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얼 3일 설교
“무엇을 자랑합니까?”(갈 6:11-16 ‘주님의 십자가 믿음’ 22.7.3)
어떤 집사님이 동네 가게에서 지쳐 보이는 아주머니에게 다가가서 “예수님을 믿어보세요.”라고 권했더니 그분이 “저는 다른 종교를 믿습니다.”라고 대답하더란다. 그래서 집사님이 반문했다. “아! 그러세요. 그러면 그 종교를 믿고 행복하게 잘되셨습니까?” 그러자 곧바로 그분이 이런 대답을 했다. “잘 되긴 뭐가 잘 돼요. 굶어 죽게 생겼구먼!” 집사님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정중히 소신껏 권했다. “아니, 굶어 죽게 만드는 종교를 왜 계속 믿고 계세요? 바꿔보세요. 예수님을 믿고 교회 다니면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자 그분이 “바꾸면 정말로 그래요?”라고 되묻자. “직접 체험해 보세요.” 그래서 당장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드리고 주일부터 집사님을 따라 교회에 다니게 되었단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면서 축복을 체험하고 누리려면 그리스도인이 분명하게 알아야 할 원리가 있다. ‘아브라함 + 사라 = 이삭’의 원리이다. 이삭이 그랄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해 농사를 지었더니 100배나 되었기 때문이다.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창 26:1-3, 12-13). 그런데 ‘아브라함 + 사라 = 이삭’의 원리와 유사품 ‘아브람 + 사래 = 이스마엘’을 잘 식별할 줄 알아야 혼란을 피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신앙 삶을 예방할 수 있다.
그러면 ‘아브라함 + 사라 = 이삭’의 원리를 충실히 실행하는 신앙생활이 바로 축복의 비결이라는 것인데 사도바울은 설교 본문 14절에 “십자가에 못 박히고”라는 말로 기록해 놓았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이루어진 그 많고 위대한 하나님의 도우심은 그 기본, 그 기초, 그 핵심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고”였던 셈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십자가는 본래 흉악한 범죄자를 처형하는 사형 틀로써 저주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십자가에, 왕이요 구세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못 박혀 사형당하셨다. 아무런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이유는 죄인인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바울은 “화목제물”(롬 3:25)이라고 증언했다. 따라서 바울이 십자가 외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한 이유는 확실하였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사건이요, 하나님께서 양자 삼는 구원사건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십자가의 구원사건에서 세 가지 사실을 보았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십자가에 못 박힌 이 세상과 십자가에 못 박힌 자기 자신이었다.
이 세 사실은 굉장히 중요함으로 좀 더 설명한다. 첫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죄인들의 죄들을 몽땅 짊어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으셨음을 밝혀준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요 1:29). 아멘.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세상(κοσμος)은 경건의 삶을 방해하는 이 세상의 쾌락들과 지식이론과 문화... 그렇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적인 가치와 일하는 방식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있다’라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다. 그래서 바울은 갈 5:24에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증언해 놓은 것이다. 세 번째 십자가에 못 박힌 자기 자신은 이 세상에서 놀아날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있다는 것이다. ‘못 박히다’(εσταυρωται 에스타우로타이 Aor, pass. “has been crucified.” -RSV, NKJV- 과거 시간에 끝낸 사건이 그대로 현재까지 유지됨).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우리의 옛 죄인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졌다. 그래서 그 결과는 지금도 그대로 효과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 세상과 우리의 옛사람은 어떠한 변덕도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표식(標式)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삼중적 의미로 못 박히셨고, 그 십자가를 믿으면 “새로 지으심”을 받는다고 바울은 증언해 놓았다(15 αλλα καινη κτισις 알라 카이네 크티시스, only a new creation, 고후 5:17의 “새로운 피조물”과 정확하게 일치한 표현! = ‘Made in God’ 인격적인 변화를 통하여 죄인을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성령님의 보혜사께서, 새로운 관계<가치관>를 이루고 성화를 시작하신 것. 이렇게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에서 새롭게 변화시켜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하심이 중요하지, 할례의 흔적은 박제처럼 전혀 효능이 없음!). 문제는 우리 자신이 해당하느냐이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중생시킨 후에 회개와 확신 그리고 매일 성화시키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승리하는 믿음 생활을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이며, 은혜 중(中)인 것이다. 아멘.
자 그러면 “오직 새로 지으심”이 유지되게 믿음생활을 잘하려면 무엇을 명심해야 하는가? 바울의 가르침을 직접 들어보고 챙기자.
1) 모양을 냄(12)
본문 12절에서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모순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육체의 모양을 내는 것’과 ‘할례는 십자가 신앙에 따르는 핍박 때 면피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모양을 낸다’(ευπροσωπησαι 유프로소페사이 ευ<good> + προσωπον<face> 겉모습만 신경을 씀. 외형주의자 바리새인들).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 신앙의 겉모습을 밝혀놓았다. “나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게다가 바울은 가말리엘 출신으로 당대 최고의 학벌을 자랑했다. 그리고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갖게 되었다. 당시에 로마의 시민권은 굉장한 상류층을 입증했다. 바울은 금수저였다. 하지만 그 겉모습들은 자랑 병의 중증 환자로 만들 뿐 십자가와 담을 쌓게 함으로 다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했다. 그런데 이 겉모습은 오늘날도 흔하다. 부자 생활, 출세, 성공, 박사, 장수, 운수 형통... 아들이 판사고 박사이니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실현에 동참하는 판 검사라야 축복이다. 영부인이 하얀 드레스를 입고 나랏님들 모임에 참석할 수 있다. 그러나 점쟁이 중이 권하는 대로 하얀 옷을 입고 출국한다면 결코 축복일 수 없다. 다 이런 식이다. 그래서 바울이 소리 높여 부르짖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이렇게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받았다는 확신에 찬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처럼 십자가 복음을 외칠 수밖에 없다. 아멘.
2) 불일치(13)
“스스로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이 말씀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강요는 잘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지키지 않음을 말해준다. 얼마나 모순이고 사기극인가! 이처럼 설교와 삶을 따로 하는 설교자가 바로 종교 삯꾼이다. 강단에서 대충 외치면 다 설교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삯꾼들은 십자가보다 할례 표시를 더 귀중하게 강조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십자가를 부인하지 않았다. 다만 십자가로는 부족하다고 하였다. 예수 믿고 할례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선동했다. 여러분, 설교를 이렇게 하는 목사는 지금도 있다. 십자가만으로는 부족하니 뭔가 더하라고 한다. 십자가 더하기 방언, 구원일자, 피가름, 감사절… 이다. ‘보이는 것’을 더하라고 한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제자로 삼으라”라고 가르치셨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참믿음은 대부분 내면에서 변화를 일으킨다. 여기에 성령님의 보혜사 되심 때문이다. 아멘.
‘BTK’는 Bind(묶다) Torture(고문하다) Kill(죽이다)의 약자인데, 묶고 괴롭혀서 죽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1970년부터 미국 캔자스 주에서 활동하던 연쇄 살인범이 사람을 10명이나 죽였는데 살인범은 데니스 레이더(Dennis Lynn Rader)라는 60세 노인이었다. 놀라운 것은 살인범이 그 도시의 공무원을 지냈고, 보이 스카우트의 대장도 하였으며, 30년 동안 아내와 함께 교회의 지도자로 있었고 운영위원회 의장도 하였더란다. BTK라는 명칭도 언론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신이 직접 만들었는데, 그는 10명을 살해한 후 잠적하였지만 결국 2005년 2월 25일 경찰이 체포하였다. 체포 당시 그는 교회의 목사였고, 아주 정상적인 생활을 해오고 있더란다. 이러니 보이는 것보다 속 내용이 중요하다.
3) 이 규례(16)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 사도바울이 “평강과 긍휼”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다고 확신하고 축복하였다(“규례” κανονι 카노니 measure, rule 저울 = “오직 새로 지으심”<αλλα καινη κτισις 알라 카이네 크티시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는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죄용서와 의롭다 하심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권, 예수님 이름 사용권, 마귀전 승리권, 천국의 영생권, 부자권이 기본적으로 다 들어있다(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십자가를 자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임).
교인들이 섭섭병에 걸리는 이유를 아시는가? “이 규례” 대신 ‘자기’라는 실적 공로주의, 보상주의 때문에 그렇다. 십자가를 붙드는 믿음생활은 어렵고 자기를 붙드는 교회생활은 쉽다. 저와 여러분은 구원받으려고 교회에 다니는 게 아니라 이미 좁은 생명길을 한참 동안 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충성하는 중이다. 아멘. 우리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 규례를 행하는 자”로 신앙 생활하길 축복한다. 아멘.
설교 본문은 바울이 마지막에 직접 큰 글자로 써놓았다고 밝혀준다. 이것은 경각심을 가지라는 뜻이지요. 밑줄을 긋고, 별표를 하며, 형광펜을 칠해서, 어떻게 하든지 명심하고 반영하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 강조의 핵심은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게 없음이었다. 인생은 3가지 해답을 요구한다. 첫째는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허무의 문제로서 삶의 의미와 가치 있는 인생이다. 둘째는 영원히 두려운 죽음이다. 셋째는 죄책감인데 건강과 물질, 지식, 명성까지 모두 성취해도 죄의 심판은 아직 남아있다. 이 세 가지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나요? 오직 예수님의 화목제물뿐이다. 이것들을 인간은 해결할 수 없다. 울어도 힘써도 참아도 안 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십자가의 좁은 문으로 들어와 생명길을 가라고.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