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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7일 설교

“파선하는 믿음!”(딤전 1:18-20 ‘선한 싸움과 믿음’ 22.8.7)

성경의 역사와 지형과 기후를 공감하고자 이스라엘로 여행을 떠나셨던 목사님들이 계셨다. 그 팀을 가이드하시던 여 집사님이 이러한 말을 하더란다. “이스라엘로 관광 오셨던 한국의 목사들을 여러 팀을 가이드해 드렸는데 여러 유형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무례하고 품위 없이 자기중심적인 목사일수록 보수적인 교단에 속했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인간적이고 남을 배려할 줄 알고 기본적 예의를 지키는 목사님들은 그래도 자유교단에 속한 편이었습니다. 가이드 나도 보수 교단에 속하였는데, 안타까운 일은 하나님을 가장 올바로 섬긴다고 자부하면서 어떻게 그런 결례 행위를 하시는지... 참으로 반성을 모르고 사시는 목사님들이어서 탄식만 했습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십자가를 진다는 설교는 그 목사님들이 가진 신학 서적에서 발취한 천박한 거라고 생각을 하게 됐지요. 그래서 목사님들의 삶이 중생하려면 목사님들의 신학지식이 중생해야 한다고 실감하였습니다.” 어깨에 힘을 주시는 목사님들의 설교와 그 목사님 자신들의 행위가 너무나 따로따로여서 가이드 집사님이 실망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성경의 바리새인인지 아닌지 진단해보게 하는 7가지 특성이 있다. ① 교만(Proud) ② 성령의 역사를 중단론자들(Cessationists) ③ 사랑 없음(Unloving) ④ 허식(Hypocritical) ⑤ 기쁨 없음(Joyless) ⑥ 방법의 우상화(Methodolatry<Method + Idolatry>) ⑦ 권세 추구(Powerful) 이러한 7가지 특성은 개혁신앙 삶을 절대적으로 방해하고, 교회를 병들게 하는 믿음 증상들이다.

오늘 설교 본문도 하나님의 선한 뜻을 알뜰하게 성취해가는 그러한 충실한 삶을 살아보라고 강권하고 있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την παραγγελιαν 텐 파랑겔리안 παρα<곁> + αγγελος<천사>. 천사가 전하는 명령, 지시, 교훈, “경계” -개역-. 명령을 통해 이루어야 할 목적은 “선한 싸움”이었음. παρατιθεμαι 파라티세마이 παρα<곁> + τιθεμι 티쎄미<두다 set> = 이 교훈을 맡긴다)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την καλην στρατειαν 텐 칼렌 스트라테이안. 명백한 군사용어. 디모데에게 전투하는 군인을 연상시켜서 전투하는 군인의 마음가짐으로 선한 싸움을 하라고 강권함. 악조건을 견디고 이겨내는 집중력과 지구력으로 총력전임)” 그렇다면 이 선한 싸움은 누구와 전투인가? 다른 교훈을 전하여 복음을 변질시키는 거짓 교사들이고, 넓게 보면 거짓 교사들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충동하여 교회를 혼란하게 하여 분쟁, 분열시키는 사탄이다.

신앙생활은 무엇이던가? 성경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이다. 실례를 들면 아브람이 하란에서 하나님에게 언약의 말씀을 듣고 가나안을 향하여 구원의 길을 떠났는데, 온갖 방해세력과 싸워 이겨내면서 계속 나아갔다. 아브람이 명심할 하나님의 언약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였다. 그렇다면 아브람인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울은 한마디로 이렇게 밝혀놓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1:15). 이 말씀은 성경 66권의 요약인데, 구원 불능한 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크나큰 선물이라는 의미이다. 이 선물을 영접하려면 먼저 자기 죄를 시인하고 통회한 후에, 예수님의 다스림 안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사람은 이미 이생에서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이 복음의 핵심을 왜곡시키려고 하는 무리가 생기는 법이다. 교회에서 가장 큰 위험은 핍박이 아니라 거짓 교리이다. 실제로 핍박은 교회를 축소해버리지만, 한편으로 교회를 정화하여 그리스도의 사명자 교회답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거짓 교리는 교회를 송두리째 쭉정이로 채우게 하고, 설명을 들을 때 솔깃하고 듣는 이에게 편리하고 부담도 적어 보여 당장 좋은데 구원이 없어 결국 지옥 백성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 목사 디모데에게 그들과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강권하였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하였던 “이 교훈”은 예수님께 직접 받았다(“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11>, 또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갈 1:12). 그리고 “이 교훈”을 “디모데에게 맡겼다.” 바울이 “이 교훈”을 디모데에게 맡겼다는 것은 디모데가 바울에게 받은 “이 교훈”을 조금도 변질시키거나, 위조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잘 보관하고 전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웅변한다. 즉,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전하는 복음은 순수한 그대로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또 다르게 전달하였던 방법은 기록된 말씀이었다. 우리는 기록된 성경을 통하여 바울이 디모데에게 맡겼던 “이 교훈”을 잘 받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저와 여러분도 복음을 맡기는 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복음을 이해하고 올바로 믿기도 어렵지만, 교회가 올바른 복음을 간직하고, 그 복음을 그대로 가르쳐 전수하기는 전혀 쉽지 않다. 현재 한국교회가 물량주의, 번영주의, 상업주의, 기복신앙으로 오염되어 자생능력을 잃어가고 있음을 대부분 시인하는 것을 봐도 복음을 순수하게 간직하고 전수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자 그러면 바울처럼 하나님께 받은 “이 교훈”을 잘 간직했다가 또 잘 맡기려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면 되는가?

1) 예언(18)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사명을 지도했을 때 그 핵심은 “예언”이었다(προφητειας 프로페테이아스 예언들 복수 προφητεια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딤전 4:14- 디모데가 목사 안수 받을 때 밝혀주신 하나님의 뜻과 그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은사는 확실하였음을 말해줌).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그렇다면 디모데는 복음의 적들을 대항할 때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잘 활용하여 담대하게 싸울 수 있었다.

2) 착한 양심(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하였다(πιστις 피스티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그 내용을 인식하고,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생활). 그렇다면 디모데가 아직 믿음이 없었는가? 그는 오랫동안 바울과 함께 그 험한 선교여행에 동참하였는데도 바울은 믿음을 가지라고 권했다. 그것은 새로운 고난환경에서 고충 때문에 생기는 두려움과 좌절감, 자신의 부르심을 의심하게 됨을 이기는 믿음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했다. 이 양심은 모든 사물에 대하여 그대로 반응하도록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장치해 두신 것인데, 물론 이 장치로 인간이 죄를 분별하고 순종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도덕적으로 착하고 올바른 것을 선호하고 믿음과 이웃사촌 한다. 믿음이 클수록 당연히 착한 양심도 함께 살아있다. 그런 그리스도인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아직 못 보았다면 성경을 천천히 읽다가 요셉이나 한나, 에스더, 다니엘, 이러한 사람들은 정황을 확인하면서 읽어보자. 그러고 대신 자신을 대입시켜놓고 양심에 귀를 기울여보자. 그런데 인간의 몸이 자각증상을 하지 못하면 암 같은 무서운 질병이 그 사람의 몸에 자리를 잡고 치명상을 주게 된다. 조기발견을 놓쳤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의사 의료 장비와 약이라도 쓸모가 없다.

베드로가 벧전 3:16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날 왜 교인들이 수긍할 수 없는 부끄러운 뉴스의 주인공으로 둔갑하는가? 선한 양심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리라. 윤동주 시인은 노래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나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선한 양심이 얼마나 건강했는지 잘 보여주었다. 이러한 양심이 지금 한국교회의 대형교회에도 실존한다면 어떠한 뉴스를 만들어낼지 그 그림은 아주 쉽게 그려진다. 믿음과 착한 양심이 살아있기를 축복한다. 아멘.

3) 사탄에게(20)

사도바울은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를 사탄에게 내어주었다고 밝혔다. 구원을 받았지만 믿음이 파선하는 교인들이었다. 이들은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말씀의 생활화를 통해 임마누엘을 체험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기의 회개 거절을 정당화해주는 다른 교훈에 기울어졌다. 교회가 교인들의 죄악을 묵인하고 지나치는 것만 사랑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범죄를 무조건 덮어주면 회개할 기회를 상실한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5-17).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말씀은 ‘사탄에게 넘겨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교단 헌법에는 교회에서 내쫓는 징계를 ‘출교’라고 한다. 물론 출교 이전에 돌이킬 기회를 준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눅 17:3-4).

바울이 베드로보다 훨씬 늦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받을 일이 있으므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나니”(갈 2:11) 베드로는 분명히 바울보다 신앙 선배였고, 12사도를 대표하였다. 예루살렘의 사도교회의 목회자였다. 그러나 복음에 합당치 않아 책망받을 일이 있자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 된”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였다. 아무리 탁월한 지식과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의 믿음이 없으면 zero로 여기는 교회라야 한다. 요일 5:4이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아멘.

요즘 청년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지만, 2050년의 광풍(狂風)을 두려워한다. 공포이고 짜증도 나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잔잔한 호수에서 유람하는 뱃놀이 인생이 아니다. 지구의 도시들이 침수하게 된다. 그 침수가 시시각각 다가온다. 바울은 증언하였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저와 여러분도 바울처럼 끝까지 믿음의 길을 가 영생복락에 이르고 예비된 면류관을 받길 축복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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