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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5일 설교

“사랑의 종 생활!” (갈 5:1-12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사랑’ 22.6.5)

우리에게 성자로 잘 알려진 프란체스코의 일화이다. 그의 제자 한 사람이 기도하는 중에 환상으로 천국을 구경하게 되었는데, 크고 작은 천국의 보좌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중에 유달리 예쁜 보좌 하나가 돋보였다. 그는 궁금한 나머지 천사에게 “저 보좌는 누구의 것입니까?”라고 물어봤더니, 천사는 “저 자리는 세상에서 겸손하게 사랑을 실천한 프란체스코를 위해 준비해뒀답니다.”라고 대답했다.

제자는 기도를 마치고 나서 존경하는 스승 프란체스코에게 조용히 물어봤단다. “선생님, 선생님은 천국에서 어떠한 평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프란체스코는 이렇게 대답했단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사람일 거야. 흉악한 죄인이지.” 전혀 뜻밖에 대답을 들은 제자가 한마디 했다. “선생님, 그 대답은 거짓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데 성자로 추앙받는 선생님께서 어찌 그런 말씀을 다 하십니까? 그것은 정말로 위선입니다”라고 반박했단다.

그러자 성 프란체스코는 기가 막힌 설명을 이렇게 하더란다. “자네가 나를 잘 몰라서 그런 걸세. 나는 참으로 큰 죄인이야. 만일에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그 큰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푸셨다면, 그들은 모두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이네. 오직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지금 내가 있는 것이네.” 프란체스코처럼 깨닫는다면 누구나 위대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아멘.

그렇다. 하나님의 은혜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면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도 안타까운 믿음 생활을 하기 마련이다(15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δάκνω 다크노 이빨로 무는 행동임. κατεσθίω 카테스씨오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대며 물어뜯는 야생짐승의 모습. 죄의 강렬한 본성을 말함. 사랑과 정반대임. 교회가 야생짐승의 소굴로 변질할 수 있으므로 바울은 “조심하라”(βλέπω 블레포 to look, observe, be aware of 알아차림, watch out)라고 경고하였다.

설교 본문은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라고 시작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자유함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2장 4절에서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라고 말씀했고, 5장 1절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라고 했으며, 그리고 5장 13절 설교 본문에서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이 말씀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에는 3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육신의 자유이다. 누구나 좋아하는 자유이지요. 그런데 이 자유는 막강한 책임이 따른다. 그 책임은 감옥생활이다. 자유를 남용하여 남에게 해를 입히면 그 자유를 박탈하고 감옥에 가둔다. 그뿐만 아니라 자유를 남용하여 중독되면 질병으로 육신의 자유함을 많이 상실한다. 또 정신의 자유도 있다. 몸은 자유로운데 정신이 속박당하여서 창살 없는 감옥생활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과거사에 얽매여 마음에 원한이나 증오심, 죄책감에 묶이면 몸은 자유하지만 마음은 감옥생활과 똑같이 기쁨을 상실한 채 살아가게 된다. 마지막으로 영혼의 자유가 있다. 가장 중요한 자유라고 할 수 있는데, 설교 본문에 해당하는 자유이다. 이 영혼의 자유는 죄로부터 자유로써 사실 구원을 의미함으로 최고의 자유함인데, 예수 안에서만 누리게 된다. 올바른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종말을 알고 자유를 누린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종말의 시간에 누구보다 담대할 수 있게 된다. 그 이유는 장래의 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일전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기길 바라지요. 그래서 한국인들은 손에 땀을 쥐고 시청한다. 그런데 축구를 2:0으로 지다가 후반전을 시작했는데도 계속 밀리기 시작하면, 짜증을 이기지 못해 TV를 꺼버리고 잠을 청한다. 그런데 아침 뉴스를 보니 3:2로 역전승했다. 그러면 반드시 재방송을 본다. 우리나라가 전반전에 2:0으로 지고 있지요. 그래도 어젯밤처럼 속상해 짜증도 내지 않고 재방송을 계속 본다. 왜 그럴 수 있나요? 3:2로 이긴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리 결과를 알고 있다는 것은 마음의 평안과 인내에 막중한 영향을 준다. 영혼의 자유함도 똑같다. 내 인생의 과정과 마지막을 미리 알고 있다면 얼마든지 평안히 인내할 수 있다. 이런 삶을 영혼의 자유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왜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셨나요?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인생길을 발견하고 영혼의 자유를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인은 살아가면서 자유를 남용하지 말고 오히려 자유를 애지중지하고 잘 누리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어떻게 활용하나요? 설교 본문에서 올바른 답을 찾아 챙기자.

1) 육체의 기회(13)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εἰς ἀφορμὴν τῇ σαρκί 에이스 아포르멘 테 사르키 ἀφορμὴν군사적으로 요긴한 작전기지, 전쟁의 승리를 위한 군사 요충지, σαρκί “육체” “인간의 타락한 본성” 죄 가운데 빠져있는 아담과 똑같은 옛사람)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죄의 본성을 가진 육체가 그 본성대로 죄의 삶을 살아가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통제하여 방종이 아닌 자유이게 활용하라는 것이다. 사실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렇다면 올바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사용할 수도 없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범죄하는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죄를 짓지 않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유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자유를 주신 목적이고, 자유의 의미이며, 자유를 위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육체가 기회를 얻지 못하도록 자유를 잘 통제하고 있는지 점검해보자. 언제든지 불쑥 튀어나올 수 있는 육체를 십자가에 잘 못 박아 두었나요? 그런데 육체의 기회로 자유가 사용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흔한 현실이다. 바울의 말 그대로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15)이다. 그래서 교회가 무시당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잘 통제하길 축복한다. 아멘.

2) 사랑의 종노릇(13)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ἀλλὰ διὰ τῆς ἀγάπης δουλεύετε ἀλλήλοις. διὰ<디아 수단> τῆς ἀγάπης<그 사랑, 6절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πίστις διʼ ἀγάπης ἐνεργουμένη 사랑을 수단으로 활력함 “faith expressing itself through love.” -NIV-> ‘사랑으로 섬기라’ 예수님을 닮게!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라고 가르치셨다. 이 사랑의 섬김은 예수를 닮아가는 순종이다. 암기한 지식이나 흉내 내는 신앙인은 시도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사랑의 섬김 삶은 아무나 하지 못한다. 자기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인만 가능하다. 자기 십자가는 사랑을 실천하는 섬김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서로 종이 되게 한다. 내 유익을 위해 이웃을 희생시키려 하지 않고, 그들의 유익을 위해 내가 희생하는 자유이다. 이것은 서로의 기쁨이고 감사함이다. 그래서 ‘자유는 종이 되는 삶’이라는 위대한 역설을 성립시킨다. 서로 종노릇 하는 자유는 사랑을 실천하기 때문에 모순이 아니라 더 높은 삶을 실현하는 것이다. 사랑은 눈을 멀게 하고, 모든 계산을 뛰어넘게 만들잖아요. 스스로 남에게 종노릇 하지 않는 인간에게서, 그 이기심과 교만을 녹여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이 사랑이다. 그래서 전도를 이룬다. 자유를 그렇게 사용하라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에게 자유를 주셨다는 것이다. 합당하게 신앙생할을 해가길 축복한다. 아멘.

3) 이루어(14)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라고 역설하였다. 이것은 율법의 순종으로 구원을 얻으려 할 것이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대신 담당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의미이지, 율법을 무시하거나 불순종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무시한다면 참으로 큰 오해 무식이며 고집이다. 신학용어로 ‘칭의’(稱義)는 율법이 아니라 십자가 예수님의 대속제물을 믿음으로 이루어지고, ‘성화’(聖化)는 율법의 교훈을 실현함으로 이루어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율법을 무시하지 않고 율법에 순종한다. 예수님도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하셨고, 사도 바울은 롬 13:8- 10에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라고 증언하였다. 아멘.

이스라엘의 구원역사는 긍휼히 여기신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성취이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인의 구원도 그리스도인의 노력과 공로에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 때문이다. 그러기에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에 주력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기 자신이 법이 되는 자율이 아니고, 아무런 법도 없는 무정부 상태는 더욱 아니다. 오히려 좋은 주인을 섬기는 자유이다. 그 좋은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50년 전까지도 제 고향에서는 저울로 무게를 달아 물건을 팔았다. 벼도 가마니에 담아 무게를 쟀고, 돼지도 네 발을 묶어서 저울로 무게를 쟀다. 복숭아도 저울로 달아서 팔았다. 복숭아를 바구니에 담고 저울로 달면 저울추가 바구니와 평행을 이룬다. 그런데 복숭아 한 개만 더 올려도 저울추가 확 바구니 쪽으로 기울어진다. 반대로 복숭아 한 개를 내리면 저울추는 확 아래로 처진다. 복숭아 하나 때문이다. 올해 대통령 선거 때 우리나라 국민은 민주당 후보도 국민의 힘 후보도 싫어서 덜 나쁜 놈을 뽑느라고 애를 먹었다. 윤석열 당선자와 그 당은 덜 나빠서 뽑힌 것을 모르는 것 같다. 1649년 영국 왕 찰스1 세는 의회 표결에서 단 1표 차이로 가결되어 처형되었다. 1875년 프랑스도 단 1표 차이로 왕정에서 공화국으로 바뀌게 되었다. 1923년 히틀러도 단 1표 차이로 나치당의 총수로 선출되어 600만 유대인을 학살하였다. 단 하나가 세상을 바꾸었다. 그래서 ‘대충 조금’이지만 ‘시작이 반’이다! 믿음 순종도 똑같다.

자 이제 오늘 설교의 화살표를 확인하자. ‘자유’라는 설교를 들으면서 ‘그런 거였군’ ‘나는 자유하지’라고 생각하고 넘어간다. 그래서 삶은 여지없이 빗나간다. 결국 ‘자유의 오해와 오용’이다. 다시 종의 멍에를 멘다. 저와 여러분이 그러지 않는지 냉정히 살펴보고 바로잡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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