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22일 설교
“내쫓으라!”(갈 4:21-31 ‘육체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 22.5.22)
다섯 살 정도 된 미국 아이가 생후 처음으로 부모님과 함께 목장에 가서 양 떼를 보았단다. 그 아이가 양 한 마리를 손으로 만져보는 것은 첫 경험이었는데도 이렇게 말했단다. “Whoop, they make you out of blankets!”(“야아! 사람들이 담요로 너희들을 만들구나.”) 아이가 손으로 양 등을 만져보니까 집에 있는 담요와 똑같아서 한 말이었다. 그 아이가 하는 말을 듣고 목장에 구경 온 사람들이 말을 걸었다. “동생이 있니?” “아니요, 하지만 동생을 만드는 법을 나는 알아요.” “어떻게 만드는데?” “엄마가 빵을 많이 먹으면 몸이 뚱뚱해져서 동생이 만들어져요.” “그러면 동생을 원하니?” “아니요, 앞으로도 동생이 없을 거예요.” “어째서?” “엄마는 나를 귀찮아하니까요.”
그 다섯 살 아이가 너무 비상하다. 문제는 자기 아이를 귀찮아하는 부모님에게 있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자기인식이 빗나가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현대인은 산업문명의 혜택을 어마어마하게 누리고 살아가면서 그 대가로 인간성 상실과 자아 상실증에 걸리게 된다. 기계 생활이 사람의 인간미를 다 잡아먹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람과 기쁨, 감사를 잃고 불평불만을 하다가 공허 속에 고독해지고, 방황하는 인간이 된다. 그래서 미국은 고등학교까지 컴퓨터 교육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란을 하고 있단다. 컴퓨터에 빠져들면 부모나 친구와 보내는 시간이 줄어든다. 그 대신 가상현실에 익숙해짐으로 자꾸 현실을 꿈처럼 생각하려고 하여 실제 삶은 둔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과 자연을 서로 교감할 때 생기는 인간미와 동시에 창의성도 더디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컴퓨터를 대학에서 며칠 집중해서 배우면 되는 걸 일찍 배우게 해서 인간미를 상실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논쟁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 인간미의 중요성은 한이 없다. 농경사회의 아이들은 아버지 어머니와 할아버지 할머니, 형제들, 친척과 이웃집 아이들과 충분히 교제하면서 학교에 진학하여 가치관과 가정관, 국가관, 인생관, 세계관, 종교관과 함께 인성교육을 이루고 일생을 살아갔다.
오늘 설교 본문도 믿음의 본질을 갖추지 못하였기에 안타깝게 비참해지는 한 아이의 인생을 확연하게 부각시키고 있다(30 창 21:10-12를 종합적으로 인용한 말씀인데,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몸종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는 사라의 요청을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하셨다는 것이다. 이스마엘 추방사건은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할 당시 2100여 년 전 일이었다. 그런데도 바울은 현재 시제로 하여 성경이 지금도 말하는 것으로 기록하였다(27 ἀλλὰ τί λέγει ἡ γραφή; 알라 티 레게이 헤 그라페 “But what does the Scripture say?” -NIV-)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없이 육체대로 태어난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태어난 이삭과 함께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수 없음이 명백한 하나님의 뜻(γὰρ because)이라고 밝히려는 바울의 의도였다. 믿음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언약 실현이 그만큼 막중하다는 것이다.
창세기 15, 16, 17장에 보면 아브람은 하나님의 언약을 올바로 알지 못하여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았다가 하나님께 취소당하였고, 또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없이 육체대로 태어난 이스마엘을 자신의 상속자로 삼으려 하였다.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호소하였다. 이러한 모순은 지금도 흔하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거절하신다(“내 언약은 ... 사라가 낳은 이삭과 세우리라.”<창 17:21>) 그렇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혈통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예수님의 대속제물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된다. 바로 이것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증언하는 골자로 삼았다.
어느 술주정뱅이는 하루라도 멀쩡한 정신으로 보내는 적이 없어서, 날마다 온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 술꾼은 두 아들을 두었다. 두 아들은 아버지의 술주정을 보면서 자랐다. 이제 두 아들이 청년으로 자랐을 때 큰아들은 아버지와 똑같이 술주정뱅이가 되었고, 어머니가 꾸짖으면 이렇게 대꾸했다.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게 아버지의 술주정밖에 없잖아요. 내가 이 모양이 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동생은 모범적인 착실한 청년이었다. 동생은 자기 형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형제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술주정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형님은 아버지의 술주정을 볼 때마다 각오하지 않았고, 저는 뼈에 새기고 실행하였습니다. 그러니 현재의 우리 형제는 당연한 모습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꿈을 가질 수 있다. 꿈이 가난한 사람은 인생의 거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그리스도인을 꿈꿔보자.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자신도 좋아하는 삶에 가치와 의미를 두고 살아보자.
사도 바울이 전도했던 갈라디아 교회들은 꿈이 확실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해 쉽게 속아 넘어갔다. 저와 여러분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자 그러면 신앙 삶을 속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설교 본문을 함께 보면서 그 답을 찾아 챙기자.
1) 말하라(21 Λέγετέ μοι, οἱ ὑπὸ νόμον θέλοντες εἶναι, 네게테 모이 호이 휘포 노몬 쎄론테스 에이나이
‘있는 것을 원하고 있다’ 현재 명령형으로 ‘너희들은 반복하여 말하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오,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신 30:20>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의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신 5:1> 생명이 되고 장수할 규례들과 법도들을 계속 말해보라는 것!)
바울은 유대 율법주의에 속아 넘어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여러 가지로 교훈하고 책망하며 호소도 하다가 이제 논증한다. 바울이 21절에서 말한 의미는 이렇다. ‘너희는 율법의 통제 아래에서 의롭다 함을 바라는데 정작 율법의 기능을 똑똑히 살펴보라.’ 너희가 율법을 따를 때 근거(할례, 행위들)가 남기 때문에 성취한 것 같고 차별화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다. 율법을 올바로 안다면 율법 아래에 있으려고 하지 않는다(3:24-25). 의롭다 하심은 화목제물을 믿을 때이다(“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롬 3:25-26). 분명한 것은 유대인 사회에서 율법신앙 생활은 ‘넓은 길’이지 ‘좁은 길’은 아니다.
2) 두 아들(22)
바울은 이스마엘과 이삭의 의미를 논증하였다. 하나님은 하란에서 아브람에게 큰 민족을 약속하셨고, 아브람의 양자를 취소시킬 때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5-6)하셨다. 그런데 아브람의 부인 사래가 임신할 수 없는 연세가 되도록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사라의 제안으로 몸종 하갈을 ‘대리모’로 하여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마엘 출생 후 13년 동안 아브람을 만나주시지 않았다. 그러고 아브라함이 99세 때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찾아오셔서 이름을 ‘아브라함’과 ‘사라’로 고치시고 아들 ‘이삭’을 언약하셨다. 그들은 이 언약을 듣고 자신들의 나이(99세, 89세)를 생각하며 웃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사라가 이삭을 낳게 하셨다. 그래서 이삭은 하나님 언약의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과 이삭의 출생이 가지고 있는 심오한 신앙적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할 때 믿음 생활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은 진짜 후손과 가짜 후손을 의미한다. 진짜는 언약의 아들 이삭이고, 가짜는 인간적인 육체의 아들 이스마엘이다. 둘 다 친아버지는 아브라함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머니 때문에 둘 사이에 막중한 차이를 두었다. 본문 22절에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라고 하였다. 이스마엘의 어머니 하갈은 사라의 몸종이었다. 그렇지만 이삭의 어머니 사라는 자유하는 여자로서 아브라함의 아내였고, 이 세상의 현실에 상관없이 언약한 미래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본문 23절에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였다. 새번역은 ‘자유있는 여자’를 ‘본처’(22, 23, 30)라고 번역하였는데, 본처는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상속자임을 강조한 번역이다. 바울이 두 여인을 이렇게 비유하여 논증한 이유는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이삭이라고 밝히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언약법칙에 맞게 상속이 이루어지는 믿음 생활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멘.
3) 박해(29)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했던 것처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언약의 자녀인 그리스도인들은 계속 박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박해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유업도 있다. 그런데 31절에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라고 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이렇게 선언한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여종의 자녀가 아니다. 그런데 왜 여종 하갈의 자녀가 되려고 하느냐? 왜 다시 율법 통제로 돌아가 종이 되려고 합니까? 지금 여러분은 가짜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때 내쫓김을 당하게 될 것이다.’ 가짜들에게 속지 말고 성경을 똑바로 보고 확인하라는 것이다. 27절을 보자. 언약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적으로 불편한 고난과 함께 살아가면서 언약의 미래를 소망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시대나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현실보다 언약의 미래에 소망을 두고 하루하루 기도하고 찬송하며 승리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로마서 8:17-18 말씀이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실체이다.
자 이제 오늘 설교 말씀이 가리키는 신호등을 확인하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가나안으로 이사 간 자유 신앙인이었다. 자유 신앙인은 아브라함처럼 약속된 미래를 바라보고 약속된 미래 때문에 이 세상의 현실에서 고난과 박해에 저항하고 이겨내며 좁은 길을 가는 신앙인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