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21일 설교

“구원의 뜻을 이루는 가정!”(딤전 2:8-15 ‘기도하는 동역자’ 22.8.21)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빈 항아리를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이 항아리를 돌로 가득 채우려면 돌덩이가 몇 개나 필요할까요?”라고 물었다. 잠시 후 교수님은 항아리 옆에 준비해둔 돌덩이들을 항아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물어봤다. “이 항아리는 꽉 찼나요?” “예”라고 학생들이 대답했다. 그러자 교수님은 준비해놓은 자갈들을 항아리에 넣고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이제 이 항아리는 가득 찼습니까?” 학생들은 “아니요”라고 대답하였다. 교수님은 다시 모래주머니를 꺼내 항아리에 쏟고 항아리를 흔들었다. 모래들은 자갈 틈을 채웠다. 그러고 또다시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물어봤다. “이제 우리는 이 항아리를 전부 채웠나요?” 학생들은 자신 있게 “아니지요!”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뭘 더 채우면 됩니까?” 한 학생이 대답하였다. “항아리에 물을 부어서 모래 사이의 공간을 더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교수님은 주전자에 담긴 물을 항아리에 가득 붓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제야 이 항아리를 전부 채웠네요. 그러면 함께 생각해보자. 이 ‘항아리 채우기’의 실험이 보여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한 학생이 대답하였다. “항아리 채우기를 분명히 다 끝냈다고 생각했을 때, 생각하는 관점을 조금 달리 바꾸면 항아리는 아직도 채울 공간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학생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바로 그때 교수님이 그날 실험한 의도를 이렇게 밝혔다고 한다. “비어있는 공간은 꼭꼭 숨겨져 있어서 애써 찾아봐야 한다. 우리가 흔히 경험하곤 했잖아. 그런데 오늘 항아리실험으로 내가 너희와 공감하려는 교훈은 따로 있다. 내가 이 항아리에 각각 똑같은 양을 물부터 모래, 자갈, 큰 돌 순으로 넣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중요한 일부터 우선순위를 따라 처리할 때 내용과 작업량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땀 흘려 일해도 우선순위를 잘못 정하면 정말 막중한 일을 엉터리로 처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오늘의 설교 본문을 통해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믿음 사역의 우선순위에 잘 맞고‘질서 있는 기도생활’을 알려주고 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하는 디모데 목사님에게 세상의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교회가 되려면 말씀과 함께 기도하라고 강권하였다(1:3,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18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2: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이렇게 말씀과 기도에 집중할 때 어떤 태도로 기도하는 게 바람직한지 그것을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서 알려주고 있다(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우선 8절은 “그러므로”라는 단어로 시작하여 앞 문장의 내용을 이어서 남녀가 모두 기도해야 함을 강권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디모데서가 전체적으로 복음수호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고, 또 디모데전서 2장은 기도에 대한 권면이란 정보를 알고 설교 본문을 읽어야 한다. 그것은 세상풍조와 다른 교훈이 끊임없이 교회로 파고들어서 복음을 변질시켰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교회가 ‘복음!’이라고 수없이 외치고 있지만 ‘그 복음’에 진정으로 정통하지 못하므로, 그래서 빗나간 ‘다른 복음’에 속아 넘어가고 있다.

호주 시드니의 조지가 거리(The George Street Evangelist)에서 오가는 행인들에게 40년간 전도한 프랭크 아서 제너(Frank Arthur Jenner)는 방탕한 젊은 시절을 보내다가 주님을 영접한 후에 40년간 매일 새벽이면 기도하고 길거리 전도를 하였다고 한다. 그는 길거리에서 항상 두 마디의 질문을 반복했는데,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Are you saved?)” “만일 당신이 오늘 밤 죽는다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If you died tonight, Are you going to heaven?)” 그런데 그는 많이 늙고 쇠약해져서 길거리 전도를 중단할 처지가 되었다. 자신의 기나긴 전도자의 삶을 돌아보며 열매를 생각해보았더니 부질없는 일이었다고 스스로 서글퍼했단다. 이제 임종을 준비하고 있는데 한 목사님이 그를 찾아와 뜻밖에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 목사님은 세계 곳곳을 다니며 전도 집회를 하였는데, 시드니 조지가 거리에서 한 전도자의 질문을 듣고 그냥 지나쳤지만 끝내 교회를 찾아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람들을 세계 여러 곳에서 만났다는 소식이었다. 길거리 전도자 제너는 복음에 정통하였으나 그의 전도 열매는 자신도 모르는 곳에서 수없이 맺어가고 있었다. 복음생활이 살아 있어서 하나님 앞에는 전도 열매가 자꾸 맺어지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를 축복한다. 아멘.

자 그러면 말씀과 기도로 영혼이 강건하게 생동하는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면 가능해지는지, 이 답을 찾기 위해 저랑 같이 설교 본문을 세밀하게 살펴보자. 아멘.

1) 거룩한 손(8)

남자의 올바른 기도준비는 남자들끼리 분노와 다툼을 없애는 것이라고 바울이 디모데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것은 주님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막 11:25에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협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요일 4:20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이러한 말씀을 볼 때 우리의 기도응답은 화목생활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남자들이<τους ανδρας 투스 안드라스 the men> 분노와 다툼이 없이”). 실제로 바울 자신도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 실라와 함께 한 팀을 이루고 한밤중에 기도와 찬송을 하였더니 옥문이 열리는 기적 응답을 체험하였다. 어려운 시련 환경을 당했을 때 남자들은 합심 기도하여 기적 응답을 체험할 기회를 만난 셈이다. 이것은 비밀한 기도 응답 원리이다(“각처에서”<εν παντι τοπω 엔 판티 토포 everywhere 어디서나! 어느 교회든지!>). 그래서 바울은 아들 디모데 목사에게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라고 강권한 것이다.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는 것은 기도하는 마음가짐을 하나님께 잘 맞춘다는 표현이다(‘손’은 행위를 상징한다. 따라서 “거룩한 손”은 올바른 행위, 경건한 행위, 그래서 구별할 수 있는 행위를 가리킨다. 피 묻은 손이나 도둑질한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은 ‘억지기도’이다. 성결한 삶과 조화되는 기도를 드리라는 것이지요.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출 17:11>라고 했다. 모세는 기도문장을 잘 만든 게 아니라, 아론과 훌과 여호수아와 ‘함께’를 이루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시인하고 항복하여 모두 맡긴다는 마음가짐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시간이었음!). 우리 교회도 협력 공동체를 이루고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하는 신앙생활에 이르기를 축복한다. 아멘.

2) 단장(9)

사도 바울은 여자들에게 꾸미고 기도하게 가르치라고 디모데에게 강권하였다(“단장하고” κοσμειν 코스메인 decorate, arrange. 계 21:2에 “신부<교회>가 남편<주님>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단 단정한 옷으로 꾸며서 소박함과 “정절”을 갖추고 기도하라는 것(σωφροσυνης 소프로쉬네스 마음이 건전, 건강, 순결함) 10절에 “선행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함을 나타내는 꾸밈”이라고 했다. 이것은 중요한 가르침이다. 꾸며서 믿음의 아름다움을 이루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속 내용을 알차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 낭비나 사치, 허영의 개념이 아니다. 세상 풍조에 맛 들인 여자들은 땋은 머리나 금, 진주, 값진 옷으로 꾸민다. 땋은 머리는(πλεγμασιν 플레그마신 ‘왕관’ ‘화관’ 그때 매춘부들이 머리 장식을 화려하게 함. 돈도 많이 들었음. 또 여자가 화려한 복장으로 돋보이는 곳은 무도회 파티임. 아가서 6:7에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부끄러움을 알고 얼굴 붉히는 어여쁜 신부를 존중하는 말). 그리스도인은 종종 시대를 거스르면서 소신껏 살 줄 알아야 한다. 기독교가 중요시 하는 것은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이다(“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롬 2:28-29). 아멘.

3) 순종(11)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사도 바울은 ‘여자는 조용히 배우기만 하고 가르치면 안 된다’라고 강권했는가? 그래서 보수교단은 여자 목사 장로를 거절하는 게 성경적이라고 항변한다. 극단적인 여성신학자들은 하나님을 남성으로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신약성경을 절반을 기록한 바울이 남자이기 때문에, 여성의 비하가 이뤄졌다고 기독교를 비난한다. 이러니까 성경은 해당한 말씀의 정황에 맞게 올바로 해석하여 우리에게 적용하는 책이라는 것이다. 성경 전체를 보자. 사사기 4장에서 여자 사사 드보라도 있고, 유다 왕 요시아 시대에 유명한 여선지자 훌다(왕하 22:15-17, 대하 34:22-25), 예수님 탄생 때 여선지자 안나, 또 브리스길라는 당대의 명설교자였던 아볼로를 데려다가 집에서 잘 가르쳤다.

바울은 여자가 교회에서 조용해야 하는 이유로 하나님의 창조질서라고 했다. 하나님이 먼저 남자를 창조하셨고 여자는 돕는 배필로 창조하셨기에 이 창조의 뜻을 교회는 따라야 한다는 것과 또 바울은 남자가 속은 게 아니라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바울은 범죄의 책임이 오히려 아담에 있다고 밝혔다(롬 5:12, 14).

본문 14절에 아담<ηπατηθη 에파테쎄 수동태> 하와<εξαπατηθεισα 엑싸파테쎄이사 γεγονεν 능동완료형 온전히 스스로 속음>). 범죄 당시에 지도력을 아담이 발휘하지 않고 하와가 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의도에 빗나가 범죄했다는 것이다. 아담이 해야 할 사명을 여자가 했고 하와는 하라는 돕는 배필 사명은 하지 않았다. 하와는 에덴을 맡은 아담이 그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돕는 배필의 사명을 잘했어야 했다. 그래서 하와는 월권행위요 아담은 직무유기한 거다. “돕는 배필”(עֵזֶר כְּנֶגְדֹּו 에제르 케네그또 ‘마주하는, 걸맞는, 대등한’ + ‘돕는 자, 원조자’ 협조 완성맞춤! 그러나 해산수고!)

자 이제 오늘 설교를 정리하자. 교회는 여자와 남자로 구성된다. 현실적으로 여자가 더 많다. 우월한 점은 남성도 많고 여성도 많다. 따라서 서로 다투며 지배하려는 것은 대단히 잘못됨이다. 여자는 남자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그 사명과 역할은 다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남자를 여자의 머리로 하셨으니까 남자가 다스린다.’라는 태도는 성경을 잘못 이해한 탓이다. 남녀평등이니 남성과 여성은 서로 협력해서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어가야 할 기도동역자로서 동반자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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