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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17일 설교

“아들 목사에게!” (딤전 1:1-2 ‘디모데 전서의 머릿말’ 22.7.17)

영국연방 국가인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은 면적 389㎢(한반도 17배)인데, 카리브해 원드워드 제도에 세인트빈센트 섬과 다른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인구는 11만 명 정도란다. 그런데 1902년 세인트빈센트 섬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무려 1600명이나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리고 1980년 5월 18일 평화로운 주일 아침 8시 32분에 미국의 워싱턴주에 있는 세인트 헬렌 산에서 화산이 폭발하였다. 많은 사람이 화산폭발의 분출연기를 생생하게 목격하였단다. 그날 분출한 화산의 에너지는 TNT 4억 톤과 맞먹는 위력이었고,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 2만 개에 해당할 만큼 어마어마했단다. 산은 모양새가 일본의 후지산처럼 예쁘다고 ‘미국의 후지’라고 불렀는데 화산폭발로 높이 3000m였던 산이 400m가량 함몰되었다. 고속도로 3000km와 철도 25km가 한꺼번에 유실되었다. 그런데도 인명피해는 57명이 사망했다. 이 57명은 세인트빈센트의 화산폭발 때(1902) 1600명에 비하면 깜짝 놀랄 정도로 적었다. 그 이유는 미국 지질조사소가 계속 화산을 관찰해왔고 화산폭발 3달 전부터 지진 활동을 시민에게 알리며 화산폭발을 경고하여 대피하게 도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구조현장에서 생존자를 단 한 사람이라도 더 구출하려고 헬리콥터로 산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단다. 그럴지라도 그 부근의 스피릿 호수 주변에 아름다운 산장의 주인 해리 트루만은 “그 산장이 자기 인생”이라 하면서 대피를 거절하고 버티다가 끝내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 두 화산폭발에서 우리는 정보를 미리 알고 올바로 활용하는 게 얼마나 지혜로운 삶인지 생생한 교훈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설교 본문도 디모데전서의 머리말인데도 대단히 중요한 목회 정보를 애써 훈수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인생 말년에 로마에서 죄수의 몸으로 있으면서 에베소 교회의 담임목사 디모데에게 보낸 서한인데,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목사는 무엇을 위해, 어떤 태도로 순종해야 주님께 충성이 되는지 그 목회 원리와 교회의 조직, 양육지도, 중요한 교훈들 그리고 목회의 도전과 격려 등등을 바울이 알뜰하게 기록해 놓았다. 그래서 디모데전서는 디모데후서와 디도서와 함께 목회서신으로 분류한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은 두 번째 전도 여행을 할 때 소아시아의 루스드라에 들렸는데, 거기서 청년 디모데를 만나, 함께 전도 여행을 떠났고(16:3), 디모데를 전도자로 양육시켰다. 그러면서 바울은 디모데를 몇몇 교회로 보내 목회하게 하여 바울 자신의 동역자로 삼았다. 그러한 디모데의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지만 어머니는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이었다(16:1).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바울이 감옥에서 최후를 맞이할 때도 바울 자신의 곁으로 불렀던 충실한 동역자가 디모데였는데, 그는 비록 젊은 나이에도(딤전 4:12) 지역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행 16:2). 이런 점을 볼 때 목회자는 좀 어린 나이라도 괜찮다. 신학교 출신 집사님이 출석하는 교회에 새로 목사님이 부임해 갔더니, 그 집사님이 첫 대면인사를 이렇게 하더란다. “아이구, 내 후배 목사가 왔네. 내가 어떻게 해야 좋겠노?” 목사님이 정중히 대답해드렸단다. “집사님은 신학교를 졸업한 선배님이 맞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집사님이시고 나는 목사님이시니 ‘집사님과 목사님 관계’를 잘합시다.” ‘사람을 잘 만나는 것’은 큰 복이다. 부자관계나 부부관계, 사제관계, 친구관계 다 마찬가지인데, 목사님이 좋은 성도를 만나고, 성도가 좋은 목사님을 만나는 것은 큰 행복이다. 이런 만남이 잘못되면 금 간 항아리처럼 인생을 힘없이 살아가게 된다.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그 현장을 바울이 총감독하였음을 보여준다. 7장 58절이다.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 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옛 유대인 사회에서 사람을 죽일 때 두세 사람의 증인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 증인들이 겉옷을 벗어서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기 전에 바울의 발 앞에 갖다 두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스데반을 죽일 때 그 현장을 지휘 감독했던 자가 바로 바울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러고 바울은 뿔뿔이 피신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갔는데, 그 길에서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바울을 둘러 비추었다. 그는 땅에 엎드려졌고 선명한 음성을 들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울은 십자가에 처형당해 끝났다고 생각하였던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찾아오셨으니 천지개벽이나 다름없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전하는 복음이 거짓 날조라고 단정했으나 진실이었고, 스데반이 죽어갈 때 자신에게 돌을 던져 죽이는 원수들을 위하여 천사의 얼굴로 용서 기도를 드린 모습도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바울은 이제까지 율법주의자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혈통과 전통, 학벌과 지식을 앞세우며 자신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부하고 살아왔는데, 부활하신 주님 앞에 꼬꾸라져서 보니 죄인 중의 괴수였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바울은 지난 세월 동안 빗나간 성경 지식에 속아 착각한 고집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틀린 것을 위하여 틀린 신앙 삶을 자신만만하게 살아왔던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 목사님에게 올바른 신앙 삶을 위한 맞춤 목회를 요약해주었다. 아멘.

자 그러면 올바른 신앙 삶을 위한 맞춤 목회의 첫걸음과 그 핵심은 무엇인지 바울의 설명을 들어보자.

1) 사도(1)

디모데전서의 서한을 보내는 사람을 이렇게 길게 기록해 놓았다.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αποστολος 아포스톨로스 보내심을 받은 자, 심부름꾼, 배달부. 핵심은 ‘특별히 맡은 사명완수!’ 사도 ,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생애 전체를 사도의식으로 살았고, 그 사도의식이 성경의 바울이게 하였다. 바울은 복음전파를 잘하려고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으로 처신했고,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들과 어울리게 처신하며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했음). 그런데 바울이 사도의식의 뼈대로 삼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구주 하나님”과 “소망 예수”였다고 머리말에 밝혀 놓았다(“구주” σωτηρος 소테로스 구원자, 10가지 권능재앙으로 출애굽하셨던 구출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소망”<ελπιδος 엘피도스>은 16과 6:14에 친히 설명하여 놓았음.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example –NIV->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생각과 선택,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고 닮아가는 것이 소망임! 내 욕심실현이 아님.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재림심판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이 소망이라는 것이다. 소망과 욕심실현을 식별할 줄 알고 소망신앙 생활하기를 축복한다. 아멘.

2) 참 아들(2 2 Τιμοθέῳ γνησίῳ τέκνῳ ἐν πίστει 다 여격으로 디모데를 수식함)

”(γνησίῳ 그네시오 γινομαι 기노마이 create, bear, produce, occur, become. 생리적인 출생!)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었고, 친정어머니의 거짓 없는 믿음을 이어받아 아들 디모데에게 3대 믿음으로 계승해주었다. 하지만 디모데의 아버지가 헬라인이라서 유대의 선민전통으로 보면 사마리아인처럼 혼혈아 잡탕인지라 성골(금수저)은 어림도 없었다. 더구나 바울은 결혼도 하지 않았으니 “참 아들”은 너무나 억지 주장 같았다. 그러나 바울의 논리는 전혀 달리 “믿음 안에서”(“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롬 3:25-2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고전 4:15- εγεννησα 에겐네사 γενναω give birth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γεννηθη 겐네쎄 수동 he is born of water and the Spirit –NIV->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5)였다. 그래서 바울과 디모데는 믿음 안에서 진실한 부자관계로 살았다. 그러니 복음! 복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믿음의 자식을 낳을 수 있다. 이런 성도가 어른이다. 아직 전도를 이루지 못했다면 노총각이요 노처녀인 셈이다. 이제라도 믿음의 자식을 많이 두길 축복한다. 아멘.

3) 부터(2)

사람은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선물하는 법이다. 사도 바울은 참 아들 목사 디모데에게 3가지를 축복했는데 그것은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었다. “은혜”(“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4, 17>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1:4>)

“긍휼”은 사람을 비참하게 여긴 나머지 사랑이 움직이는 것이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11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시 40:2, 11) 예수님의 말씀으로 하면 “불쌍히”이다. ‘저 사람 그대로 살다가 죽으면 지옥 가는데... 안 돼!’ 이게 긍휼이다. 그러기에 긍휼이 있는 성도는 기도와 만남을 반복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예수님께서 다 보시고 알아서 넉넉하게 긍휼로 갚아주신다는 말씀이다.

“평강”은(שָׁלֹוָם 샬롬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모든 능력과 한계를 초월한 내적 질서’ 즉 평안, 온전함, 건강, 건전, 번창...). 바울은 평강 뿐만 아니라 은혜도 긍휼도 다 하나님의 것으로 축복하였다. original이라는 것이지요. 아멘.

디모데는 사도 바울을 만나 제자요 충실한 동역자로서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 되어 바울에게 사랑받는 신실한 목사로 충성하였다. 그래서 바울이 임종할 때쯤에 곁에 두고 싶어서 찾았던 성숙한 신앙 인격자였다. 저와 여러분도 디모데의 믿음생활에 도전해보기를 축복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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