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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24일 설교

“믿음이 온 후!” (갈 3:23-29 ‘믿음생활의 정도’ 22.4.24)

강은교(姜恩喬 1945~) 여류시인이 곧 졸업할 여고생들에게 당부하는 편지를 오래전에 썼다. “모든 거리에서 우리는 당분간 신참자 노릇을 즐겼다. 처음 들어가 보는 다방에서 우리는 향기로우면서도 씁쓸한 커피의 맛을 훔쳤고, 주위를 살펴보는 일 없이 당당한 모습으로 극장에도 들어가 보았고, 시험 걱정도 없이 컴컴한 음악실에 앉아서 귀를 열어보았고, 머리를 지졌고, 구두도 맞춰 신어 보았다. 구두마저 우리를 신참자로서 맞아주어, 아프게 병을 치룬 후에야 받아들이는 것을 경험하였다. 처음엔 이 모든 것에서 광활한 자유의 맛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아... 이 자유로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곧 알아야 했다. 울타리 없는 자유는 이미 자유가 아니며 오히려 구속이며 실패며 서러움이라는 것을 남몰래 가만가만히 중얼거려야 하는 것이었다.”

강은교 시인은 자유의 실체를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진정한 자유엔 울타리가 있는 법이다. 울타리가 없는 자유라면 오히려 방임이나 실패를 위장한 것이다. 사람들은 ‘밖’은 자유로운데 ‘안’은 억압받는 곳으로 상반되게 생각하기 쉽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는 말도 무엇인가에 얽매인 상태로 착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 설교 본문에 나오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씀을 우선 성경 본문의 맥락에 맞게 생각해 보는 것은 올바로 살아가려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굉장히 중요하고 필요하다. 원래 고대 헬라에는 ‘폴리스’(πολις an enclosed and walled town)라는 도시들이 있었는데, 이 폴리스는 5,000명 정도의 인구가 살아가는 작은 도시국가의 형태로 자유시민의 공동체였다. 그러므로 고대 헬라에서 자유라는 말은 처음부터 ‘~안에서’(an enclosed and walled town)라는 개념을 가지고 노예와 상반된 시민임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자유는 어떤 곳에서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하는 방종함이나 개인주의가 아니고 오히려 어느 곳에 들어가 소속해서 안전과 자율을 누리는 삶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서신 성경에 169번이나 즐겨 애용한 것으로 나타난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는 말을 세 가지의 의미로 설교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①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의 변화를 만들어주는 곳이다(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② “그리스도 예수 안”은 하나님의 백성인 신앙공동체이다(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③ “그리스도 예수 안”은 예수님을 알고 닮아 가는 모임이다(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을 바울은 로마서 13장 14절에 설명해 놓았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구체적으로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믿음생활을 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약방의 감초처럼 믿음을 강조한다. 그런데 믿음의 실체에 대한 오해도 만만치 않다. 특히 야고보 2장 17절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이 말씀을 착각한다. 야고보서의 “행함”은 하나님의 긍휼을 실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헐벗고 굶주린 형제, 자매에게 인간적 동정보다 죄인을 불쌍히 여기고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긍휼을 실천할 때 ‘행함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는 행함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루어진 순종이었다(21). 이삭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하나님은 이삭을 대신할 수양을 준비하셨지요. 따라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번제에서 드러난 아브라함의 믿음은 대신 수양을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 사건에 동참하는 일이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믿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일이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인 것이다.

기생 라합이 정탐꾼들을 도와준 것(25)도 인간적인 동정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것을 확신하는 행위였다. 여호수아 2장 8절 -12절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이런 모습을 보면 야고보서가 말한 ‘행함’은 ‘하나님의 긍휼을 실행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야고보서의 말씀으로 무조건 “행함”만 강조하는 것은 믿음 아닌 동정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자 그러면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고 표현하는 그 믿음생활을 좀 더 살펴보면서 우리의 믿음 삶과 비교해 보자.

1) 초등교사(24)

여기 “초등교사”(παιδαγωγος 파이다고고스 교육학에서는 ‘가르치는 종’으로 번역함, 아이를 학교에 데리고 가고 데리고 오면서 아이의 행동을 통제하고 가르치기도 하는 일을 맡은 종). 어린아이들이 초등교사의 통제 아래 있는 것처럼 불신자는 율법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율법은 불신자를 예수님께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율법은 인간이 항상 율법을 어기면서 살아가는 범법자를 알아차리게 하고, 또 하나님의 율법을 다 실행할 수도 없음을 실감하게 함으로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도 깨우쳐준다. 그래서 율법의 불순종자는 예수님을 찾아 나아가게 된다. 이 사실을 23절이 요약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율법 아래서 죄인은 율법을 완수함으로 받는 구원이 불가능하니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제물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놀라운 신분의 변화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은 어떤 곳인가? 로마서 8장 1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하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는 성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새 생명의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올바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자신을 새 생명 안으로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으로 반응하는 삶을 살아간다. 아멘.

2) 세례(27 ὅσοι γὰρ εἰς Χριστὸν ἐβαπτίσθητε 호소이 가르 에이스 크리스톤 에밥티스쎄테

for all of you who were baptized into Christ, Aor pass ‘성령의 보혜사 되심’)

“합하기 위하여”(εἰς 에이스 ∼안으로 into = 그리스도와 연합, 단순히 외형적인 의식보다 그리스도의 새 생명, 세계, 통치와 연합함으로 삶의 변화를 일으킴<‘그리스도 예수의 사람’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 5:24>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눅 12:49-51, 53 불은 태우고 태우는 시간과 압력에 따라 재나 숯, 석탄, 화강암을 남김) 설교 본문 28절에도 보면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고 했다(헬라인을 개새끼 취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올바로 들어가면 완전히 화강암처럼 변화되고 개새끼나 종놈과도 인격적으로 하나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덜 들어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차별을 즐기면서 내가 너보다 더 축복받고 은혜받았다고 과시한다. 그래서 성경읽기, 쓰기, 기도 오래 하기, 40일금식 기도하기... 자랑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다 초등교사 시절이다.

3) 유업(29 κληρονόμοι 클레로노모이 κληρονόμος의 복수형, 상속자들,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축복에 참여할 자들’ “이는 갓 자손의 기업으로 그들의 가족대로 받은 성읍들과 주변 마을들이니라.”<נַחֲלַת 나할라 ‘이스라엘의 각 지파가 차지한 가나안 땅의 몫’ 수 13:28>)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복은 세 가지였는데, 땅과 자손번성, 통치보호였지요. 구체적으로 땅은 가나안 땅이고, 자손번성은 유대민족이며, 그리고 통치보호는 이스라엘이라는 신정국가로 이루셨다. 믿음의 세계에서 ‘가나안’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파된 곳’이고, ‘자손번성’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동체인 교회’이며, ‘통치보호’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으로 성도마다 성령께서 보혜사로 역사하시는 진정한 성도의 삶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니지만, 신앙적으로 아브라함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그 유업을 상속하게 된 것이다.

이 이치를 이런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 한 흑인이 부잣집에서 종으로 살아가 있게 되었다. 주인은 그 흑인을 불쌍히 여겨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충분한 생활비를 주며 고국으로 떠나 가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흑인은 감격하여 이렇게 호소하였다. “저에게 자유를 주시는 주인님의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차라리 저는 죽을 때까지 주인님 곁에서 이 은혜를 갚으며 주인님을 도와드리고 사는 게 저의 소원이니 저를 받아주십시오.” 이 흑인은 이제 얽매인 종이 아니라 ‘자유롭고 자발적인 섬김이’가 된 것이지요. 새롭게 얻은 천금 같은 자유를 다시 주인을 위하여 사용하며 살아가는 청지기이다.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은 상대 가치가 아니라 절대가치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의 가르침을 거울삼아 우리 자신을 비춰보자. 우리는 하나같이 하나님께 용서받은 죄인들이다. 그래서 하나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초로 공동소망을 가지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될 수 있다. 물론 정당한 경쟁은 생기겠지만, 그것이 지나쳐 이기심이면 안 된다. 우리가 서로 비난하는 대신 용서하고, 서로 저주하는 대신 축복하며, 서로 상처를 건드리는 대신 감싸주고, 서로 낙심케 하는 대신 격려할 때 진정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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