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15일 설교

“나와 같이 되라!”(갈 4:12-20 ‘변함없는 믿음’ 22.5.15)

새벽에 쓰레기봉투를 수거하던 차량의 미화원이 신고함으로 대한민국을 경악시킨 ‘부모님 토막 살인 사건’이 알려지게 됐다. 2000년 5월 21일 과천에서 발생했는데,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발생한 부모님 토막살해 사건이었다. 토막난 시신에 묻어있던 지문으로 범인을 찾아냈는데, 이름은 이은석, 당시 고려대 2학년 재학 중에 군 복무를 마치고 아직 복학하지 않은 처지였다. 범인의 아버지는 해군사관학교 출신 장교였고 어머니는 명문여대 출신이었기에 아무래도 평온한 중류층가정으로 보였다. 범인은 학업 성적이 우수해 서울대도 가능했는데, 당시 서울대는 정규입시제뿐이었고, 고려대는 수능 점수만으로 뽑는 특차 입학제도를 도입했기에 특차로 무난히 고려대에 합격하였다고 한다.

놀라운 일은 범인이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데, 충격적인 사실은 ‘신앙적으로 열심히!’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범인의 아버지는 군인답게 원리원칙주의자였고, 그의 어머니 역시 자식을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쳤다고 한다. 그래서 범인은 일기를 아주 꼼꼼하게 쓰는 습관을 지녔는데, 자기 부모님이 자기를 학대하였던 사실도 조목조목 적어놓았고, 어릴 때 부모님께 혼난 후에 무릎을 꿇고 회개 기도한 일, 무릎 꿇고 성경을 낭독한 일도 종종 있었다. 그렇지만 범인은 부모님께 교육을 철저히 받으면 받을수록 성장하면서 마음속에 증오심을 키우게 됐단다.

형사들이 범인에게 “부모님이 어디 계신지 아세요?”라고 물었더니 “두 분이 주일에 함께 교회에 가신 이후로 소식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범인의 얼굴은 걱정하는 표정도 아니었고 목소리도 차분했단다. “아버님의 시신이 발견됐어요.”라고 형사가 말해줘도 범인은 “어디서? 어떻게? 어머니는?” 당연한 질문도 하지 않더란다. 경찰서 진술 때 범인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미안하다’라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을까요?”라고 하면서 울먹였다고 하고, 범인의 친형은 형사의 설명을 다 듣고 고개를 숙이더니 “동생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다 제 잘못입니다. 동생과 함께 죗값을 갚으며 살게요.”라고 자책했단다. 범인은 부모님에게 노상 “네가 잘하는 게 뭐냐? 공부나 해라. 공부도 못하면 사회에서 낙오한다.” “너 같은 놈은 사회생활 못한다.” “너 같은 자식 필요 없다.”라는 말로 상처를 받았단다. 그래서 범인은 부모님에 대한 분노지수가 높아질수록 폭력 영화를 많이 봤다고 한다. 그러므로 판사는 범인의 부모님 토막살해를 어머니에 대한 살해는 ‘분노 폭발성 비이성적 살인’, 아버지에 대한 살해는 ‘이성적 판단에 의한 살인’으로 판결하고 무기형을 선고했다고 한다.

오늘 설교 본문도 유대 율법주의 신앙교육의 피해를 애태우고 있는 바울을 잘 보게 한다. 율법주의 신앙생활의 열심히 할수록 그 열매는 이간과 분열, 증오, 사망이다. 왜냐하면, 유대 율법주의 신앙 삶은 사랑의 변질이고, 은혜의 타락이며, 자율이 사망한 신앙생활이기 때문이다. 설교 본문 15절 16절을 함께 보자(ποῦ οὖν ὁ μακαρισμὸς ὑμῶν; μαρτυρῶ γὰρ ὑμῖν 푸 운<그러므로, 그렇다면, 이제는> 호 마카리모스<happiness 행복, 기쁨, 바울의 복음설교 반응> 휘몬; 마르튀로 가르 휘민 “What then was the blessing you enjyed ? For I bear you witness” -NKJV- “너희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는 이 말씀은 그들이, 얼마나 기뻐했고 애정 넘치는 반응을 보였는지 그 그림이 그려짐).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이 십자가의 복음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바울의 복음설교를 듣고 그토록 기뻐하고 사랑하던 십자가의 예수님을 등지려는 셈이었다. 이것은 성령의 보혜사 되심을 거역함도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갈 3:1-3에서 이렇게 지적하였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또 설교 본문 15절에서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사람의 신체 중에 눈은 얼마나 요긴한지 다 안다. 그런데 그만큼 중요한 눈인데도 뽑아주려고 했을 정도라면 바울의 복음설교를 듣고 구원의 생명길을 확신하였고 그렇게나 기뻐했음을 입증한다. 이것은 갈라디아 교회의 복이었다.

요즘 한국교회에서 믿음의 척도 중 중요시하는 하나는 주일예배와 십일조라고 할 수 있다. 장로나 안수집사, 권사의 선출에도 중요한 기준이다. 그런데 주일예배 드리기와 십일조는 예수님의 십자가 증인이 아니래도 가능한 일이다. 믿음의 열매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를 유지하고 성장시키는데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 눅 11:42에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 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고 하셨다.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만 하면 된다.”가 아니다. 공의와 사랑이 빠진 십일조는 바리새인 짓이라고 혼내셨다. 아멘.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따르는 신앙 삶에서 돌아선 교인들이 바로 갈라디아 교회에서 생겨났다.

자 그러면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신앙 삶의 변질을 예방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본문에서 찾아보자.

1) 복음의 내용(13-14)

갈라디아 교회들이 바울을 처음 보았을 때 그의 건강상태는 보는 사람을 낙심시킬 만큼 시험거리였고, 바울 자신도 시인하는 바였다. 그런데도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의 약점을 전혀 탓하지 않았고 오히려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처럼 대하면서 존경하고 소중히 아꼈다. 이것은 바울의 인간적인 외모보다 바울이 증언한 복음 진리에 대한 응답이었다. 이것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 교회의 진면목이다.

‘설교자의 외모를 보느냐, 아니면 설교자가 증언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느냐’는 하나님의 자녀 삶에서 참으로 막중하다. 지금 당장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싶은 그리스도인은 설교자라는 사람을 보지 않고 설교자가 증언하는 복음을 보려고 하는 법이다. 그러나 설교자를 통하여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편해 볼까를 얻고자 한다면 설교자의 외모를 보는 법이다. 오늘날 교회에는 솔직히 목사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보다 자신이 바라는 바를 어느 정도 해결해 줄 수 있는지 그것을 보는 교인이 많다. 이것은 사실상 그리스도인과 교인을 구별시키는 특성이기도 하다. 목사님도 복음 증언이 아니라 두어 움큼의 보리를 위하여 교회를 찾기도 한다. 그런 목사는 교인들이 싫어하는 부분은 그냥 피해 가면서 지금의 믿음생활을 칭찬해주고 고집을 열심이라고 독려하는 설교를 한다. 교인들의 앙금진 죄악들을 떠오르게 하는 설교보다 오히려 자기 습관대로 신앙생활 하게 한다. 그것은 유유상종(類類相從)이다. 저와 여러분은 믿음의 진보가 이루어지는 신앙생활에 초점을 맞추길 축복한다. 아멘.

2) 열심(17-18)

“그들이 너희에게” ‘거짓 싻꾼들이 갈라디아 교회들에게’라는 뜻이다. 싻꾼들은 유대 율법주의를 열심히 행하라고 선동하였다. 그것은 ‘이간질’이었다.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에서 전도할 때,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율법과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속제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고,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 믿으며 기뻐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싻꾼의 선동에 열심을 내는 것은 복음을 배반하는 열심이니 구원이 없는 열심히라서 좋은 것이 아닌지라 바울은 몹시 괴로워하였다. 그토록 애써 가꾸어 놓은 복음 전도가 한순간에 무너져갔기 때문이었다. 최초의 이간질은 에덴동산에서 있었다. 뱀이 하와를 이간질하였는데, 하와를 편 가르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끊어지게 하여 사탄의 종으로 삼는 짓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잘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말로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하지만 결국 ‘자신의 제자로 만드는’ 엉터리 열심이 있고 또 올바른 열심이 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저와 여러분은 바울처럼 하나님의 열심에 충성하길 축복한다. 아멘.

3) 그리스도의 형상(19-20)

바울은 오로지 갈라디아 교회에 그리스도의 형상(μορφωθῇ Χριστὸς ἐν ὑμῖν 모르포쎄 크리스토스 엔 휘민 “Christ is formed in you” -NKJV-)을 이루기까지 다시 해산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다고 처방했다. “해산”은 어머니들만 겪는 출산고통이다. 그러니 싻꾼들과 선명한 대조이다. 그리스도인은 속사람이 예수님을 닮아 가야 한다. 고전 4:15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라고 하였다. 한 생명을 전도할 때 가슴에 품고 기도하며 애쓰는 고충과 아픔, 지속 관심은 해산의 수고이다. 맞다. 생각이나 말과 행위가 점점 예수님을 닮아 가게 하는 것! 이러한 분위기가 살아있어서 해산의 수고를 하는 목자가 있는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법이다. 해산의 수고는 예수님을 닮은 자의 성숙한 헌신이요, 목회 최고(最苦)의 십자가이다. 좋은 교회 좋은 목사님이라면 망가지고 파손되어 허물 많은 죄인에게 해산하는 수고로 예수님 십자가의 도를 증언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시켜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한다. 요 16:21에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해산의 수고는 하나님의 사랑, 믿음, 소망으로 인도함이다.

자 이제 갈라디아 교회들을 다시 보자. 그들은 바울에게 처음 복음을 들을 때, 충분히 하나님의 종을 의심할 만큼 바울이 허약했는데도 그를 업신여기거나 멀리하지 않았고, 도리어 예수님께 하듯 바울을 존중하고 따랐다. 그토록 메신저보다 메세지에 집중한 셈이다. 공자의 제자인 민자건의 어머니가 일찍 죽자 그 부친은 후처를 얻어 아들을 낳았다. 계모는 민자건에게는 갈대 속옷을 입히고, 자신이 난 아들에게는 목화 속옷을 입혔다. 어느 날, 민자건이 그의 부친과 함께 수레를 몰았는데 세찬 바람에 민자건이 말고삐를 놓치고 겉옷이 벗겨져 갈대 속옷이 드러나자, 그것을 알아차리고 아버지는 크게 화를 내며 계모를 쫓아내려 하였다. 그러자 민자건이 “계모가 계시면 한 아들만 춥지만, 계모가 나가시면 세 아들 모두 추워집니다.”하고 아버지를 말리자, 계모가 그 자신의 편애를 뉘우쳤고, 그래서 가정이 화목해졌다고 한다. 이처럼 불신자도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하면서 고난을 감당하자 선한 마음가짐으로 고쳐진 계모와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평범한 종교인이 아니라 생명을 출생하는 그리스도인이기를 축복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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