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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18일 설교

“이겨내자!”(딤전 4:1-5 ‘거짓을 이기는 거룩’ 22.9.18)

범죄와 상관없이 유대인이라서 체포되어 기차로 며칠 밤낮을 달려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 사람, 그것도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와 헤어졌던 그 그리움과 상실의 아픔, 불결한 환경, 추위, 굶주림, 체력한계에 시달리는 강제노동 그리고 가스실 죽음이 임박했다는 미칠듯한 공포심, 이 현실을 만약 우리가 당했다면 어떨까? 소름이 돋는다. 이렇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처지에서 자신이 창시한 로고테라피(logotherapy 심리치료요법)를 입증하는 기회로 삼는 사람이 빅터 프랭클(Viktor Emil Frankl, 1905.3.26. – 1997.9.2) 박사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생사를 넘나드는 악조건에서 프랭클 박사는 꺾이기보다 그 고통 중에 자신과 주위 사람들을 위로하고 평안히 지냈단다. 그 이유는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라는 니체의 말을 신조로 삼고 3가지로 정리했는데, 첫째는 삶의 의미는 창조적 가치(‘자신만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으로. 프랭클 박사는 그동안 써온 원고를 수용소에도 가져와서 보완했지만 결국 빼앗겼다. 그래도 틈나면 그 원고 내용을 검증하고 메모해두었단다. 그래서 자신만이 하는 그 일이 살아갈 새 힘을 주곤 하더란다. 누구의 부모이고, 자식이며, 친구이기만 아무도 쉽게 ‘대체할 수 없는’ 독보적인 존재일 때 새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경험적 가치(‘사랑’)이다. 누군가에게 참사랑을 받아서 그 참사랑을 누군가에게 실행하는 것을 영혼으로 아는 사람은, 어떤 절망도 죽음으로 끌고 가지 못하는 법이니, 참사랑을 하는 동안 누구나 어떠한 역경과 공포도 충분히 이겨낸다는 것이다. 셋째는 태도적 가치(‘고난을 받아들임’)이다. 우리는 아우슈비츠 정도는 아니더라도 불안과 괴롬 중에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프랭클 박사는 주장하였다. “창조와 즐거움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도 죽음도 없이 인생은 완성되지 않는다.”라고. 큰 고통과 가혹한 시련일수록 그것은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법이라서, 시련을 이겨내는 자체가 의미 있고, 시련을 이겨낸 자는 그전보다 강인해졌을 것이니, 삶의 고통을 피할 수단을 찾으려고 애쓰기보다,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데 가치를 두라는 것이다.

그렇다. 프랭클 박사가 처방한 3가지, ‘자기 일’ ‘사랑 삶’ ‘고난수용’을 올바로 한다면 죽음을 위협하는 고난과 절망 앞에서도 새 힘을 얻을 수 있다. 프랭클 박사는 “우리는 어떤 상황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라고 말했다. 맞다. 고통 때문에 불행해지는 게 아니라 그 고통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불행해진다. 그런데 그 태도를 결정하는 당사자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고통을 당장 없애기는 어렵지만, 그 고통을 소망의 기회로 삼는 태도만큼은 우리가 할 수 있다.

오늘 설교 본문도 교회가 혼란을 당해 굉장히 골치 아프게 될 것을 예상하고 그 대비책을 준비시키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저와 여러분에게 대단한 관심거리가 된다. 지금 저랑 같이 확인하여 보자(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어떤 사람들”은 에베소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2 “자들”>) 이들은 그 당시에 영은 선하고 육체는 사악하니 특정한 음식과 혼인을 부정하게 보았고, 그러다 보니 지나친 금욕주의자들이 생겨났다. 음식이나 정욕을 절제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금욕주의는 성령의 보혜사 됨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기는 자기학대의 짓이요, 자기 고행행위이다. 그런데도 악한 영들에 지배당한 자들은 금욕주의와 특정 음식을 내세워 성도들을 혼동시켰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맡은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본문 말씀으로 명 처방을 내려주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바 그대로 하면 “귀신의 가르침”(διδασκαλίαις δαιμονίων 디다스칼리아이스 다이모니온 “things taught by demons” -NIV- 귀신들이 여러 가지로, 여러 번 혼동시켰다는 것!).

‘비밀’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남이 모르게 숨기는 일’이다. 영어로 ‘secret’인데, 예를 들면 연인과 난잡하게 지내다 결혼하여 그 과거를 남편에게 숨기고 있다면, 과거의 연인 생활은 비밀(secret)에 해당한다. 또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거나 알려지지 않은 내용’도 비밀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바닷속에 대하여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은 지극히 한정적이다. 그래서 저 바다에 대하여 알아내야 할 것들은 너무나 많이 남아 있다. 저 바다에 대해 아직 모르고 있는 것들을 ‘해양의 비밀’이라고 한다. 이러한 비밀을 영어로 ‘mystery’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말로 ‘secret’는 ‘비밀’이라고 번역하고, ‘mystery’는 ‘신비’라고 번역한다. 그런데 ‘비밀’(secret)은 대체로 밝혀지면 당사자가 괴롭다. 그렇지만 ‘신비’(mystery)밝혀지면 밝혀낸 사람은 물론이고 그 공동체 전체가 유익해진다. 그리고 비밀은 알려주면 쉽게 알 수 있지만, 신비는 알려줘도 실력을 갖춘 사람만 알아차린다. 예를 들면 ‘상대성 이론’이라는 신비한 창조의 법칙을 아인슈타인이 발견해 냈는데, 이것을 잘 설명해주어도 이해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이다. 들을 귀가 있어야 알아차리고,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알게 된다. 그래서 신비는 깨달았을 때 큰 복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간구해서 응답을 받는다면 더할 나위 없는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다. 아멘.

자 그러면 골치 아픈 곤란을 당했을 때 바울이나 프랭클 박사처럼 평안히 지혜롭게 대처하려면 어떤 신앙생활을 하면 되는지 나랑 같이 설교 본문을 좀더 세밀하게 살펴보자. 아멘.

1) 양심(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 “양심”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바울은 συνειδησις(쉰에이데시스 conscience <συν 순, con = with ‘함께’ ‘더불어’ + ειδησιs 에이데시스 to know how, science 과학적인 지식을 깨닫는 것! “함께 알고 깨닫는 것”>. 양심은 함께 이해하고 함께 깨달은 것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양심은 개인적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관계적이다.

그런데 양심이 화인 맞은 사람이 있다. 양심에 불도장(火印)이 찍혔으니 양심이 새까맣게 타버렸다. 양심이 죽은 것이다. 아무 기능도 못 한다. 이런 자는 옳고 그름,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지 못한다. 그저 난폭하고 무자비하고 거짓말과 배신을 해대고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속으로 세속적인 삶을 살면서 겉으로 경건한 척하고, 진짜는 돈과 쾌락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면서 겉으로는 하나님 제일주의인 척한다. 이런 큰일이 또 어디 있던가? 참 신앙은 진실한 식견과 선한 양심 안에서 진보를 이루어간다. 고전 8장 7절 말씀이다.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왜 그런가? 고전 10:20에 대답이 있다.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그렇다면 내 양심은 어떤지 자주 자문자답해 볼 필요는 충분하다 할 것이다. 아멘.

2) 감사함(3)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 이 말씀은 엄청난 개혁적 신앙고백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시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이만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는다.”라고 할 수 있잖아요. 창세기 1:31에 보면,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 악하게 기능하는 피조물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로 창조세계가 변질한 거다. 그리고 구약 율법에 규정된 부정한 음식들에 대한 말씀은 그 음식들 자체의 부정함보다 그것들이 율법준수에 도움 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부정함이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으로 성취를 선포하는 신약성경을 따르면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구분할 필요는 없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골 2:16).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들을 다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음식만 그런 게 아니다. 들판의 풀도 감사하고, 가정도 감사하고, 인생도 감사하며, 십자가성(十字架性) 고난도 감사이고, 실패도 감사이다. 이 마음이 바로 올바른 마음 성전이고 선한 양심이며 큰 믿음이다.

우리나라는 고난환경을 싫어하며 축복의 반대로 여기는 여론이 강하다. 그런데 고난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감사할 수 있다. 그 고난환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저울에 올라서게 되기 때문이다. 곤충들은 몸 구조상 6개의 발로 기어 다니기 때문에 대부분 하늘을 보지 못한다. 그런데도 그들이 하늘을 볼 때가 있다. 기어가다가 그만 굴러 뒤집혔을 때이다. 그러면 곤충들은 뒤집힌 몸을 다시 정상으로 회복하려고 곧바로 발 6개를 모두 휘젓고 몸부림을 친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들도 고난이 심할수록 살려달라고 하나님을 찾는다. 그냥 아무 일 없이 순탄한데 애태우며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드물다. 아멘.

3) 거룩함(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교회 안에도 사탄의 영에 속는 교인이 있는데 이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음이 부족한 탓일 뿐이다. 깨어 있는 교회라면 사탄의 영에 속한 사람이 들어와 설쳐대도 오히려 더 강건하고 더 담대한 주님의 군병으로 단련되는 기회로 만든다. 이러한 주인공으로 저와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기를 축복한다. 아멘.

기도 중에 하늘 음성이 들렸다. “베드로야, 일어나서 잡아먹어라.” 베드로가 순종하려고 확인해 보고 대답하였다.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저는 속되고 부정한 것은 내가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자 하늘에서 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아라.” 이것이다! 내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겨먹지 말아야 거룩이다. 거룩함은 인간의 금욕과 극기로 성취되지 않고 오직 성령이 보혜사 하시는 말씀과 기도로 이루어진다.

지금도 사탄의 영에 조종당하는 이단은 활동한다. 그들은 빗나간 사상과 학설과 종교이론으로 사탄의 뜻을 실현하는데 동조하는 인물들도 많다. 21대 국회의원 79명이 한국교회 폐지법을 발의했다가 교회들의 빗발치는 항의에 못이겨 스스로 철회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깨어 있는 지각으로 이 시대를 분별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끼리만 그놈의 ‘한국교회 폐지법 발의’를 곰곰이 되씹으면서 질문해보자. ‘왜 절간 폐지법 발의하지 않았을까?’ ‘향교폐지법을 발의하지 않는데 왜 교회만 없애자는가?’이다. 이 질문의 정답을 목사 집사 가리지 말고 양심적으로 찾을 때 한국교회는 급속도로 거룩해진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를 거울삼아 우리 자신과 교회와 가정을 비춰보자. 얼마나 고난과 거짓과 죄악을 이겨나가고 있나요? ‘신비’(mystery)를 찾아 ‘자기 일’과 ‘사랑 삶’과 ‘고난수용’ 하는 때가 보이면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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