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31일 설교
“넘치는 풍성!”(딤전 1:12-17 ‘충실한 믿음생활’ 22.7.31)
‘동일한 일이라도 내가 하면 괜찮고 남이 하면 나쁘다’라고 하는 이중잣대를 두고 ‘내로남불’(1996년 박희태 국회의원이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을 4자로 줄임말)이라 했고, 우리나라의 교수님들은 2020년 말에 신조어로 ‘아시타비’(我是他非我 나 아, 옳을 시, 다를 타, 아닐 비)라고 하였다. 실제로 ‘아시타비’는 이런 것이다. 시골에 사는 한 여인이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딸 남매를 곱게 키워 같은 해 봄가을에 장가 시집을 보냈는데, 해가 바뀌자 봄에 딸이 애를 가졌다고 해서 밑반찬을 준비하여 딸네 집에 갔더니 사위가 방 청소를 하고, 아침상을 차르며, 앞치마를 두르고 설거지도 하는데, 딸은 엄마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친정어머니는 ‘암! 내 딸이 시집을 잘 갔구먼. 내가 딸을 어떻게 키웠는데 저렇게 배려를 잘하는 착한 남편이어야 해.’ 이런 생각에 무척 기분 좋게 며칠을 보냈단다. 그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깐 아들네 집도 들려봤단다. 그런데 아들도 역시 앞치마를 두르고 아침상을 차리더란다. 그날 아침 어머니는 속상해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끝냈다. 내 금쪽같은 아들이 저 며느리 년에게 밥상을 차려 받친다고 생각하니 속이 뒤집혔던 것이지요.
사위나 아들이나 같은 정황인데 왜 장모일 때는 좋아하고 어머니일 때는 괴로워하였을까? 사위가 아내를 섬기는 것을 당연해하면서도, 아들이 아내를 위해 수고하는 것을 배 아파한다면, 사위도 그 집안의 귀한 아들이고 아들 역시 사돈의 입장에서 보면 사위인데... 그러니 엄연한 편견이요 극심한 이기주의이다. 똑같은 처지에서 사위는 배려하여야 옳고, 아들이 배려하면 비난받아야 한다는 이러한 이중 잣대의 사회를 아시타비(我是他非)라고 교수님들이 비판하였다는 것이다.
오늘 설교 본문도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극심한 이기주의에 의한 편견의 횡포들을 실토해 놓았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3) 바울이 자신의 과거를 현재와 비교하며 밝힌 것이다.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명자로 살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돋보이고 아름다운 변화이다. 행 26:11에 보면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강제로 신성모독죄(神性冒瀆罪)를 짓도록 했다는 것이다. 또 박해자(διωκτην 디옥텐 사냥꾼이 사냥감을 잡으려고 최단거리로 쫓아감<διωκω 디오코의 명사형>라고 했는데, 바울은 이 땅에서 교회를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다메섹 성으로 가면서 그 중간에 여러 성에 들려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여 계속 수색하고 온갖 폭행을 했다는 것>. 행 22:4에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또 행 9:26에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이 정도였다!
성도 여러분, 생각해보자. 우리도 예수님을 몰랐을 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로 살아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새 사람으로 변화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예수님의 은혜!’라고 하며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를 새 가치관으로 바꿔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잘 활용하기를 축복한다. 아멘.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현재와 비교하여 엄청 변화됨을 밝혔는데, 디모데 전서를 기록할 당시 바울은 생애의 마지막 때였다. 그는 사울 시절의 자신과 현재 자신의 모습을 동시에 보면서 믿음의 진보를 점검하였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사명 생활에 막중한 비중을 두어야 올바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쓸데없이 남과 비교하고 자기 우월감에 우쭐한다. 그런데 우월감에서 교만이 시작되는 법이다. ‘내가 받은 축복이나 은사는 너와 달라, 너보다 많아, 더 높아...’ 이러한 우월의식은 믿음의 진보와 신앙인격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러한 비교 버릇은 바리새인 짓이다. 반대로 잘 순종하다가도 옆 교인과 비교하는 순간 속상해 열등감에 빠진다. 굳이 비교하려면 바울처럼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것이다. 내가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고 지금은 얼마나 변화하였는지 점검해보고 고쳐가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종종 자기성찰을 하는 것은 누구나 필요하고 중요하다. 주님을 만나 지금까지 교회를 다니며 믿음 생활을 하는 동안 과연 ‘무슨 변화를 얼마나’에 중점을 두는지? 지금 나 자신은 어떠한 믿음의 사람인지 당당하게 밝히면 그게 하나님께 영광됨이어야 한다. 바울은 ‘비방자요 박해자, 폭행자, 죄인 중의 괴수’였지만 예수님을 믿은 후에 위대한 전도자요 목회자이며 성경기록자로 변신하였다.
자 그러면 우리도 바울처럼 내용이 아름답게 변화해감으로 하나님께 영광되는 그런 신앙의 일생을 살아가려면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는지 설교 본문을 통하여 그 답을 함께 찾아보자. 아멘.
1) 직분(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기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이것은 바울의 직분인식이다. 바울은 직분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바라봤다. 그 이유는 세 가지였는데,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충성되이 여겨” “맡기심”이다. 이것을 모두 하나님께서 직접 주셨다는 고백이다.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자격 없는 죄인이었는지 실토했지요. 그런데도 예수님의 관점은 달랐다. 흉악하고 한심한 죄인인데도 충성되이 여기셨고, 직분을 맡기셨으며, 능력을 주셨다(ενδυναμοω 엔뒤나모오 to empower “our Lord who has enabled me,” -NKJV-).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을 바울은 평생 잊지 않고 살았고, 그는 직분 때문에 생기는 고충을 불평하지 않았으며, 직분을 남용하지도 게으름도 거드름도 피우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게 판단하고 선택하며 헌신했다. 바울이 하나님께 받은 직분이 무엇이었나요? 디모데후서 1장 11절에 밝혀 놓았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 직분들은 모두 성경을 전하고 해석하는 설교자, 양육하는 목회자를 말한다. 바울은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해 충성하였다.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딤후 3:13).
알고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직분을 주셨다.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교사님, 주방봉사자님 등등이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러니 의미 있고 소중한 직분이다. 우리가 갖춘 자격이나 조건은 형편없이 부족하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충성되이 여기셨고, 우리를 능하게 하신 것이다. 저와 여러분도 바울처럼 마땅히 직분에 대한 감사와 신실한 섬김으로 충성하길 축복한다. 아멘.
2) 예수 안(15)
“넘치도록 풍성하였다”(ὑπερεπλεονασεν, ὑπερπλεοναζω 휘페르플레오나조 ὑπερ + πλεοναζω
가득 차서 위로 넘쳐흐르는 것! 헬라어 성경은 문장을 시작하는 첫 단어로 강조하고 있음). 그렇다면 흘러넘치는 게 무엇인가? 세 가지인데, 은혜와 믿음과 사랑이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 “예수 안에”이다. “예수님 안”이라는 말씀은 관계유지를 의미한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요 14:10-12)
핵심은 이것이다. 요한복음 6:60-61이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이 말씀의 정황은 이렇다. 예수님께서 영생을 얻으려면 참된 양식과 음료를 먹어야 하는데, 그 양식과 음료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한다.”라고 가르치셨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어렵도다” 그러면서 떠나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렵도다”는 바로 제자들의 “걸림”이었다. 실제로 제자들이 ‘들은 말씀을 생활하려니 어렵다’라고 판단하고 떠나버렸다. 듣는 것은 괜찮은데 생활로 순종까지 하라고 하니 그렇게는 못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한다”에 실패한 것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눅 5:5-6). 우리는 듣고 쓰고 암기보다 베드로처럼 생활에 익숙하길 축복한다. 아멘.
3) 본(16)
“본”(ὑποτυπωσις 휘포튀포시스 ὑπο 휘포 ‘∼밑에’ + τυπος 튀포스 ‘자국’ 어떤 형상의 자국을 그대로 이어받는 것을 가리키는데, 바울에게 이루어진 일이 그 후에도 같은 모양으로 계속된다는 것이다. “an example” -NIV, RSV, GN- “pattern” -NKJV- 세상에서 제일 가는 죄인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다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할 죄인은 아무도 없다는 본보기이고, 확신과 소망을 주는 산 증거이다. 딤전1:7의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 도다.”와 엄청난 정반대이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딤후 3:14)라고 증언하였다. 우리는 과거의 부끄러운 잘못 때문에 자포자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누구나 완전히 새사람이 되고 고귀한 일꾼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자 이제 오늘 설교 말씀이 가리키는 신호등을 확인하여 보자. 우리는 오늘 설교 중에 바울에게서 신앙적인 DNA를 보았다. 그리고 그 신앙적인 DNA를 복음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전수하고 있는 것도 목격하였다. 바울은 특히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밝혔다. 이것은 “죄인 중에 괴수”를 살리고 변화시키신 예수님에 대한 바울의 영혼에서 터져 나오는 감격이었고,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사건이라는 정직한 신앙고백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자기 죄를 씻었음을 날마다 실감함으로 끊임없이 복음의 감격이 살아 있기에 예수님만 진정한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게 하였다.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의 십자가 화목제물이 자신에게 항상 살아 있어서 영향을 주는 신앙생활이기를 축복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