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12일 설교

“성령을 따라 동행하라!”(갈 5:16-26 ‘성령의 열매’ 22.6.12)

어느 농부가 이른 봄에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둥우리에 오리 알 몇 개를 넣어두었더니 어미 닭은 아무것도 모르고 알들은 다 같이 품더란다. 3주 후에 알에서 깬 병아리들과 새끼 오리들이 함께 어미 닭을 따라다니면서 어미 닭이 발로 흙을 긁어놓으면 거기서 먹이를 주워 먹곤 하였다. 그런데 새끼 오리들은 연결된 발가락 때문에 병아리만큼 신속하게 다니지 못하였다. 그래서 가끔 새끼 오리들은 어미 닭과 병아리 무리에서 떨어지곤 하였다. 그런데 몇 주 후에 물웅덩이를 지나다가 새끼 오리들은 하나 같이 물로 뛰어들더니 본능적으로 헤엄을 치고 놀았다. 그러고 새끼 오리들은 더는 어미 닭을 따라다니지 않고 물웅덩이에서 잘 놀고 먹고 자고 하더란다. 원래 오리는 땅에서 걷는 것보다 물에서 헤엄치는 게 훨씬 편리한 몸 구조를 가졌다. 하지만 어미 닭에 의해 부화 되고 길들여진 새끼 오리들인지라 그동안 병아리처럼 살아가느라고 힘들었다. 그래서 자신의 본래 모습을 되찾기까지 많은 고충과 시간을 보내야 했다.

바울 시대에 갈라디아 교인들도 병아리인 양 살아가려는 새끼 오리들처럼 신앙생활을 하려고 다시 유대 전통인 율법주의로 돌아갔다. 사실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우상을 섬기고 살았다. 그러다가 바울을 만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우상숭배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 삶을 제대로 누려도 보기 전에 거짓 삯꾼들이 자신도 지켜내지 못하는 유대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선동하는 바람에 갈라디아 교인들은 다시 유대 율법주의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점은 율법주의로 돌아가면 구원 무효였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그런데 실제로 갈라디아 교인들만 그런 게 아니지요.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흔히 있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설교 본문에서 성령을 따라 살아가라고 처방을 내려주고 있다(16 “행하라”περιπατεῖτε 페리파테이테 περιπατεω의 현재 명령형<반복 지속> 바울이 유일하게 여기에만 사용함. =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שָׁמֹר תִּשְׁמְרוּן 솨몰 티쉬메론 you will keep, keep>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אַהֲב 아합 amour> 그의 모든 도를 행하여<ַעֲשָׂה 아사 to make> 그에게 의지하면<דָבְקָ 다바크 to cleave> 여호와께서 그 모든 나라 백성을 너희 앞에서 다 쫓아내실 것이라 너희가 너희보다 강대한 나라들을 차지할 것인즉”<신 11:22-23 כִּי<because>로 시작함> 관심을 가지고 성령님의 곁에서 따라감). 사도 바울이 설교 본문 16절에서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라고 하신 이 말씀은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라’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성령의 사람은 어떠한 삶을 살아가던가?

예수님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자.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 16:13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 16: 8 “내가 보혜사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ελεγξει “He will convict and convince” -Amf-).” 마 10:19-20 “너희를 넘겨줄 때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혜사(παρακλητος 파라클레토스 an advocate, to assist another, “counselor”)라고 말씀하셨다. 실제로 복음서가 보여주는 예수님의 12제자들은 변덕쟁이들이었다. 충성은커녕 의리도 없이 배반도 하였고, 예수님의 말씀도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에 몰두하다가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완전히 달라졌다. 우선 예수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달아 복음을 전파하는 주님의 제자답고, 충성된 종으로 변화됐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라고 강권하였던 것이다. 아멘.

1960년도에 터키는 처음으로 자동차를 만들고 눈부신 경제발전을 입증함으로 대통령과 관료들이 자긍심을 가지고 국회 의사당에 모여서 시승식을 하였다. 드디어 구르셀 대통령은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박수를 받으며 국산 자동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차는 300m도 못 가고 ‘퍽퍽’ 하더니 시동이 꺼지고 멈춰 섰다. 대통령은 물론 모두 당황했고 국민은 난감해했다. 그때 기술자가 황급히 자동차를 점검하더니 땀을 씻으면서 말했다. “각하,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자동차에 기름 넣는 것을 깜박 잊어버렸습니다.” 아무리 우수한 차라도 연료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 믿음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성경에 능통할지라도 성령을 받지 못하면 연료를 주입하지 않은 차와 같다. 하니님의 자녀는 반드시 성령의 전을 갖추어야 한다. 이것은 필요 충분 조건이다.

자 그러면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는가? 설교 본문을 자랑같이 살펴보면서 그 답을 찾아 챙기자.

1) 성령의 인도(18)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πνεύματι ἄγεσθε 프뉴마티 아게스쎄 ἄγω의 현재 수동태 “by the Spirit” 지속해서 순종함을 말해줌. 성령 충만함의 개념 임. 베드로가 예수님께 천국열쇠를 받고 곧바로 “사탄아 물가라”라고 책망을 받았던 사실을 생각하면 굉장히 중요시할 일! 더군다나 롬 8:14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마포구 양화진에 가보면 선교사들의 묘가 있다. 그곳에 감리교 선교사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26-1949.8.5)의 묘도 있다. 그는 7개국어를 하면서 을사보호조약 이후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뛰어다녔던 선교사였다. 그러다가 그는 한국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런데 그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라고 말하곤 했단다. 또 한국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는 성서번역자 회의에 참석하러 목포로 가던 배가 충돌해 침몰할 때 조선인 여학생을 구하려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시신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양화진에 있는 그의 묘는 시신 없이 묘비만 세워져 있다. 내 나라도 아니고 내 친구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희생하였을까? 그것은 자기 십자가를 진 신앙 삶 때문이었다. 그 선교사님들은 성령의 보혜사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었다. 그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아멘.

2) 성령의 열매(22)

“오직 성령의 열매는”(Ὁ δὲ καρπὸς τοῦ πνεύματός ἐστιν 호 데 카루포스 투 프뉴마토스 에스틴 The but fruit the holy Spirit is love, joy, (단수 ‘성령의 열매들은’이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음). 그러니까 열매는 하나인데 볼 수 있는 면은 9개 이상라는 것이다. “이 같은 것을”(τῶν τοιούτων 톤 토이우톤 “such things” -NIV, Amf- “이런 것들을” -새번역-)이라고 했다. 9개 이상인 면은 하나님과 관계하는 면이 있고, 사람들과 관계하는 면, 그리고 자기 자신과 관계된 면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9개 열매 중에 몇 개를 맺고 있으니 괜찮다...’ 그런 의미가 아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면 성령의 열매들이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맺어지고, 대인관계 중에 맺어지고, 자신의 경건생활에서 맺어지는데, 그것을 금지할 법은 없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누구도 훼방하지 못해 삶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17절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라는 말씀이 있다. 그러니까 “오직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 “육체의 일”(19절-21절)을 맺는다는 것이다. 사실 육체의 일들(15개 + “또 그와 같은 것들”)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즐기고 만족해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을 보면 성령의 사람인지 육체의 사람인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19-21을 함께 읽어보자. 저와 여러분은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그리고 꾸준히 맺어가길 축복한다. 아멘.

3) 예수의 사람들(24)

이 말씀을 보면 인간은 두 유형인데, 성령의 인간육신의 인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할 때 그 사람은 중생(重生)하고, 성령은 그 사람을 성전 삼고 사신다. 인간이 만든 컴퓨터나 로봇은 사람의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기계라서 스스로 결정하여 창의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에게 자유를 주시고 창의적으로 살아가게 하신다. 이것은 한없이 사랑하심이다. 부부가 기계처럼 살아간다면 비극 자체이다. 우리의 자녀들이 로봇처럼 살아간다면 얼마나 애타겠는가? 할 수 있기도 하고 하지 않을 줄도 아는 자유, 이것을 선택할 수 있고, 손해지만 저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만큼 그리스도인은 인격적(知情意)이다. 그래서 프로그램이 아니다. 그런데 ‘육체의 나’는 범죄에 익숙해 있다. 그래서 바울은 증언했다. 17절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24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사람이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내가 좋은 생각을 하니까 좋은 사람’이다. 틀렸다. 좋은 생각이라는 판단은 내 기준이다. 그리고 좋은 생각을 해도 실제로 악을 행하니 틀린 것이요. 비극이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1-24) 인간에게 있는 아름다운 소원은 그것을 못하게 만드는 육체의 소욕에게 계속 싸워 진다는 것이다.

자 이제 오늘 설교 말씀의 화살표를 확인하자. 성경 롬 8:5~6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라고 말씀한다. 우리 앞에 두 인생이 있다. 육체가 맺는 열매를 그대로 맺고 사는 인생이 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인격적으로 누리며 성령을 따라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인생이 있다. 그 선택은 자신이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령 인생을 인격적으로 살아가길 원하신다.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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