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10일 설교

“무슨 흔적인가?”(갈 6:17-18 ‘예수님의 증인’ 22.7.10)

배우 윤여정 씨가 작년에 영화 ‘미나리’로 아시아의 배우로는 두 번째로 미국의 오스카 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아 대단한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지요. 영화 ‘미나리’는 1980년대에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고 미국이민을 떠났던 이민 1세대의 고달팠던 애환을 영화로 만들었는데, 미국의 남부 아칸소주의 한적한 시골에서 농장을 이루는 이야기였다. 영화 중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미나리는 물가에만 심으면 잘 자란단다.” 미나리는 강인하고 끈질긴 생명력과 적응력으로 웬만하면 잘 자라는 것처럼 한국인들이 어떠한 고난도 적응하여 단단히 뿌리내리는 과정을 보여주려는 영화였다.

그런데 영화 중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아버지는 우물을 둥그렇게 파고 있었고, 5살쯤 되는 아들이 옆에서 아버지를 지켜보고 있는데, 아버지가 웅덩이를 1m 정도 파 내려가니까 물이 나왔다. 그러자 아버지가 주먹을 쥐고 팔에 힘을 주면서 “와!” 하고 함성을 질렀다. 그때 아들도 아빠를 따라서 더 크게 “와!” 하고 비명을 질렀다. 저도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왜냐하면, 한국인 이민 1세대들은 낯선 환경과 문화, 언어, 인종차별에 시달려 수없이 인권의 사각지대로 몰렸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권리도 짓밟혀서 심리적으로나 금전적으로 고충은 무너지는 하늘 같았을 텐데... 그런데도 주체적인 삶을 살아보겠고 한국식으로 우물을 파는 모습에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공감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다고 성경 로마서 1장 19절에 기록되어있다(“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φανερον εστιν 판네론 에스틴 manifest, is... θεος γαρ αυτοις εφανερωσεν 쎄오스 가르 아우토이스 에판네로쎈 “because God has made it plain to them.” -NIV-).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에게 이렇게 증언하였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17)

흔적’(στιγματα 스티그마타 στιγμα의 복수. 바울의 몸에 십자가 흔적이 많다는 것. 자기 소유의 표시로 양이나 노예에게 찍어놓은 불도장(烙印 지질 락, 그래서 평생 주인과 주종관계인 것을 확실하게 밝혀주는 근거였음). 바울은 복음 증인으로 살아가는 데 따르는 고난을 거절하지 않은 진실한 사도로 꾸준하게 살아갔음을 입증해준다. 실제로 고후 11:23-27에 기록되어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이 약함 중에 강함을 체험한 흔적이요. 질 것을 이기도록 해 주신 흔적이었다. 하나님의 승리 ‘여호와 이레’였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입증해주는 흔적이었다. 그리스도인이 험악한 악조건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아슬아슬하게라도 주님을 따를 때 생기는 흔적이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의 흔적”이라고 증언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공중화장실에서 흔히 보는 글귀이다. “아름다운 사람은 떠난 자리도 아름답다.” 또 옛 우리 선조들은 “虎死留皮 人死留名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은 어떤 흔적들을 남기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아름다운 흔적인가? 아니면 더럽고 흉악한 흔적인가? 이웃들에게 기쁨과 소망을 주는 흔적인가? 아니면 남에게 고충과 낙심을 주는 흔적인가? 교회 안에서도 교우들에게 아픈 상처를 남겨주곤 하는 분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왼손이 모르게 봉사하고 헌신하는 분들도 많다.

고대 로마 시대는 칼이나 창으로 생긴 상처는 전투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영광의 상처로 여겼지만, 매질을 당하다 생긴 상처는 수치로 생각하였단다. 그래서 고대 로마 군인들은 상처가 앞부분에 있으면 명예로 여겼다. 국가를 위해 적과 맞서서 싸운 흔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몸 뒤에 있는 상처는 도망가다 다친 흔적으로 보기 때문에 치부로 여겼단다. 그렇다면 조금 부담되는 질문이지만 우리에게 있는 신앙생활의 상처는 몸 앞에 있는가? 아니면 몸 뒤에 있는가? 상처들이 대부분 몸 뒤에 있다면 탐심의 흔적이다. 어서 십자가 예수님부터 바라보는 게 정답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그 부끄러운 상처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대신 찔리시고 상하시다 죽으셨지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 이다 하시더라.”(눅 23:34) 그러니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어서 버려야 할 흔적이 있는가 하면 심판대까지 간직할 흔적도 생긴다는 것이다.

자 그러면 바울처럼 “예수의 흔적”이 생기는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설교 본문을 통해 바울에게 직접 들어보자.

1) 있노라(17 βασταζω)

βασταζω(바스타조 to lift, bear, carry) 지난주에 봤던 15절처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이 아니로되”(ουτε γαρ περιτομη τι εστιν ουτε ακροβυστια, αλλα καινη κτισις. ‘아니고 ~ 아니고’, ‘무엇이 있다’ = ‘없다’. 그렇다면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 있다는 것이다. 한국어 번역보다 훨씬 더 노골적으로 ‘없음’과 ‘있음’을 밝혀 놓았다. 할례를 받았든지, 받지 않았든지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증언한 것이다. “새로 지으심”은 고후 5:17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번역했다. 결국 ‘새로 거듭남’,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사신 것’, ‘그리스도의 것이 됨’, ‘하나님의 자녀 됨’, ‘천국의 상속자’... 이러한 실제를 보여주는 삶이 있다고!

교회를 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표지(標識 The Marks of the Church)는 다시 살아남을 표지하는 세례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감을 표지하는 성찬이다. 그래서 말씀 선포와 세례와 성찬 시행 그리고 권징 시행을 보고 교회를 알아보게 된다. 그렇다면 올바른 성도의 표식(表式)은 말씀선포를 듣고 신앙고백을 올바로 하고, 예배를 성실히 드리며,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신앙고백이나 예배는, 하는 사람들은 보이는데 그 자체는 보이지 않는다. 참된 예배나 말씀에 진실로 ‘아멘’하는 그 자체를 모두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보시는 믿음도 사람이 볼 수 없는 비밀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저와 여러분은 진리를 알고 행하는 성도이길 축복한다. 아멘.

2) 괴롭게(17)

“괴롭게 하지 말라.”(κοπους μοι μηδεις παρεχετω 코푸스<trouble, cut down, bewail> 모이 메데이스<no one>, 파레케토<to hold beside, present> 사도바울은 살을 베고 뼈를 꺾는 것처럼 쓰라린 괴롭힘을 당했음을 말해준다.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율법주의자들이 거짓 모함으로 바울이 전한 복음을 트집 잡고 또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게 해서 돌아서게 하였던 것들이다. 그래서 매우 강한 부정형으로 금지 명령을 하였다.

고후 11:28을 보면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라고 밝혀 놓았다. 구체적으로 영혼구원과 성실한 성경연구에 의한 설교, 그 설교의 순종, 정의롭게 살아 있는 교회, 그리고 교우들의 축복실현 등등이다. 아무튼, 이 눌림을 드러내놓기가 쉽지 않지만, 하나님 앞에서 눌림이 있는 목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아멘.

유명한 구세군 창립자인 윌리암 부스(William Booth 1829.4.10 ~ 1912.8.20) 대장이 임종을 앞두고 있는데, 한 신문기자가 그를 찾아가 물었단다. “미래의 기독교에 닥쳐올 큰 위험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는 신중한 얼굴로 대답했는데 꼭 선지자 같다. “이제 세계가 직면하게 될 가장 큰 위험은 중생 없는 용서를 전하는 철학적 기독교입니다. 추상적인 지식만 전하고 말 잔치만 하는 설교가 문제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입니다. 교회라고 하지만 그 교회에 가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는 정치, 지옥 없는 천국을 설교하는 것, 이런 것들이 앞으로 문제일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딱 그대로이다! 날마다 눌리는 일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기를 축복한다. 아멘.

3) 은혜(18)

바울은 성경을 여러 권 썼는데 작별 인사말도 조금씩 다르게 여러 가지로 하였다. 그런데 갈라디아서는 ‘은혜와 아멘’이라는 단어를 써서 하였다. 성경은 “태초”라는 말로 시작해서 “아멘”으로 끝난다. 아멘은 하나님에 대한 영광 송이고,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확증이며, 하나님의 자녀 됨에 대한 확신표현이다. ‘아멘’을 남발하지 말고 올바로 많이 하기를 축복한다.

그리고 ‘은혜’(Ἡ χάρις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소유격)는 “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2-5). 성경이 보여주는 대단한 믿음의 일꾼들은 한결같이 은혜받아 충성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창 6:8)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 1:27-28, 3 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행 6:8)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소망을 이루게 하는 그 은혜 아래 있기를 축복한다. 아멘.

자 이제 갈라디아서의 설교를 모두 마칩니다. 우리 모두 사도바울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자. 로마서 2장 28절이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중요한 순종 충성일수록 겉모습으로만 하지 말고 신앙관 그대로 신앙고백을 삶으로 만들라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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