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8일 설교

“헛된 일”(갈 4:8-11 ‘퇴보하는 신앙생활’ 22.5.8)

고려에 반역하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고려의 500년 도읍지 개성을 떠나려 했다. 그래서 새 수도로 거론된 곳이 한양과 계룡산이었다. 태조는 계룡산을 수도로 정하고 토목공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해 12월 일등공신 하륜이 계룡산은 남쪽에 치우친다며 무악(毋岳 서울 연희동 일대) 천도를 주장했다. 이성계는 재상들에게 충언(忠言)을 물었다. 정도전이 한 마디로 끝냈다. “통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토지의 성쇠(盛衰)에 있지 않다. 술수를 부리는 자만 믿을 수 있고 선비의 말은 믿을 수 없는가?” (1394년 8월 12일 태조실록) 결국 태조는 한양을 수도로 확정하였다.

그러고 이방원 ‘왕자의 난’ 때 정종은 개성으로 환도하였고, 정종의 아우 이방원이 왕위에 올랐다. 태종 이방원은 한양 재천도를 선언하였다. 그러자 하륜이 또 무악 천도를 주장하니, 태종은 측근 다섯을 데리고 종묘로 들어가 동전으로 ‘척전(擲錢)’이라는 점을 쳤다. 엽전의 한 면은 ‘길’, 다른 면은 ‘흉’으로 표시한 뒤 세 수도 후보지에 세 번씩 엽전을 던져 ‘길’이 많이 나온 곳으로 결정하는 방식이었는데, 한양이 길2, 흉1로 많았다. 이미 “점을 친 후에 딴소리하는 자는 종묘를 능멸하는 이들이다.”라고 태종이 선언하였기 때문에 일체 투덜거림은 없었다. 이때가 태종 4년인 1404년이었다. 조선왕조 이후 시작된 수도 천도 논의는 무려 10여 년 끝에 종결되었다. ‘엽전 던지기’로 말이다. 사실 측근들만 참석하고 흔적도 남지 않는 동전 던지기였으니 태종의 뜻대로 되었으리라. 조선 500년의 수도 한양은 정도전의 말대로 선비의 구상대로 도시 기능과 경비 절감, 도시미관 등등 합리적인 이론을 반영하여 청계천을 도시로 관통시켰다고 하지만 풍수지리설에 휘말려 천도와 재천도에 시달렸던 게 사실이다.

오늘 설교 본문도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은 초등학문의 지배 아래 있음을 밝히고 있다(9 τὰ ἀσθενῆ καὶ πτωχὰ στοιχεῖα ... πάλιν ἄνωθεν δουλεύειν θέλετε; 타 아스쎄네 카이 프토카 스토이케이아 ... 팔린<again> 아노쎈<anew> 둘류에인 쎌레테 “the weak and beggarly elements, ... you desire again to be in bondage?” -NKJV-).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에 대한 실체를 올바로 인식하는 일은 한없이 중요하고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오직 자신의 기대일 위험성은 항상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한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성경이 말해주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게 되고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 된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게 아무리 열심히 순종하고 충성하며 헌신하여도 심판대에서 하나님은 도무지 모른다고 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의 현실은 믿음 아닌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는 경우는 아주 흔하다. 실제로는 믿음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소망, 바울 등등 성경의 여러 내용이 성경이 말씀하는 것과 너무나 다르게 인식하고 있는 교인도 많다. 그래서 다른 믿음,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바울이 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모조품을 진품으로 여기는 안타까움 중 가장 심각한 것은 구원을 이루지 못한데도 붙들고 구원을 얻은 줄, 또는 얻고자 한다는 것이다.

세계 제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1월 22일, 연합군 병력수송선 도체스터(Dorcester)호는 904명을 태우고 뉴욕항을 떠나 어둠 속에 북으로 항해하고 있었다. 항해 12일째 2월 3일, 독일 잠수함이 도체스터호에 접근하여 어뢰를 발사했다. 도체스터호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점점 물에 잠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배에서 네 명의 군목(軍牧)이 구명조끼를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구명정을 탈 수 있게 도왔는데 나누어 줄 구명조끼가 바닥났다. 그때 군목 Clark V. Poling 중위가 한 병사에게 물었다. “자네 그리도인인가?” “아니요.” 그러자 Poling 군목은 자기가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벗어주면서 “나는 그리스도인이니 지금 죽어도 천국으로 갈 수 있네. 자네가 이 구명조끼를 입고 살아서 꼭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서 만나세.” 그러자 세 명의 군목들도 자기의 구명조끼를 벗어서 구명조끼를 받지 못한 병사에게 주었다. 도체스터 호에 물이 차오르자 네 군목은 서로 팔을 끼고 갑판에 서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찬송을 부르면서 물속으로 잠겼다고 한다.

생존한 병사 Grady Clark은 이렇게 증언했다. “내가 본 마지막 장면은 군목들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병사들에게 벗어주고 죽음을 택하였습니다.” 병사 904명 중, 230명만 구조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4 군목 Clark V. Poling, George L. Fox, Alexander D. Goode, John P. Washington을 기리는 기념예배당(US Naval Chapel), ‘기념관’(Four Chaplains Memorial Hall)을 짓고, 기념우표도 발행했단다. 네 군인 목사님이 보여준 신앙관은 천박한 초등학문과 확실하게 구별되지 않나요? 이게 바로 ‘거룩한 믿음’이다.

자 그러면 이 거룩한 믿음 삶은 어떻게 가능해지는지 저랑 같이 설교 본문에서 찾아 챙기자.

1) 하나님 인식(9)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μᾶλλον δὲ γνωσθέντες ὑπὸ θεοῦ 말론 데 그노스쎈테스<수동태, 분사, Aor> 휘포 쎄우 “or rather to be known by God,” -RSV-).

이 말씀은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의 보혜사 되심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아차리게 됐음을 말한다.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되었음을 말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자를 가리킨다. 신앙 삶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안내되어 있음으로 성경을 읽고 배우며 살아간다. 아멘!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 49:15-16) 그렇다. 우리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진 사랑받는 자녀이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그래서 성령님이 감동하심을 최고의 복으로 고백하고 찬송하면서 살아간다.

저와 여러분은 어떠한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라면 초등학문에 종노릇 하며 살아갔던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언약을 즐기고 감사찬송 하면서 오직 심판대에 맞추고 심판대를 기대하며 살아간다. 이게 진정한 회개요 올바른 그리스도인이며 예수님을 잘 믿은 신앙생활이다. 아멘.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구원받아 천국에 갈 거라고 말하면서 세상의 종으로 사는 갈라디아 교회에게 어찌 묵인할 수 있겠냐고 반문하고 탄식하며 꾸지람을 했던 것이다.

2) 삼가 지키더니(10 παρατηρεω 파라테레오 to watch narrowly)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는 편리한 환경을 복으로 알고 그 복을 받기 위해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열심히 계산해가며 풍수지리설에 매달리고 세상의 종으로 살았는데, 하나님을 알고 난 후에 그것이 다 세상의 초등학문이요 헛수고인 것을 깨닫고 안타까워하는 분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의롭다 하심과 초등학문의 의로움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님 십자가의 대속제물을 알고 시인하여 받아들인 삶이고 증언함이다. 그런데 유대 바리새인의 의는 율법주의이고, 초등학문의 의는 “천박한”(beggarly elements)이라고 하였다. 박사 학위를 가진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자랑하더니, 실험을 잘 되게 해달라고 돼지 머리에게 절하고 손 모아 빌더란다. 또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되려면 점쟁이를 찾아가 많은 돈을 내고 자문을 받고 엄청난 돈을 낭비하면서 목숨 걸고 철칙으로 따른다. 바로 오늘날의 초등학문이다.

그런데 장성하지 못해 지각이 없는 교인들도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라고 책망을 당한다. 골로새서 2장 20절에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이렇게 양다리 걸친 교인들이 있음을 탄식하였다. 육체로 살고자 하는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길 축복한다.

3) 두려워(11 φοβοῦμαι ὑμᾶς 포부마이 휘마스 “I fear for you” -NIV- “I am worried about you!” -GN- 후회보다 돌아선 교인들에 대한 통분<痛忿>!).

사람에게 회귀본능(回歸本能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옴)이 있다. 그래서 옛 추억을 간직하고, 과거 어린 시절을 그리워한다. 옛 습관이나 생각을 무우처럼 뚝 자를 수 없다. 그러니 신앙생활은 자신과 싸움이 된다. 그리스도인(χριστιανος 크리스티아노스 Christian, Christ + ian<추종하는 사람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아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예수님이 전파되게 살아가는 사람임<“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 5:24>.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게 생활하는 것. 주변 사람들이 그것을 볼 수 있음). 오늘날 한국교회는 무심코 ‘성도’라고 부르는 교인은 흔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드물어서 전도가 멈추게 된 것이다.

구약성경을 읽다 보면 다윗이라는 이름에 익숙해진다. 800번 이상 나오니까. 하나님은 다윗을 엄청 도와주셨다. 그런데 다윗은 무서운 죄인이었다. 간음죄, 살인죄, 하나님 부인, 성전떡... 그런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그토록 많이 받게 되었을까? 그것은 진실함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 중에 태어났나이다.”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습니다.”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라고 실토했다. ‘나 혼자만 아니라 둘이 같이 지은 죄인데, 어쩔 수 없어 공모한 죄인데, 그 여자가 유혹했는데...’ 이렇게 하와나 아담처럼 누구도, 환경도 탓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자녀생활에서 핵심 중 핵심은 나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이다. 그 올바른 관계가 바로 내 지위를 결정한다. 아직도 ‘하나님은 없다’라고 고집하는 무신론자를 우리가 만나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은 우주의 법칙을 부인하게 되고 그러면 우연론, 운명론에 갇혀서 종노릇 하는 인생을 살아간다. 바울은 그런 인생을 통분하였다.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실체를 알고 자긍심을 갖고 살아가길 축복한다. 아멘.

누가 취미와 성격에 맞춰 교회 다닌다면 그 신앙 삶은 쉽게 그려진다. 그 교인은 자기 옹호를 위한 신앙생활을 한다. 그런데 성경은 자기 옹호는커녕 수치를 고발하고 책망한다. 제아무리 양심가라고 자부해도 모두 죄인이라고 선언한다. 다른 곳이면 진짜 선하고 위대하다고 칭찬받는데 하나님의 말씀 앞에만 오면 그 모든 자랑은 더러운 모습으로 둔갑한다. 바로 이것을 싫어하면 회개할 수 없고 결국 나를 옹호해주는 초등학문을 찾아가는 법이다. 명심하길 축복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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