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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1일 설교

“아들이냐? 종이냐?”(갈 4:1-7 ‘하나님 유업의 법칙’ 22.5.1)

방송인들에게 생방송과 녹화방송 중에 어느 것을 더 좋아하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생방송이 좋다’라고 대답한단다. 얼핏 생각하면 실수하는 부담 때문에 생방송을 훨씬 더 힘들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녹화방송을 할 때 실제로 더 많은 실수를 한단다. 녹화방송을 하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느슨해지고 ‘혹시 잘못하면 다시 하면 되지’라는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렇지만 생방송을 하게 되면 엉터리 실수라도 그대로 진행하기 때문에 철저한 준비와 마음집중으로 머리의 회전이나 신체 반응이 굉장히 민감해지는 것을 본인 스스로 실감하게 된단다. 인생은 녹화하여 재방송할 수 없는 데 있다. 인생은 항상 생방송이라 한번 지나가면 그만인데, 인생을 마치 녹화방송인양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쉽게 한다.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서양속담에 “시간은 쏜 화살처럼 빨리 날아간다.”라고 했고, 우리 선조는 “세월유수”(歲月流水)라고 하였다. 핵심은 세월을 되돌릴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다. 하루하루 현재형이다. 그래서 ‘내일부터 잘하자’라는 게으름은 철없는 어리석음이요 악함이다. ‘지금’ ‘이 일’을 못해냄이요 낭비함이며 무능함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어진 시간, 그 자리에서, 그 일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하지 않는다면 알차고 유능한 인생은 멀어지게 된다.

설교 본문 2절에 보면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ἄχρι τῆς προθεσμίας τοῦ πατρός. 아크리 테스 프로쎄스미아스 투 파트로스 “until the date set by the father.” -RSV- προθεσμίας 법적, 정치적, 재정적으로 계약 완수할 것을 미리 정해놓은 기한. 로마 시대의 미성년자는 관습법상 14세까지 그의 부친이 지정한 후견인의 통제 아래 있었고, 재산은 25세까지 청지기가 대신 관리했다고 함. 이러한 배경 속에서 바울은 믿음 생활을 설명하면서, 설교 본문 1-2절에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라고 밝혔음. “유업을 이을 자”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의미하는데,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신앙의 진보가 늦고 믿음 수준이 어려서 아직도 ‘유업이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믿음 생활임!)라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은 갑자기 일을 시작하시지 않고 자기 시간표를 가지고 하신다. 물론 인간이 보기에 갑자기 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모든 일을 계획대로 정확하게 점진적인 계시(Progressive Revelation)의 방법으로 차근차근 이루어가신다. 하나님은 인류 역사라는 각종 종교의 세속사(世俗史)를 살아가고 있는 죄인의 나라에 예수님을 보내어 대속 제물로 희생하게 하시고 그 대속 제물을 믿는 사람에게만 구속사(救贖史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결국 영생 복락 하게 될 천국 으로 인도하심)를 시작하신다. 이 ‘구속사’의 시작을 ‘예수님을 믿는다’ ‘교회에 다닌다’ ‘구원받았다’ ‘아브람이 가나안 삶을 시작하였다’ ‘출애굽’ 등등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경우에 그대로 순종하겠는지 자문자답해보자.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는 어부다.” 이제껏 어부로 살아왔는데 갑자기 사람을 낚는 전도자로 직업을 바꾸라고 하면 두말없이 받아들이겠는가? 베드로는 이것저것 따져 묻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직업을 바꿨지요. 그 결과 천국열쇠를 받고 사도행전의 빛나는 사도가 되었다. 또 “3층 방주를 길이 33m, 폭 22m, 높이 13m로 지으라.” 누구나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엄청난 방주였다. 그런데 노아는 무려 120년 걸려서 방주를 짓더니, 하나님의 홍수심판 때 온 가족까지 구원받았다. “내가 일러준 한 산(“one of the mountains” -NIV-) 거기서 네 외아들을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은 무작정 장작을 짊어지고 외아들과 함께 3일 동안 그 산 쪽으로 걸어가 번제를 드렸다. 그래서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하나님께 인정받고 “범사에 복을 받았다.”라고 하였다. “13만 5천 명이 침략했을 때 병사 300명을 뽑아 싸우라.” 450:1인데 어떻게 이겨낸단 말인가? 그런데도 기드온은 병사 300명을 데리고 135,000과 싸워서 참으로 희한하게 압승하였다. 이렇게 기적 같은 하나님 축복의 몫을 받아 누린 믿음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 공통점은 하나님 말씀에 ‘아멘!’ 하였지 ‘아니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언약에, 계획에 동참함이 비결이었다. 이러한 동참을 챙기는 것이 성경을 쓰는 것보다 백번 더 낫다. 아멘!

자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에 다니는데 “유업” 즉 하나님의 자녀가 받아 누려야 할 축복의 몫을 보류당하는 그 안타까운 신앙생활을 벗어나려면 어떻게 믿음생활을 하면 되는지 살펴보자.

1) 아들의 명분(5)

“아들의 명분”(υἱοθεσίαν 휘오쎄시안 ‘아들로 삼음’ ‘양자 됨’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서 완전히 벗어나 당당한 아들의 지위에 오름<“that we might receive the full rights of sons.” -NIV-. ‘아들의 명분’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지위와 동등해짐이다. 우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처럼 어마어마한 일에 선정된 것이다. 아멘! 할렐루야!

‘뜨겁게 기도한다.’ ‘기도 중에 깊이 들어갔다’라는 말을 한다. 그렇다면 ‘얕은 기도’도 있기 마련인데, ‘기도의 깊이’는 어떻게 정해질까? 기도를 끝내는 시간인가? 기도문장이 시적인가? 고함치며 빠르게 하는 기도? 목이 쉰 변성으로 하는 기도? 방언기도? 성경구절을 인용하는 기도일까? 그런데 성경이 보여주는 능력기도는 기도시간이나 기도자세, 목소리, 성경지식이 아니다. 이러한 방법은 오히려 기도를 위선으로 변질시키고 점점 더 하나님과 상관없게 한다고 바리새인들을 통하여 지적해 준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중요시한다고 사무엘이 말했다(삼상 16:7). 야고보는 믿음으로 기도하라고 했다(약 1:6-8). 예수님은 받은 줄로 믿고 기도하라고 했다(막 11:24). 그렇다면 구태여 ‘깊은 기도’라는 말로 표현한다면 ‘하나님과 공명(共鳴)하는 중심’으로 대화하는 기도이리라. 공명이란 하나의 울림이 다른 하나를 같은 파장으로 울게 하는 동화(同化, 연합하여 닮음)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친히 교감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는 말을 내뱉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탄원을 알아차리신다. 그러므로 기도자는 기도하기도 전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하나님과 마음이 소통하는 아들로서 기도를 시작하기 때문에 확신과 존경과 감사가 충만하기 마련이다. 아들 확신을!

2) 아들의 영(6)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과 진정으로 친밀한 부자 관계임을 밝히려는 말씀이다. “그 아들의 영”은 성령님을 가리킨다. 요 14:26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사도 바울도 롬 8:26-27에 밝혀놓았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제 율법이라는 “초등교사”와 헤어졌고 “초등학문”(τὰ στοιχεῖα τοῦ κόσμου 타 스토이키이아 투 쿠스무 “the elements of the world” -NKJV- <수학의 + - X ÷>)의 수준도 벗어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인을 말하는데, 하나님의 아들 된 상속권자이다. 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대변화요 특권이며 은혜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지위는 우리의 행함이나 자질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본래부터 저주 아래 있는 죄인 신분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얻었을 때와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 하고 있을 때를 비교해보면 하나님의 독생자를 보내주시고 대신 저주받아 죽게 하시고 그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셨으니 감사찬양 하는 삶은 당연하다. 그 감사찬양은 예배일 수 있고, 헌신이며, 전도되게 빛과 소금, 예수님의 편지로 살아는 삶이다.

3) 유업(7)

“유업을 받을 자”(κληρονόμος 클레로노모스 ‘종노릇’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하나님이 몫 지어 놓은 축복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유업을 받을 자”(κληρονόμος)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자란 것이 아니다. 어렸을 동안에는 초등교사와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서 종노릇하며 살았다. 그래서 “유업을 받을 자”(κληρονόμος)는 초등교사와 초등학문의 종으로 살아왔던 그 시절을 벗어나야 해당한다(ἀλλὰ υἱός 강조.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방식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교인이 살아가는 방식은 서로 너무나 다름). 그런데도 외모상으로 구분하기란 어렵다. 주일이면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헌금도 하며, 찬송하는 것은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과 아들이 아닌 교인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성령의 감동감화에 순종함에 따른 가치관 차이인 것이다.

교회에 다닌 사람은 대부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일은 교회풍속에 익숙해져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자신이 하나님과 자녀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시인하는 일을 즐기면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답게 살아간다. 그러고 성령님이 근심하다 떠나지 않게 하려고 순종하여 정의를 실행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겸손히 임마누엘을 생활화한다. 바로 이 사람이 유업을 받을 자이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며 예수를 잘 믿는 것이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 말씀 중에 밝혀진 올바른 하나님의 자녀 삶을 다시 확인해 보자. 마치 주인에게 철저히 지배당하는 종처럼 신앙생활 하는 교인이 있는데 그게 율법주의자이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들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하나님의 아들 된 평안함과 기쁨을 누리지 못한 교인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율법준수에 믿음 중심을 둔 탓이다. 그래서 믿음 중심이 한없이 중요하다. 우리가 신앙 생활할 때 중요시할 일의 하나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분명히 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주인님으로 자신은 노예로 생각하는 교인과, 하나님을 아버지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확신하는 그리스도인은 그 믿음생활이 여러 가지로 차별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성소의 휘장을 찢어놓았는데 그것을 다시 꿰매고 지성소를 금기시한다면 얼마나 불편하고 답답해지겠는가? 올바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이루신 그 가치와 자유와 기쁨을 제대로 누리는 믿음생활을 해 간다.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 십자가의 몫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이기를 축복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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