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29일 설교
“달음질을 잘하라!” (갈 5:1-12 ‘성도의 자유와 사랑’ 22.5.29)
성경을 읽다 보면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이 자주 나오지요. 그러면 독서 의욕이 줄어든다. 그럴 때면 어른들은 이런 충고를 하던 때가 있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이니 무조건 덮어놓고 믿으렴!” 이해가 안 되더라도 ‘따지지 말고 그냥 넘어가고 계속 읽어보라’라는 의미로 하는 말이었겠지요. 처음에는 ‘그런가 봐’라고 생각하였는데, 요즘엔 핸드폰으로도 웬만한 내용은 쉽게 확인할 수 있으므로 사람들은 그 내용을 확인해 보면서 그 실체(實體)를 보면서 믿으려고 한다. 그래서 성경 독서의 충고도 이렇게 바꿔야 할 때가 이미 되었다. “성경을 무조건 덮어놓고 믿지 말고, 활짝 펼쳐놓고 믿으렴!”
1층 마루에 앉으면 담장 너머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그래도 담장 너머의 실제 상황을 이렇다 저렇다 말할 때 흔히 과거의 경험들을 참고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담장 너머의 실제 상황을 책임지고 사실대로 말하려고 2, 3층으로 올라가 본 바를 말하는 분들이 많아졌다. 2, 3층으로 더 높이 올라가면 1층에선 도저히 볼 수 없었던 담장 너머의 현실을 훨씬 더 환히 볼 수 있게 되지요.
믿음 생활도 ‘초신자’라는 맨 밑바닥에서는 담장 안에 막혀있는 것과 비슷하다. 많은 신앙의 원리와 법칙, 명령이 풀리지 않아 짜증을 유발하기 쉽다. 신앙의 법칙들은 이 세상의 경험이나 지식으로는 풀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앙 세계의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은 그대로 놔두고 믿음 수준을 더 높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자녀 삶을 보혜사 성령에 민감하게 순종하노라면 지난날 불평불만이던 문제들이 술술 풀리고 해답도 알아볼 수 있게 된다. 성경은 그 사람의 믿음 수준만큼 대답해주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더욱 가깝게 하면서 신앙의 원리와 법칙을 찾아 준행(準行)하며 믿음 수준을 키워보자. 그러면 성경이 점점 더 밝히 보이는 것을 체험하고 믿음의 시야도 넓어진다. 아멘.
오늘 설교 본문도 하나님의 자녀 삶을 올바로 잘 진행했다가 멀리 보지 못해 갑자기 빗나간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7-8 “달음질을 잘하더니”(Ἐτρέχετε 에트레케테 τρέχω<트레코 to run, to progress freely, to advance rapidly>의 능동태 미완료, 지속함. 경주를 참으로 보람차게 하면서 기쁨과 감사가 넘쳐났음(“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갈 4:14-15>).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은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됐다(τῇ ἀληθείᾳ μὴ πείθεσθαι; 테 알레쎄이아 메 페이쎄스싸이. πείθεσθαι 페이쎄스싸이 πείθω persuade 부정사 수동태 현재형. 설득당해 있음. “요동하게 하는”(10, ταράσσων 타라손 ταράσσω의 현재분사 to terrify, anxiety, trouble. 그리고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8 ἐκ τοῦ καλοῦντος ὑμᾶς 에크 투 칼룬토스 휘마스 καλεω의 현재분사. 하나님께서 계속 부르고 계심. 이것은 우리 예수교의 믿음 생활의 실태(實態)임,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가는 올바른 믿음생활이냐 아니면 설득당해 빗나간 믿음생활로 빠짐이냐 임).
오래전에 미국의 심리학 교수가 수업시간에 40여 명의 학생에게 “단어 연상 실험”을 하면서 ‘성탄절’이라는 단어를 제시했단다. 학생들이 써낸 말은 ‘추리’ ‘선물’ ‘칠면조’ ‘휴일’ ‘캐럴’ ‘산타클로스’ 등등 다양했는데 가장 중요한 주인공인 ‘예수님’은 없더란다. 그러니까 미국의 성탄절(Christmas)은 ‘X-mas’로 변해버린 것이다. ‘X-mas’의 ‘X’는 헬라어로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첫 글자인데, 수학에서는 모르는 답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기호이고, 사회에서 통상 대답이 틀렸을 때 사용한다. 그렇다면 ‘X-mas’는 틀린 성탄절이라는 뜻이 된다. 이처럼 틀리고 빗나간 성탄은 시작부터 있었다.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눅 2:7 예수님을 철저히 배제하였다는 것임) 또, 눅 13:14에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이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오늘날 우리의 입장으로 표현하면 ‘주일에 예배당에서 성경 공부하실 때’이다. 예수님께서 주일에 예배당에서 성경을 가르치시다가 혼나셨다! 저와 여러분이 잘 새겨듣고 자세히 살펴볼 일임).
자 그러면 이처럼 한심한 믿음 생활로 빗나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살아가야 하는가? 저랑 같이 설교 본문을 살펴보면서 그 정답을 찾아보자.
1) 성령(4)
“성령으로”(ἡμεῖς γὰρ πνεύματι ἐκ πίστεως ἐλπίδα δικαιοσύνης ἀπεκδεχόμεθα. “For we through the Spirit eagerly wait for the hope of righteousness by faith.” -NKJV- ‘성령을 통하여’ 또 ἐκ πίστεως 에크 피스테오스 ‘믿음에서 나오는 소망’을 말함). 성령님은 그리스도인마다 마음에서 보혜사로 계시면서 그 믿음의 진보를 이루어 가신다. 이것은 은혜 아래서 믿음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의 특성이다. 그러니까 은혜 아래 사는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율법을 통한 구원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외적인 형식을 따르게 가르치지 않는다. 성령이 중요시하는 것은 생명과 평안을 갖춘 믿음의 진보이다(롬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보혜사 되심에 민감하게 순종하여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면 믿음생활을 잘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라는 말이 생겨났다. 주로 정승이나 판서 또는 왕실의 측근 중에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는 자를 두고 하는 말이었지요. ‘날아가는 새를 떨어뜨리는 일’은 그 당시의 사회나 문화에서 보면 ‘불가능의 현실화’에 해당했다. 그렇다면 ‘날아가는 새를 떨어뜨리는 일’보다 훨씬 더 엄청난 일이 있다. 그것은 ‘떨어진 새를 다시 날게 하는 일’이지요. 이 일은 막강한 초능력이라야 가능하다. 그런데 바울이 분명히 시도하였다. 물론 해산하는 수고가 필요하였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를 그리스도 안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일은 바로 ‘떨어진 새를 다시 날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제 우리는 ‘날아가고 있는 새를 떨어뜨리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떨어진 새를 다시 날아가게 살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인지 결단해야 한다. 날아가는 새를 떨어뜨리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풍수지리설에 쏠리는 세상 권세자이고 떨어진 새를 날아가게 하는 분은 분명히 전지전능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다. 예수님의 말씀이다.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성령의 보혜사에 잘 따르는 그리스도인이길 축복한다. 아멘.
2) 믿음(6)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증언하였다(ἀλλὰ πίστις διʼ ἀγάπης ἐνεργουμένη 알라 피스티스 디 아가페스 에네르구메네. 사랑을 통하여, 수단으로 활력함 “The only thing that counts is faith expressing itself through love.” -NIV- 중요한 점은 ‘할례’ 같은 외적 형식보다 사랑하는 믿음생활을 한다는 것).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0) 이렇게 사랑으로 나타나는 믿음 생활은 은혜 아래 사는 그리스도인의 또 하나의 특성이다.
1965년 10월 4일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육군 훈련장에서 월남으로 파병될 군병들이 수류탄 투척 훈련을 하였는데, 이등병이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고 손을 뒤로 젖히는 순간, 긴장한 나머지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그때 훈련을 지휘하던 강재구 대위는 위험을 직감하고 그대로 자기 몸을 던져 수류탄을 덮쳤고, 그래서 많은 부하를 살렸다. 그것은 진실로 부하들을 사랑하는 지휘관의 참된 군인정신이었다. 얼마든지 몸을 던지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강 대위는 육군사관학교에서 배운 대로 실천하는 참 군인이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대속제물로 희생하셨다. 그렇게 희생으로 나타나는 사랑을 믿음이라고 하는데, 이 믿음 생활이 진짜이고 우리 하나님께 통한다. 아멘.
3) 종의 멍에(1)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인간은 죄와 사망의 법에 갇히게 되었는데, 이 속박에서 자유케 된 실체를 가르쳐 준 말씀이 본문이다. 어떻게 자유케 되었는가? 예수님이 십자가 화목제물로 희생하셔서 우리를 죄의 결박에서 자유케 하셨다. 그러므로 이 자유는 3가지 효능을 가지고 있다. ① 범죄 세력인 사탄에서 자유이다. 히 2:14-15절에 예수님은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를 놓아주려 하심이니”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의 우편에 앉으심으로 사탄의 정수리를 깨뜨리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사탄에게 승리하는 삶을 날마다 살 수 있다. 이것은 소속을 바꾼 천국 시민권자에게만 해당한다. 아멘! ② 범죄에서 자유이다. 사도 바울은 롬 8:1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증언해 놨다. 그렇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제 죄인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대신 죄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믿는 자의 주홍 같은 죄를 흰 눈같이 용서하셨다. 그런데 이 자유는 그리스도인이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여전히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는 지을 수 있다. 그러나 전에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죄는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③ 범죄 형벌로부터 자유이다. 바울은 갈 3:13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라고 증언한다. 그렇다. 율법이 그리스도인을 정죄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형벌에서 해방됐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는 모두 자유롭다고 한다면 큰 억지이다(롬 5:1-10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과거의 범죄와 현재의 죄악 세력, 미래 심판의 불신 형벌에서 구원). 그런데 성령의 보혜사에 계속 불순종하면 성령은 근심하고(엡 4:30), 결국 떠난다(살전 5:19).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 8:9).
구원의 길; 율법 전체 행함(3)은 결국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짐이고(4) 믿음으로는 생명 길임. 나의 교회 생활은 속박당함? 자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