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절대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절대 부패하지 않고 깨끗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사랑했습니다.” 이것은 믿음과 삶이 일치하는 신앙인임을 잘 보여 준다. 이게 거룩함이다!

자 그러면 교회가 예수님이 의도한 교회답게 구원공동체를 이루고 이어가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설교 본문을 좀 세밀하게 살펴보면서 바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자.

1) 깨우침(6)

“깨우치면”(Ταῦτα ὑποτιθέμενος τοῖς ἀδελφοῖς 복수형태 휘포티쎄메노스 ὑποτιθημι 휘포티쎄미 현재분사<계속 진행> ‘ὑπο ∼아래’ + ‘τιθημι 놓다’ to set on imminent risk) 그래서 이 말씀은 ‘깨우치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밝혀준다. 건축가가 집을 짓는 것처럼 에베소 교인들의 믿음생활을 괴롭더라도 성경의 언약과 법칙으로 기초부터 제대로 쌓아가라는 것이다. 만약 거짓 교사들의 혼동을 그대로 놔두면 에베소 교회는 마구 휘청거리고 부서지겠지요.

바울 사도는 디모데 목사에게 에베소 교회의 교우들을 깨우치라고 강권하였다. 깨우침은 구체적으로 그 당시 거짓 교사들이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을 먹지 말라”라고 혼동시켰는데,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니 다 감사한 마음으로 받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게 깨우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목사님 디모데 자신이 이미 따르는 좋은 교훈이요 참된 믿음의 원리라서 틀림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모든 군인이 누구나 예외 없이 먼저 힘든 훈련을 받고 나면 점점 용맹한 군인이 되어 가듯이 교회의 좋은 일꾼이 되려면 성경말씀의 원리와 법칙으로 좋은 교훈을 잘 받아야 한다. 딤후 3:16∼17에 보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왕 신앙생활을 할 바에야 성경말씀을 통하여 언약원리와 법칙을 터득하고 익혀서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으로 충성하는 게 현명하고 효과적인 믿음생활이다. 시도해보길 축복한다. 아멘.

2) 경건(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γύμναζω 귐나죠 naked, 벌거벗고 연습하는 것. exercise, train, discipline → disciple ‘훈련된 사람’) 모세 신앙공동체는 광야에서 낮에는 구름 밑에서 밤에는 불기둥 아래서, 새벽마다 ‘만나 식사’를 받아먹고 40년간 혹독하게 하나님 백성의 훈련을 받으면서 애굽의 타성을 뽑아냈다. 그래서 경건훈련이었다. “경건”(εὐσέβειαν ‘잘 예배함’ 하나님에게서 그만한 가치를 발견하고 존경하는 태도. ‘순결한 양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마음’<Calvin>. 그러므로 경건은 한 번에 되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경건에 이르도록 연습하라고 권하였다. train은 신체를 단련시키는 운동이다. 그러기에 경건 훈련은 먼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계속 γύμναζω(naked, train) 하는 것이다. 15절에 이 모든 일이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라고 하였다. 이 정도라면 프로(Professional)이다. 프로는 항상 대충대충 하지 않고 오히려 일사각오(一死覺悟)로 철두철미(徹頭徹尾)하게, 시종일관(始終一貫) 한다.

교인들은 성령 충만을 원하면서도 성령에 사로잡히려고 하지 않는다. 그 성령이 예수님의 온유하고 지혜 신유의 영이라 해도, 교인들은 그 성령에 사로잡히기를 원치 않는다. 왜 그런가? 성령에 사로잡히면 성령이 자기 삶의 주인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심으로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나는 성령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기를 진정으로 원하는지요? 어쩌면 성령님이 내 삶의 주인은 되시는 것은 싫고 그냥 성령이 내게 주실 수 있는 은사나 축복을 내가 원하는 게 아닌가요? 성령 충만하신 예수님이 세상을 꾸짖다가 적대관계를 당했듯이 성령충만해진 나도 세상을 거역하다 적대관계를 당할 것인데, 세상이 나를 미워해도 당연하게 성령 충만을 원하고 있는가요? 만약 이 모두에 ‘예’라고 대답하지 않는다면 성령 충만을 진정한 사모함이 아닌 거다. 명심하길 바란다. 아멘.

3) 소망(10)

바울은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특성을 “수고하고 힘쓰는”(γὰρ κοπιῶμεν καὶ ἀγωνιζόμεθα 가르 코피오멘 카이 아고니조메싸 κοπιῶμεν<노동, 현재형>, ἀγωνιζόμεθα<‘盡力’ -개역-> “labor and suffer reproach” -NKJV->)이라고 밝혀놓았다.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고 신앙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믿음 일생을 전투하듯이 애쓰며 순종한다. 그 이유는 믿음 생활을 심판대에서 살아계신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께 총평을 받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지런히 순종하면서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매일 하나님의 저울대에 올라가 본다. 야구용어로 ‘전력투구’, 영어로는 ‘all in’이다. 특히 교회에서 좋은 일꾼으로 순종해 보기로 작심했다면 명심해야 할 사실이다.

이제 오늘 설교 말씀이 가리키는 믿음의 푯대를 다시 확인해 보고 챙기자. 경건한 신앙 삶은 나이를 훌쩍 뛰어넘게 한다. 그러한 경건 신앙은 자신의 소질과 은혜와 은사를 한 덩어리로 만들어 자신은 물론 남들을 구원시켜 믿음 생활을 성화해가는 실력이요 충성비결이며 프로다운 자긍심이다. 그런데 경건은 젊은 나이에도 얼마든지 이루어낼 수 있다. 훈련으로 되기 때문이다. 이제 늦었다고 생각하는 분도 어서 시도해가길 축복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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