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19일 설교

“자기 짐을 지라!”(갈 6:1-5 ‘그리스도인의 법’ 22.6.19)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1969년, 스탠퍼드 대학의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 교수가 재미난 실험을 하였다. 비슷한 조건의 자동차 두 대를 치안이 허술한 골목에 1주일 동안 버려두면서, 한 대는 본닛만 열어놓았고, 다른 한 대는 본닛을 열어놓고 창문을 조금 깨뜨려 놓았다. 그런데 보닛만 열어둔 자동차는 1주일간 그대로였는데, 유리창을 조금 깨 놓은 자동차는 10분 후에 밧데리가 사라졌다. 그러고 타이어가 하나씩 사라지더니, 낙서와 파손으로 1주일 후에는 고철 덩어리로 변했다. 이것을 ‘깨진 유리창의 법칙’(broken windows theory 가게 주인이 깨진 유리창과 같은 사소한 피해를 방치하면 그곳을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한다는 이론)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1980년 당시 여행객들에게 뉴욕의 지하철은 절대 타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불안한 치안 상태였다. 미국의 범죄 심리학자 제임스 윌슨(James Q. Willson)과 조지 켈링(George Kelling)이 1982년 뉴욕 지하철의 흉악 범죄를 줄이기 위한 대책으로 낙서를 철저하게 지우는 것을 제안하였다. 낙서 방치는 ‘깨진 유리창의 법칙’에 해당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뉴욕의 교통국장 David Gunn이 ‘깨진 유리창의 법칙’을 받아들이고 뉴욕 지하철 낙서 지우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시작했단다. 교통국의 직원 대다수는 범죄단속을 먼저 해야 한다고 반발하였다. 지하철이 얼마나 더러웠던지 낙서 지우기 시작 5년 후(1989)에야 완료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계속 증가하던 지하철의 흉악 범죄가 낙서를 지우고 나자 75%나 급감하더란다. 한국에서도 2012년 10월, 노숙자들이 즐비하던 서울역에 국화꽃 화분으로 꽃 거리를 조성하였더니 깨끗한 서울역으로 변화되어가더란다.

오늘 설교 본문도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사람을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라.”(1. “바로 잡고” καταρτίζω 카타르티조 “unite completely” 완벽결합, 원상회복 “restore” “right and restore and reinstate” -Amf- 엡 4:12에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καταρτισμον 카타르티스몬 ‘perfectly adjusted adaption’ 완벽조정)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교인의 누구라도 병들어 신음할 때 그 병에서 회복하도록 도와 활동하게 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신령한 너희”가 필요하다. 옆 분과 인사하자. “당신은 신령하십니다.” “아닌데요. 난 신령하지 않는데!”라고 말하고 싶은 분도 있겠지요. 그래서 바울이 말한 “신령한 너희”(πνευματικοὶ 프뉴마티코이 이미 성령의 보혜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는 어떤 특별한 은사를 가진 갈라디아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교회 내의 특권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킨다(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하여 한국교회가 이해하고 있는 바는 대체로 방언과 신유 은사에 국한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이 보여주는 ‘성령으로 사는 삶’은 그토록 제한하지 않고 훨씬 다양하고 인격적이다.

세례를 받으면 죄짓지 않아야지’라고 생각하는 교인도 흔하다. 그런데 그러한 강박관념이 하나님의 자녀 삶을 더욱 위축시키고 하나님 은혜 가운데 자유 하는 삶을 훼방한다.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도 잘못과 실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인간이 실현할 수 없는 이상주의를 강요하지 않고, 인간의 현실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드렸다. 이것은 본문 1절 말씀이 입증해준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 προλημφθῇ 프롤렘프쎄 단순과거 수동태 ... παραπτώματι, 파라프토마티 πιπτώ fall down, fail 일부로 죄를 짓는 게 아님. 얼음판을 조심조심 걸어가다가 미끄러져 넘어지거나 깨어진 얼음판에 빠지는 실수 같은 것). 신실한 그리스도인도 이 세속 사회에서 살다가 보면 아무리 조심한들 넘어지는 실수는 불가피하다. 바울은 그러한 인간의 현실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드렸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신앙생활을 어렵게 한 점은 엿새 동안의 인간관계이다. 이웃을 찾아가 아픔을 나누고 도움을 얻는 일은 어렵다. 신령한 성도라고 생각하고 대화를 나누었는데, 바로잡기보다 오히려 갈등에 더 빠져들기도 한다. 그렇게 상처받은 교인은 슬픔과 외로움으로 다시 회복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상처받은 사람들은 있는데 상처를 준 교인들은 시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염려하였던 바는 실수한 교인보다 성령 충만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실수하지 않고 경건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하였기 때문에 교인들이 잘못하면 재빨리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회복하게 도와주기보다 당장 비판하고 정죄하였다. 이러한 일은 실제로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믿음생활의 문제를 덮어두지 않고 올바른 해결 방안으로 신령한 믿음 삶을 증언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오늘은 신령한 믿음생활을 좀 자세히 살펴보고 배우자.

1) 온유한(1)

우리가 신령한 신앙 삶을 살아가려면 온유한 심령을 갖추어야 하는데(ἐν πνεύματι πραΰτητος 엔 프뉴마티 프라우테토스 “in a spirit of gentleness” =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지와 무능력을 시인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겸손의 마음가짐<갈 5:23의 성령의 열매, 범죄한 자를 인간적이고 여론적인 판단이나 노여움으로 지적하는 게 아니라, 겸손하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보아 올바른 믿음의 길로 인도함. 溫柔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범죄자를 바로잡는 것은 무척 어렵다. 사람은 해당한 잘못을 쉽게 시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범죄한 사람에게 온유한 마음으로 대하려면 굉장한 인내가 필요하다. ‘나는 그런 범죄를 하지 않았으니 또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범죄를 지적하기 때문에 온유한 마음을 품기 어렵다. 화가 치밀고 그래서 분노의 감정도 폭발하게 된다. 그러면 문제해결보다 도리어 문제를 헝클게 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의를 이루려다가 분열로 종결짓고 만다. 그런데도 ‘신령한 성도’는 범죄한 사람을 만나 오히려 한층 더 ‘따뜻하고 부드럽게’ 상대한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요일 1:10)라고 말씀하고 있음을 신령한 신앙인은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누구나 죄인’일 뿐이다. 아멘.

2) 그리스도의 법(2)

신령한 사람은 짐을 지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한다. ‘성령님에게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의 삶’(하늘에서 이루어진 일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인데, 성경 하단 각주 1)을 보면, “또는 무거운 짐을”이라고 설명해놓았다(τὰ βάρη 타 바레 βάρος의 복수 목적격, 혼자 도저히 질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짐들임, 문제들<problems> 걱정들<troubles>을 함께 나눔<share>). 교우들은 혼자 질 수 없는 무거운 짐들을 만난다. 저기 피아노가 있다. 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진심으로 기도해 온 4명 정도가 불편을 이해하고 바꾼다. 끝까지 겸손하게 한다. 이런 식이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제가 대학 1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4개월 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너무 심란한 나머지 농약을 한 번 빠뜨려서 벼농사를 반타작하게 되었다. 저는 아버지가 안쓰러워서 겨울 방학 때 집에서 집안일을 닥치는 대로 도왔는데, 동네 정미소에서 벼를 찧어서 짚 가마니에 쌀을 담아 지게로 지고 오다가 너무 무거운데 지게를 바치고 쉴 턱이 없어 계속 지고 오다가 넘어지고 말았다. 쌀은 쏟아지고 왼 발목을 삐었다. 그래서 한 달은 고생하였다. 쌀 한 가마니는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정말 무거운 짐이었다. ‘짐 βάρη’는 넘어져서 다칠 수 있는 그런 무거운 짐들을 말한다. 그렇게 무거운 고통의 짐들을 지고 가는 교인을 볼 때 얼른 그 짐을 나누어지라는 것이다.

고전 12:12에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교회를 몸으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몸은 여러 지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 하나만 아파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허리를 삐끗하여도 똑바로 걷지도 못한다. 온몸이 같이 병신 된다. 모든 지체가 그 고통을 함께 당하기 때문이다. 교회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한 교인이 무거운 짐에 시달리면 다른 교우들이 함께 그 고통을 나누어서 그 교우가 무거운 짐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회복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의 참된 모습이다. 아멘.

3) 자기 짐(5)

신령한 사람은 ‘자기 짐을 진다’ 본문 2절의 “짐”(βάρος 바로스 무거운 짐), 5절의 “짐”(φορτίον 포르티온 군인들이 지는 짐, 소위 ‘떠불 백’에 담아놓는 자기 살림살이, 자기 몫). 교회의 설명이다. 그렇다. 고전 12:28에 보면,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다음은 능력이요 그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교인마다 역할을 주셨다. 그 역할을 건전하고 건강하게 하라는 것이다. 그 역할이 “각각 자기의 짐”이다. 교회는 목사의 짐이 있고, 장로의 짐도 있고, 권사와 집사의 몫이 다 있다. 집사님에게 목사님의 짐을 맡기면 혼란이 생긴다. 그런데 자기 몫을 하지 않는데도 하는 줄 착각할 때 그 교회는 골병든다. 그래서 생긴 말이다. ‘겉 무늬만 남편’ ‘겉 무늬만 권사님’ ‘겉 무늬만 그리스도인’ 직분을 감투로 알고 실제로 자기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이다. 직분의 사명을 어느 정도 감당하는지 점검해보자는 말이다. 맞다. 자신이 목사인 게 부끄러울 때가 있다. ‘저러고도 목사냐?’ 특별히 고귀한 직분 때문에 조롱당하는 경우를 저는 많이 보았다.

100-1은 얼마인가? 99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중국정부는 최근에 대대적인 세무감사를 하면서 ‘100-1=0’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이 구호의 의미는 100건 가운데 1건만 잘못해도 전부 잘못됨으로 간주한다는 중국정부의 비장한 의지를 보여준 바였다. 백번 잘하다가 단 한 번의 잘못으로 모든 충성이 무능함으로 평가된다는 경고였다. 그렇다면 역으로 100+1은 101이 아닌 200, 300, 1000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라는 속담도 생겨난 것이다.

설교결론이다. 갈 5:25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We live in the Spirit, let us also walk in the Spirit.” -NKJV- “We live by the Spirit, let us keep in step with the Spirit.” -NIV- 성령님과 동행하자. 성령님과 보조를 맞추면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고 하나님은 영광 받으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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