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28일 설교
“교회를 돌보는 자!” (딤전 3:1-7 ‘신령한 일꾼’ 22.8.28)
이기선 목사님은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를 극렬히 반대하다가 감옥에 갇혔는데, 하루는 경찰국장이 자기 방으로 부르더란다. 경찰국장은 일어나서 이 목사님을 맞이하였다. “이 목사님, 연세도 많으신 분을 이렇게 고생시켜드려서 죄송합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더니 편안한 의자에 앉게 하고, 차도 한 잔 대접했다. 그러고 경찰국장이 편지를 한 통 주었다. 그 편지는 미국 유학하여 공학박사가 된 큰아들이 보낸 편지였다. 이 목사님은 편지를 다 읽어보고 굳은 표정으로 다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내용은 이러했다. ‘다른 목사님들은 신사참배를 하고 편안히 목회하는데 아버지만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고생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겉으로만 신사참배를 하고 속마음으로는 안 하면 되지 않습니까?’ 경찰국장이 물었다. “아드님 편지를 보셨으니 어떤 생각입니까?” 이 목사는 이렇게 대답했단다. “세상 지식으로는 나는 평범하지만, 아들은 미국이 인정하는 공학박사이니 지식으로는 내 선생격입니다. 그러므로 사제관계상 그 청을 들어주는 게 옳을 것이고, 또 부자간에 생각해도 아들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은 옳습니다. 하지만 신앙적으로 보면 내 아들은 평교인이고 나는 평교인을 지도하는 목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신사참배는 신앙고백의 문제인데, 평교인인 아들은 아버지가 고생하는 게 안타까워서 철없이 한 말이니 그냥 듣고 말 일입니다.” 그러자 경찰국장이 혼자 말처럼 말했단다. “과연, 이 목사님은 정확하십니다. 목사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지!” 일본 경찰국장이 이 목사님을 진심으로 존중한 말이었다. 비록 믿음 때문에 핍박을 당하지만 믿음의 정절을 지키고 일신의 평안을 위하여 타협을 거절할 때 적들도 존중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오늘 설교 본문도 교회의 ‘감독’에 대하여 15가지 자격을 말씀해 놓았는데, “감독”(επισκοπης 에피스코페스 overseer, inspect, heedful 영혼을 인격적으로 잘 성숙하도록 교회를 주도면밀하게 돌보며, 가르치고, 관리하는 일꾼. 오늘날 목사님과 장로님의 교회 섬김을 합한 일꾼). 그런데 바울은 설교 본문을 이렇게 시작하였다.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공동번역은 좀 더 쉽게 번역하였다(“교회의 감독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훌륭한 직분을 바라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사실입니다.) 또 NLT 영어성경은 이렇게 번역해 놓았다(if someone wants to be an elder, he desires an honorable responsibility. ‘어떤 사람이 장로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 사람은 명예로운 책임을 갈망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디모데전서를 기록할 그 당시는 우리의 처지와 너무나 달랐다. 그 당시에 감독이 되는 일은 핍박과 매 맞음, 투옥, 순교를 각오하였다. 그토록 힘든 위험을 무릅쓰고 목사 장로직을 감당한다니 책임의식이 얼마나 막강한가! 그래서 선하고 값지다는 것이다(“미쁘다” πιστος 피스토스 ‘믿음이 행위로 있는 것’ ‘진실하다’ = 창 1:31). 많은 교인이 다 힘들다고, 위험하다고 회피하는데 그래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겠다고 감독직을 사모한다니 얼마나 기특하고 ‘행함의 신앙이냐!’는 것이다. 이런 의미를 되새겨 볼 때, 목사 장로의 직은 한 계급 상승하여 교인을 지휘 감독함이 아니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교인들 대표로 희생 제물에 동참하겠다는 십자가 직분이다. 만일 이런 마음가짐이 없이 교인의 대표행세만 한다면 근본적으로 빗나간 ‘출세 장로’인 셈이다. 따라서 “선한 일을 사모하는 목사 장로”는 지식보다 중요한 것이 인격이요, 인격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신앙으로 인식한다. 신앙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신의 인생 최대의 보화로 여긴다.
요즈음 우리나라는 장관마다 엄격한 청문회를 거쳐서 장관의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 장관들이 장관답지 못한 모습을 너무 자주 보여주고 있어서 지도자 부재를 탄식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장관들은 대부분 대통령이 선발한다. 그런데 각 장관의 전문성은 수준급이지만 인격의 자질은 한심할 정도임이 드러나곤 하는 게 현실이다. 그 이유는 뭘까? 대통령은 한 인간의 전문성을 얼른 파악해 내는데, 내면의 인품은 좀처럼 점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교회도 마찬가지이지요.
세계의 대형교회 50개 중에 절반이 대한민국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세계에 내어놓는 교회 지도자나 기독교적 사상가는 흉년이다. 안타깝게도 기독교인이 인구의 0.3%에 불과한 일본에게 여러 면에서 뒤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교인은 많지만 신행일치한 그리스도인은 드물다. 대부분 예배당에 모이는 교인들이고, 예배당 밖에서 활동하는 성도는 별로 없다. 박사님은 수없이 많은데 세계가 알아주는 신학자는 흉작이다. 전 세계가 번역하는 우리나라의 책은 별로 없다. 이것은 우리가 지식암기 신앙에 머무르지 스스로 창작하여 적용하는 신앙 삶은 손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훌륭한 목사님 장로님이 빈약한 교회를 예방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바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보자. 아멘.
1) 책망(2)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이것은 완벽한 신앙생활보다 비난받을 일을 물리치는 윤리생활을 말한다. 그래서 “한 아내의 남편” “절제” “신중” “단정” “나그네 대접” “가르치기” 등등에서 비난받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려면 마음이 네모반듯하여 건전하고 사람을 사랑하면 된다. 교우들이 하나님이 말씀을 올바로 인식하고 올곧게 실행하도록 잘 가르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잘 가르치다’(διδακτικον 디닥티콘 qualified to teach. = 지각을 사용할 수 있게 가르치는 것이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 5:14)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20). 말씀의 원리가 삶에 잘 녹아져서 이웃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다. 말로만 가르친다면 고학력자들이 잘하겠지요.
우리나라는 ‘목사님’보다 ‘박사님’칭호를 더 좋아하는 목회자들이 상당히 많다. 그래서 미국의 반 가짜 박사 학위의 단골 고객이 우리나라 목사님들이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려져 있다. 故 옥한음 목사님은 조기 은퇴 직전에 공 예배 때 ‘잘못 설교했습니다!’라고 용감하게 회개기도를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의 입맛에 맞게 변질시켰다고 고백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죄가 어떤 독을 가졌는지, 지옥이 얼마나 험악한 곳인지 제대로 가르쳐서 영혼을 구원하고 양육하는 일에 소홀했다고 시인했지요. 우리가 함께 예배드리지만 심판대에서 “불법 신앙생활을 행한 자”라고 판명된다면 얼마나 기가 막히고 억울하겠는가! 그래서 책망할 게 없는 선한 목자를 만나 따르라는 것이다. 아멘.
2) 아니(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술만 안 먹으면 괜찮다’가 아니다. 욕심 그것 때문에 다투지 않을 정도라야 감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돈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돈 없이 살아가라는 게 아니다. 돈에 의해 좌우되면 무질서해지고 하나님의 일도 돈 모으는 짓이 되어버린다. 세상의 지도자도 청렴한 청지기를 엄격히 요구한다. 왜냐하면, 사회를 건전하고 건강하게 발전시켜가기 때문이다. 교회는 더한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히 13:17) 교회의 감독은 청산할 수 있을 만큼 양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멘.
하나님은 다윗을 두고 “이는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 13:22)라고 하셨다. 오늘날 교회에 이만큼 요긴해지는 말씀도 드물다. 물론 다윗이 전혀 흠 없는 지도자라서 칭찬받는 게 아니었다. 그는 도의적으로 나쁜 놈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목숨 바쳐 충성하는 부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성폭행했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그의 남편을 전사시키는 간접 살인까지 했던 흉악범이었다. 하지만 다윗은 남다르게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시인했고 그 죄를 회개하며 철저히 돌아섰다. 다윗을 하나님이 흡족해하였다면 범죄보다 범죄의 흠을 시인하는 데 다윗이 용감했고 회개하는 데 철저했던 점이리라. 다윗은 애써 변명하여 자기 죄를 합리화하지 않았다. 죄를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왕권으로 죄를 무마시키지 않았다. 솔직하고 담대하게 회개하고 새로워졌다. 회개에 익숙하길 축복한다.
3) 외인(7)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 감독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엿새 동안, 불신자들)에게 어떠한 평판을 받고 있는지 이것도 중요하다. 교회에서도 인정, 일터에서도 인정, 가정에서도 인정받는 사람이 감독으로 적합하다. 결국 인격적인 모범을 갖추라는 것이다. 성경 지식이 좀 부족해도 고품격 인격을 갖춘 교우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는 다소 더딜지라도 이웃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 반대로 신앙의 연륜이 오래되었을지라도 인품이 낮은 교인은 이웃들을 실족시킨다. 흔히 교회에서 존경받는 그리스도인들은 일터에서 ‘예수쟁이’로 왕따를 당하기 쉽다. 그러나 교회의 감독자들은 예수쟁이 상황에서도 슬기롭게 대처하여 존중받게 하라는 것이다. 세상에 물들지 않되 일터에서 필요한 요원이 되는 것이다(“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7 바울도 해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고전 9:20-22). 결국에는 칭찬! 인심을 잃지 않는 것!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외우므로 끝내지 말고 적재적소에서 해내는 것이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를 들은 성도답게 우리의 남은 신앙생애를 수정해보자.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헌금하는 식으로 감독하는 일이 한국교회에 전혀 없다? 있다? 많아졌다! 그러니 교회의 감독을 세우는 일은 예배당의 기둥을 세우는 일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래서 철저한 기준에 따라 세워야 한다. 그 기준은 모범 되는 인격과 사명 실력, 엿새 동안에도 행함으로 설교하고, 그러면서도 겸손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