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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17일 설교

“약속을 믿는 자들!”(갈 3:15-22 ‘언약의 믿음’ 22.4.17)

동아프리카의 내륙에 위치한 우간다의 전 대통령인 이디 아민은 군인 출신 정치인인데 1971년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에 올랐다. 그는 독재자였고 온 국민이 꽤 오랫동안 무자비한 고생을 당했다. 당시에 아민 대통령을 반대하는 자는 대부분 죽어 나갔다. 그런데 1973년 우간다에서 가장 큰 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던 키파 샘판디라는 목사님이 있었는데, 암살단이 부활절 아침에 키파 샘판디 목사님에게 쳐들어와서 목사님에게 총을 들이댔단다. 그런데도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그렇게 하시죠. 뭐... 하지만 내가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그다음에 죽이세요.” 암살단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니 그렇게 하라고 허락해 주었다. 목사님은 조용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셨던 기도를 그대로 하였다.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이들의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아멘.” 이렇게 기도를 마쳤더니, 암살하려던 사람들이 뜻밖에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주시니 고맙습니다.”하고 그냥 가더란다. 샘판디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을 하더란다. “지금 당장 죽는 순간이었지만 저는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왜냐고요? 부활절 아침이었잖아요. 저는 예수님의 부활을 설교하려는 참이었고 그래서 부활신앙으로 충만해 있는 시간이라 죽음도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데 조금도 거리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설교와 일상 삶의 일치가 하나님께 통하였다는 실례였다.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은 성경 쓰기나 암송보다 더욱 크게 보시는 게 성경 말씀의 생활화라는 것이다. 아멘.

오늘 설교 본문도 하나님의 언약 실현을 막중하게 강조하고 있다(17 하나님이 아브람과 맺은 언약은 성취만 있을 뿐 아무런 변덕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논증하고 있음).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라고 하였는데, 아브람의 언약과 모세의 율법 그리고 언약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그 기간은 무려 2천백여 년이 된다. 그리고 우리가 이 말씀을 읽는 오늘을 기준으로 하면 무려 4천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러니 우리가 설교 본문을 올바로 파악하는 일은 정말 아슬아슬하다. 오로지 성령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권능을 힘입어 알아차리기를 사모하면서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분문을 묵상해볼 수밖에 없다.

조심스럽게 성령의 조명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언약은 그 내용의 변경도 폐지도 절대로 할 수 없으며 성취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약을 자주 하셨다. 창 3:15에 아담이 선악과 범죄하였을 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마리아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사탄을 완패시킨다는 언약이다. 또 창 12:1-3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고 언약하셨다. 이 언약을 이삭에게도 반복하셨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 26:4) 그리고 야곱에게도 하셨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창 28:14).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하신 ‘복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기획이라고 바울은 14절에 밝혀놓았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아브람과 약속한 지 430년 후에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으로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감히 하나님의 언약을 수정하였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이 이렇게 질타하셨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8) 베드로도 경고했지요.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인도자 모세를 따라 출애굽하여 광야생활 40년을 마치고 가나안 입구에 도착하였을 때, 모세가 “여호와께서 언약하신 대로 올라가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신 1:21)라고 설교하였더니, 이스라엘 백성은 ‘정탐꾼을 미리 보내 조사한 후에 그 정보에 따른 전략으로 침입하자.’라고 제안하였다. 물론 모세도 좋은 의견으로 보여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는데,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는 바는 아니었다. 실상은 이스라엘 백성의 심리에 잠복해 있던 불신앙을 전술이론으로 포장한 제안이었다.

결과적으로 정탐꾼의 보고는 이스라엘의 공포심과 불신앙을 폭발시켰다. 잠복성 불신앙이 메뚜기 사고방식과 혼합하였기 때문이었다. ‘메뚜기 사고방식’을 아는가? 문제는 크게 자신은 작게 보임으로, 하나님의 언약도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불신하게 하는 게 바로 메뚜기 사고방식이다. 믿음이 흔들리고 불신에 사로잡혀 패배의식에 시달리고 자포자기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언약 변경을 보고 엄중하였던 것이다.

자 그러면 설교 본문을 좀 더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지침을 함께 챙기자. 아멘.

1) 사람의 언약(15)

“사람의 언약”(διαθήκην 디아쎄켄 covenant, ratify 사람끼리이면 ‘비준’ ‘유언’이고,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이면 ‘언약’을 의미함. “어떤 사람이 적법하게 유언을 작성해 놓으면, 아무도 그것을 무효로 하거나 거기에다가 어떤 것을 덧붙일 수 없습니다.”(새 번역) 그리고 언약은 네 가지를 갖추어야 하는데 언약의 내용과 언약을 실행하는 자, 언약에 응하는 자<언약한 내용을 알고 그대로 성취될 줄 믿고, 기다리며 의무를 다하는 사람, 언약의 기간과 상벌>.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한 언약은 모세 율법보다 430년 전이니 율법준수와 별개라는 논증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언약은 여전히 영향력을 갖는다고 밝힌 것이다. 우리는 식당에서 ‘예약석’이라는 표시를 종종 보게 된다. 그 예약석은 비록 빈자리지만 먼저 약속한 사람에게 우선권을 준다는 의미이다. 율법은 강제적인 힘을 바탕으로 존재하지만, 언약은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유지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들이 신뢰함을 바탕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길을 허락하셨고, 그래서 ‘하나님과 언약’은 구약성경에서 중요하게 반복되고 있는데도, 율법주의자들은 구약성경을 억지로 해석함으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짓을 하였다. 그렇지만 소경을 따라가는 자들이 눈을 뜨면 구덩이 참사를 피할 수 있게 되지요.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언약 설명에 주력한 것이다. 우리도 성경에 눈을 뜨길 축복한다.

2) 약속(18)

새 번역은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유업을 거저 주셨습니다.”라고 번역하였는데 “거저 주셨다”(κεχάρισται 케카리스타이 완료형 χάρις 은혜,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사랑, 용서, 은사 등등 다 은혜인데, 바울은 하나님의 언약도 유업도 은혜에 속한다고 역설함).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언약하시고 유업을 거저 주셨다고 했다. 그 유업은 ‘가나안 땅’과 ‘보호하심’이었다. 땅과 보호는 그리스도인으로 믿음생활하는데 필수여건이다. 이 유업을 거저 받음, 즉 은혜로 받았다는 것이다.

창세기 12-13장에 보면 아브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 가나안으로 이사 왔는데, 그 언약의 땅에 기근이 생겼다. 그래서 그는 애굽으로 피했지만 거기서 살아남으려고 자신의 아내를 누이로 속이다가 끝내 빼앗겼다. 그런 변덕쟁이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다시 아내를 찾아주고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셨다.

창 26장에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우리 하나님은 언약순종을 고난환경으로 확인해 보신다는 점을 명심하자. 아멘.

3) 이는(22)

새 번역은 “약속하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라고 번역하였다. “이는”(ἱνα 히나 목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려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언약을 주시고 430년 후에 율법을 주셨다. 왜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는가? 19절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공동 번역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려고 덧붙여 주신 것”으로 번역하였다.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롬 4:15)라고 논증하였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은 후에야 율법 이전부터 범죄 했음을 알았고 시인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율법의 실제적인 역할은 죄를 드러내어 심각성을 깨닫고 언약을 성취하신 예수님을 찾아가 대속제물을 믿도록 하는 수단이었다. 그러므로 율법은 인간에게 자신의 범죄를 알아보게 하는 거울인 셈이다. 이 거울은 예수님의 십자가까지만 유효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으면 새롭게 복음생활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언약을 알아차리고 시인하며 받아들여서 삶을 이루는 것이다. 철저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감사하는 삶이다.

오늘은 부활주일이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확증하는 기회이지요.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날 새벽에 여인들과 제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왔지만, 부활 신앙인은 ‘전무(全無)했다’라고 성경이 보여준다. 바울도 고전 15:17에서 항변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헛됨” ματαια 마타이아 deceive, inefficient, useless. 내용!).

설교를 정리하자. 바울은 율법주의 교인에게 ‘어리석다’고 책망하더니(1) 설교 본문은 “형제들아”라고 호칭을 바꿨다. 그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설득시키려는 의도이다. 이제 하나님의 언약을 따른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예수님 안에서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율법을 어기게 되면 심판을 받는다. 창 2:17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무트 티무트 מות תמות 미완료형 망하다, 멸한다. 반복, 예외 없이 죽임을 당함). 그러나 딱 하나 살길이 있다. 예수님의 대속제물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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