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6일 설교
“내가 전하는 복음!”(갈 1:11-17 ‘계시 복음의 중요성’ 22.3.6)
애벌레는 나비처럼 날아다니려고 펄쩍 뛰지 않는다. 아직 ‘번데기’ 과정을 마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어리석음을 범하는 교인들이 많아서인지 성경은 자꾸 소개한다.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데, 부자 청년이 영생을 얻겠다고 십계명을 어려서부터 열심히 지켰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 천국 백성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도 성경에 대한 지식도 많았고 남다르게 메시아를 갈망하며 애도 많이 썼지만, 여전히 헷갈리고 있었다. 베드로는 자신을 모르고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라고 호언장담하자 주님이 말씀하셨다.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렇다면 그들에게 결정적인 잘못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육으로 성령의 일을 하려고 몸부림을 친 것이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해주셨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에 속한 교인과 천국 백성은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교인들인의 열심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수고가 아니란 말인가? 순금과 금광석은 다르다. 금광석을 용광로 속에 녹인 후에 다시 금괴로 모은 게 순금이다. 그리스도인의 열심도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한번 부서지고 걸러져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육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라고 로마서 8장에서 말씀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도도 결국 거듭난 그리스도인이었다. 제련되지 않은 금광석을 순금으로 사용할 수 없듯이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은 육에 속한 교인은 주를 향한 열정이 뜨거울지라도 성령의 뜻을 혼동하고, 주의 일을 세상 논리로 처리하려다가 자주 한계를 드러낸다. 이러니까 12제자는 다락방에서 성령의 권능을 입기까지 회개하며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교인들이 결심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실패하는 게 있다. 그것은 주를 위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순종과,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로 충성하는 삶이다. 육의 교인은 이기심에 너무 지배당해서 변덕이 심하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은 지속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오늘 설교 본문도 육과 영의 삶을 애써 확실하게 구분하고 있는데 저랑 같이 확인해 보자“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1-12).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출처를 사람은 전혀 아니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라고 밝히고 있는데, 그 이유는 복음의 출처가 예수라야만 하는 문제는 바울에게만 국한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느 사도이든, 아무리 능력의 목사라도 그가 전하는 것이 참참참 복음이고 권능의 기적이 나타나더라도 그 출처는 예수님의 계시로 말미암기 때문이다(οὐκ ἔστιν κατὰ ἄνθρωπον.<11> 우크 에스틴 카타 안드로폰 “is not of human origin.” -GN-. γὰρ ἐγὼ ... ἀλλὰ δι᾽ ἀποκαλύψεως Ἰησοῦ.<12> 가르 에고 ... 알라 디 아포칼뤼프세오스 예수 “but it came through the revelation of Jesus” -NKJV- “[it came to me] through a [direct] revelation [given] by Jesus” -Amf- ἀποκαλύψις uncover, appearance)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장애인을 걷게 하였는데, 그것을 본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여기자, 바울은 장애인이 일어나 걷게 된 기적의 출처는 예수님이지 자신들이 아니라고 그 자리에서 밝혔다.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10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행 14:8-15) 이러한 바울을 성경 독자가 본받아야 할 바는 이방인들에게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럴 때 나타나는 기적의 출처를 올바로 밝히는 바울의 양심선언이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겸손이고 순종이며 충성이기 때문이다. 아멘. 그런데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고전 1:12) 이처럼 생기는 교회분열은 복음의 출처를 혼동한 믿음의 근시안 탓이다.
20세기에 무서운 독재자들이 나타났는데 바로 히틀러, 무솔리니, 히로히토,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등이다. 이들은 1, 2차 세계대전과 공산혁명을 일으키고 그동안 인류가 겪어 보지 못한 전쟁과 살상을 저질렀다.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이 없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심으로 함부로 아무 일이나 해서는 안 된다’는 사상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은 ‘하나님은 없다’이다. 왜 그런가? 무슨 범죄든 다 가능하기 때문이다. 교인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악에 가담하는 것은 임마누엘을 실감하지 못할 때 그런다. 그러니 예수님의 계시 복음의 출처를 올바로 인식하는 게 막중해지지요.
자 그러면 바울이 철저하게 강조한 예수님의 계시 복음을 저랑 같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1) 전통(14)
바울의 일생은 예수님 때문에 사울과 바울로 뚜렷하게 나누어진다. 그 차이는 180도의 변화이다. 사울은 유대교의 광신자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철저히 짓밟았다(“박해하여 멸하고”<13> δίωκω 디오코 rapid motion, πόρθεω 포르쎄오 destroy 전쟁용어). 이토록 광신자로 살게 된 이유는 군계일학(群鷄一鶴)처럼 조상의 전통을 잘 지킨 탓이었다. 바울이 자신의 과거를 밝힌 이유는 독자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믿음의 허점을 공감시키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보실 때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야 온전해지는 전통이었다고 증언했다. 구원은 발버둥을 쳐서 얻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라는 것이다. 그렇다. 전통이 아니라 복음이다! 복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이다. 인간이 흉내낼 수 없는 하나님의 특허품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어떻게 되는가? 우선 죄가 주장하지 못하고(롬 6:14),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며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어 참 믿음의 진보를 이룬다(롬 5:2-4). 새 ‘paradigm’의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아멘.
2) 의논(16)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εὐθέως οὐ προσανεθέμην σαρκὶ καὶ αἵματι ‘곧’<εὐθέως 유세오스 immediately 바울이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이방선교의 사명을 받은 직후> 또 ‘의논하다’<προσανεθέμην 프로산에쎄멘 προσ ανα<up, again> τιθημι in free communication>, ‘혈육’은 인간을 의미함. 바울은 다메섹에서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어놓은 그 엄청난 예수님 체험을 자유롭게 논증하여 자신의 인생길을 수정할 그 대화상대로 자신이 평소에 존경했던 은사님들은 물론 예수님의 12제자라도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임).
더구나 행 9:29에 보면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예루살렘은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요, 위대한 신앙의 사도들이 활동하는 곳이었다. 반면에 타락한 강도들의 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예루살렘도 참 신앙인과 위선자, 악한 변절자, 개독교들이 공존하고 있음을 명심하자. 아멘.
3) 아라비아(17)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체험한 직후 아라비아로 가서 3년을 머물렀다(18)고 했다. 왜 그랬을꼬? 전지전능 전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성경적으로 정리하는 기간으로 보는 게 무난하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아라비아는 주 예수님과 깊은 대화를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깨닫는 광야 훈련소였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자랑을 “배설물”(빌 3:8)로 여기게 되었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삶의 보배로 여기는 신앙관(갈 5:14)을 갖게 된 것이다. 엡 3:17-19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했다.
바울이 강조한 계시 복음을 자칫 오해할 수 있다. ‘예수님께 계시로 복음을 받았다면 사람에게 배울 필요가 없다. 계시만 받으면 된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라는 말씀이 더욱 그러지 않느냐고. 그렇지만 예수님은 승천할 때까지 복음을 수없이 가르치셨다. 그 방법은 말로, 모범으로, 훈련으로, 환상으로 다양했다. 문제는 복음을 듣고, 읽고, 보고 깨달아 순종함이 열쇠인 것이다. 요점은 복음을 평생 들어도 예수님의 복음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복음을 깨달았다고 할 수 없다.
현재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인기 있는 설교의 주제는 축복, 성공, 형통, 소원성취, 응답받는 비결 등등 사람의 욕망에 맞추고, 하나님께 영광보다 점점 소위 오락적(entertainment)으로 바뀌는 실태를 부인할 수 없다. 요즘 사람들은 옛 우리 선조들보다 죄를 훨씬 적게 짓고 살아가는 것처럼 죄를 지적하여 회개하게 하는 설교보다 ‘평안하다’ ‘편리하다’ ‘잘될 것이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소위 ‘긍정적 마인드’를 주입시킨다. 그러나 지극히 편식복음(偏食福音)이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바울이 이런 고백을 갈 2:20에 해 놨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런데 바울이 또 이런 고백도 고전 9:27에 실토해 놨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이 두 가지 측면을 조화시키며 그 높은 충성을 해낸 바울을 기억하자.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 중에 저와 여러분에게 보여주는 믿음의 나침반을 보자. 바울은 “형제들아”라고 대화를 시작한다. 다른 복음을 따라 넓은 길로 배신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격분했던 사도 바울은 다시 평정을 찾았다. 보혜사 성령님은 원수 맺음보다 화해의 전도를 원하신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복음으로 자신의 존재와 삶이 격변했다고 밝혔다. 그 복음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자아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된 전도자를 발견하였다고 증언했다.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의 복음 안에서 새로 발견한 그 삶에 충실하길 축복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