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0일 설교

“아브라함의 복이 미치게!” (갈 3:10-14 ‘율법의 저주’ 22.4.10)

2001년 911테러 사건 때 United Airlines 93호 여객기가 미국 펜실베니아 상공에서 추락하였지요. 그 비행기에 타드 비머(Todd Beamer)라는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테러리스트들이 갑자기 승객들을 비행기 뒤쪽으로 몰았다. 그래서 타드는 비행기 납치를 직감하고 핸드폰으로 일리노이스의 오크부룩(Oakbrook)에 있는 GTE의 감독관인 리사 제퍼슨(Lisa Jefferson)과 비행기 납치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는데, 타드는 자신과 일부 승객들이 테러리스트들을 진압할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털어놓았고, 타드는 리사에게 자기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했단다. 두 사람은 함께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하고, 타드가 “주님, 저를 도와주소서!”라고 한 마디 더하더니, 타드와 일부 승객들은 시편 23편을 함께 암송했다. 그러고 “여러분, 준비되셨지요? 다 같이 돌진합시다.” “Are you guys ready? Let's roll.”

이러한 대화는 나중에 비행기 조종실에서 수거된 블랙박스를 통하여 밝혀졌다. 그렇다면 타드와 일부 승객들이 함께 돌격했기에 비행기는 국회의사당이나 백악관을 공격하지 못하고 펜실베이니아 상공에서 추락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타드 비머를 비롯한 승객들은 자기의 목숨을 바쳐서 최악의 피해를 예방해낸 것이지요. 이들은 무엇보다도 이미 천국백성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확신하였기에 담대해질 수 있었다. 그들은 인생을 잘 끝마친다는 게 어떤 삶인지 확실하게 알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사람이 죽었을 때 ‘도착했다’(arrived)라고 표현한단다. 상당히 성경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망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지만, 새로운 세계를 살아가는 것으로 성경은 가르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예비해 놓고 기다리시는 천국에 도착하는 것을 별세라고 성경은 말해준다.

오늘 설교 본문 11절에도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고 했는데, 하박국 2:4를 인용한 말씀이다(“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בֶּאֱמוּנָתֹו 뻬에무나토 in his faith, אֱמוּנֶָה 에무나 firmness, truth, faithfulness. 이 말씀은 앞에 3절 말씀과 연관 지어서 생각해야 바람직한데, 하나님이 정하신 종말이 더디 올지라도 주변 강대국이나 강력한 자, 막대한 환경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흔들림 없이 살아가는 모습인데, ‘믿음으로 산다’라고 함) 실례로는 창세기 15:6의 아브람이다(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 당시 아브람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러다가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양자로 세웠을 때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주시겠다’고 다시 언약하셨다. 그러자 아브람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에 맞춰 판단하고 양자를 취소하였다. 그러한 취소를 하나님께서 보시고 믿음이라 하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셨다는 것이다. 아브람의 취소는 사실상 크고 작은 문제들과 걱정이 많아졌지요. 하지만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기다리며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아브람은 보이는 대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힘들어도 하나님의 언약으로 판단하고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삶을 하나님이 보실 때 ‘믿음으로 산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믿음으로’의 반대는 ‘보이는 현실대로’ ‘자기 한계대로’이다.

2차 대전 때 영국군이 프랑스군하고 연합하여 독일군을 패전시키려고 하는데, 오히려 독일군이 2주 만에 프랑스를 완전히 점령해 버렸다. 그때 영국군 35만 명이 도버해협을 건너가서 갇혀있었다. 안타까운 처지였다. 바로 그때 영국 왕 조지 6세는 성경 말씀을 믿고 온 국민에게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명령 내리고 자신은 금식 기도하며 부르짖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35만 명의 병사를 구해주세요.’ 병사들의 가족은 물론 온 나라가 기도에 동참하였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그다음 날 아침 독일군이 있던 지역은 안개가 덮이더니 비가 세차게 쏟아져서 비행기가 한 대도 뜨지 못했고, 탱크도 움직일 수 없었단다. 움직이면 수렁에 빠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영국군이 있던 그 지역은 햇볕이 쨍쨍하여 35만 병사가 도버해협을 무사히 건넜다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작동하시도록 허락받는 방법인 것이다. 아멘.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날마다 몇 차례씩 설교를 듣고 몇 시간씩 성경을 베껴 쓰는 일보다 인생의 문제를 하나님의 언약과 연관을 지어서 풀어가는 삶을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과 연관을 지을 때 성경의 의미 즉 하나님의 의도를 잘 알아차려서 반영하는 게 막중하다.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차리기에 대실패를 한 자들이 바리새인들이었다. 바울은 설교 본문 10절에 “율법행위에 속한 자들”이라고 기록해놓았고 성경학자들은 ‘율법주의자’라고 부른다.

자 그러면 율법주의 신앙생활의 문제점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면서 우리 자신의 믿음 삶을 점검하자.

1) 저주 아래(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ὑπὸ 휘포 영향권, 하나님이 정하신 저주는 말로 끝나지 않고 지옥행이라는 폭력사건이 실행됨으로 심각함) 있나니” 그런데 이 말씀은 율법을 무용지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10절 후반절의 의미를 보면 달라진다.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 저주의 영향은 사람이다.

10절에서 사도 바울이 지적한 실체는 율법이 아니라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오해하여 율법을 부정적으로 단정하고, 율법을 적대시하고, 율법 폐기론은 빗나간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정당하다(“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7:12>)

613개의 율법을 지키려면 자기 한계에 직면하고, 결국 죄인을 시인하며 십자가 대속제물을 찾아 구원에 이르게 된다. 이게 율법의 순기능이다. 율법주의는 자기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는 고집이요 인본주의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필패요 절망이며 지옥 심판으로 종료됨으로 저주인 것이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이 증거하려고 무척 애를 썼던 게 오늘 설교 본문이다. 율법주의를 조심하자. 아멘.

2) 속량(13)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구원의 길은 믿음의 길과 율법의 길뿐이다. 믿음의 길은 “속량”을 아브람처럼 하나님의 언약으로 알고 시인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창 15:6). 하지만 율법의 길은 율법들(613개)을 모두 실행하여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 방법인데, 99%를 지켜도 불합격이다. 한동안 지키면 되는 게 아니라 계속 지켜가야 한다. 그러니 불가능에 도전하는 신앙 삶이다. 따라서 율법주의자들은 율법들을 지키는데 온통 전력을 다 쏟음으로 열심은 극성이지만 기쁨도 감격도 없다. 율법들을 모두 지키지 못해 아직 걸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주의자들은 외식에 빠진다. 겉으로는 지켰는데 속 내용으로는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라고 책망하셨다. 병들어서 제값을 받지 못할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 분명히 숫자로는 맞는데 내용을 따지면 불순종이다. 그렇지만 율법주의로는 괜찮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을 자신과 비교하며 ‘참 한심하다’라고 속단한다. 이런 속단이 교만(잠 18:12).

네비어스라는 선교 신학자가 한국에 와서 선교 현장을 둘러보고 분석한 결과 한국 교인들은 너무나 문맹자가 많아 무식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방법을 찾다가 ‘글을 읽지 못하니 암송시키자’라고 대안을 내놓았다. 그래서 성경 암송대회가 생겼다. 성경 암송보다 더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읽고 쓰고 암송하는 성경에서 믿음의 길을 발견해 가는 것이다.

3) 이는(14)

14절에는 “이는”과 “또”라는 단어가 있는데 헬라어로는 히나(ἵνα ~하기 위하여)인데, 강조하기 위한 어법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복이 미치는 것”과 “약속된 성령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필요충분조건이라는 것이다. 특히 성령의 보혜사 되심(예수님의 가르침이 생각나고, 진리로 인도해주시고, 장래 일을 깨우쳐주시며,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확신을 주심)은 축복 중의 축복이다. 예를 들면 ‘간음하지 말라’라는 말씀은 단순히 간음 자체만 안 하면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보혜사 되심을 따르면 음욕을 품는 것도 죄라고 감동해 준다. 이러한 믿음생활을 율법주의는 외면하지만 믿음의 길로 가는 신앙인은 이미 의롭게 된 자신이 누구였고,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며, 예수님과 연합하고 유지해야 함을 확실하게 깨우쳐준다.

따라서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시는 이유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요. 이미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자에게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새삼스럽게 ‘구원받아야 하는데’ ‘구원받기 위해서 무엇을 하면 되나?’ ‘교회에 다니면서 헌금하고 봉사하면 구원받는다’라는 생각은 빗나간 것이다. ‘구원을 받겠다’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대속제물인 십자가를 화목제물로 믿고 하나님께 받은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지속하는 것이다.

30여 년 전에 유럽의 신학자 한 분이 한국에 와서 교회들을 둘러보고는 감탄했단다. 양적인 부흥과 그 열심과 열기에 충격수준으로 놀란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돌아가면서 충고 한마디 남겼다. “열심도 좋고, 부흥도 필요한데, 한국의 교회들은 너무나 값싼 은혜를 찾는데 고쳐야 합니다.” 우리에게 정말 값지고 소중한 은혜는 새롭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이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는 큰 축복인데 이 사실에는 별로로 생각하고 이 땅에서 무엇을 먹고 입는 복, 병을 고치고 자식이 잘되는 등의 값싼 은혜에 빠져있다는 지적이었다. 믿음 삶의 진가를 모르고 있다는 말이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 되고 성령의 보혜사에 정통하는 신앙생활을 잘해 가길 축복한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의 뼈대를 간추리자. 그리스도인 됨의 이유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있다. 나를 위한 십자가 사건 때문이다. 따라서 남은 인생은 십자가 사건에 의하여 살아간다. 이게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 삶이다. 여기에 자기 개혁이 있고, 사회개혁도 있고, 기독교의 창조적 문화도 있게 된다. 개혁은 영어로 reformation인데 다시 틀을 짜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이다. 저와 여러분이라도 개혁하는(reforming) 신앙생활을 이어가길 축복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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