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7일 설교
“유대인답게!” (갈 2:11-21 ‘오직 믿음과 그 삶’ 22.3.27)
여러분도 알고 있는 것처럼 저는 올 연말에 은퇴하게 된다. 그런데 여러분이 우리 교회에 오시도록 결정한 목사님이 부임하기도 전에 2층 사택을 패밀리 아파트 탄천 옆으로 옮겨달라. 거기서 주민들과 소통하면서 21세기에 맞게 전도되는 목회의 모범을 보이겠다고 요구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는가? ‘탁월한 식견을 갖추신 목회자라서 역시 현명한 판단을 하시구나!’라고 환영하겠는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어려운 일이지만 국가의 미래를 위해 내린 결단”이라며 대통령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용산의 국방부 청사로 옮기고, 5월 10일부터 새 집무실에서 근무를 시작하겠다는 구상을 발표했지요. 기존 청와대는 국민에게 개방하고, 용산의 대통령 집무실 주변도 국민 공원을 조속히 조성해 국민과 소통을 강화하겠다고 하네요. 이토록 대통령 집무실 이전을 서두르는 윤 당선인의 설명을 간추려봤다. “공간이 그 업무와 일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다.” “일단 청와대로 들어가면 제왕적 권력의 상징인 청와대를 벗어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리라 생각한다.” “단순한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국민을 제대로 섬기고 제대로 일하기 위한 각오와 국민과 약속을 실천하고자 하는 저의 의지입니다.” 청와대에서는 실천하지 못하는 각오와 의지가 용산에 가면 잘 된다는 것은 풍수지리설인데... 불안불안 하다.
좀 더 들어보자. “새로운 대통령실은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 구축될 것입니다.”(1월 27일) 기자가 반문하길 “광화문 청사는 공간이 협소하고 외빈을 맞이하는 일, 경호와 교통 문제로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자 “경호나 외부접견 문제는 저희가 충분히 검토했습니다.”라고 답변하더니 3월 20일 “당선 이후 대통령 집무실 광화문 이전방안을 세밀히 검토한 결과 시민 입장에선 재앙이란 생각이 절감했습니다.” “대통령 경호 중 발생하는 전파방해, 헬기장, 국가안전보장회의는 청와대라야 합니다.” 문제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는 청와대 이전 공약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졸속 빈말 잔치’로 공약했음을 자인하며 추진하고 있는 셈이다.
오늘 설교 본문도 속 내용을 올바로 갖추고도 삶으로 실행하지 못할 때 심각한 문제로 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14).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이 말씀은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밥을 먹다가 유대주의자들과 마주치자 식사 자리를 떠나 숨었더니 함께 식사하던 유대인들도 따라 하였고, 심지어 바울의 이방인 선교의 동역자인 바나바까지도 덩달아 베드로를 따라 했다는 것이다. 이 일은 하나님 앞에서 성결과 부정의 문제였다. 그래서 바울은 총책임지도자 격인 베드로를 그 자리에서 책망했다.
함께 생각해보자. 베드로는 12사도요, 바울의 신앙 선배이며, 목회의 후원자였다. 그렇다면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는 일은 쉽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바울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지도자 베드로를 야단쳤다고 했다. “베드로 사도님은 설교와 삶을 일치시키지 않는데 이러한 믿음 생활을 과연 사도답다고 할 수 있나요?” “사도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게 복음 신앙상 그렇게 부끄러운 짓입니까?” “사도님은 율법주의를 배척하자고 설교하면서 실제 삶은 율법주의자로 살아가는 모순을 행하고 있잖아요?” 이렇게 공개지적하는 것은 권면을 넘어 엄중한 꾸지람이니 사실상 충격 사건이었다.
여기서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을 좀 더 생각해보자. 믿음과 행함은 별개일 수 없다. 믿음에는 순종이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존재한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믿음과 순종은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성령의 보혜사에 순종하는 믿음 삶 때문이다. 순종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약 2:17)이고 불순종이다. 그래서 의롭다고 구원받은 성도는 반드시 순종이라는 열매를 맺어간다. 따라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세례받고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믿음 삶을 끝낼 수 없다. 그런 건 이단 사이비들도 잘한다. ‘척’을 능수능란하게 한다고 ‘진짜’라고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이 말은 ‘의롭다고 인정함’과 ‘의롭다고 공포함’과 ‘의로운 삶을 살아감’을 포함한다. 그런데 의로워짐은 자기 스스로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 유아들은 미숙함으로 실수투성이이다. 하지만 그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의 모든 실수를 사랑으로 포용하고 양육하며 끝까지 품고 기다린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의 그리스도인들을 보살피시고 인도하시는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아멘.
마 7:11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말씀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게’(창 1:31)이다. 예컨대 학생 ‘갑’과 ‘을’이 함께 ‘ㄱ’ 대학에 지원하고 두 학생 모두 열심히 공부하며 구하고 찾고 두드렸는데, ‘갑’은 합격하고 ‘을’이 불합격했다면, 이 경우에 갑은 하나님께 좋은 것을 응답받았고 을은 하나님께 좋은 것을 응답받지 못한 것인가? 왜 하나님은 두 학생 모두에게 좋은 것으로 응답해주시지 않았을까?
이러한 의문은 두 학생이 원하는 합격을 좋은 것이라고 전제하기 때문에 생긴다. 그러니까 합격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응답이지만 불합격은 좋은 응답이 아닌 것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 ‘불합격’도 ‘을’에게는 필요하고 “좋은 것”이지요. 그래서 인간의 판단과 희망과 다르게 응답 된 것이다.
그렇다면 설교 본문을 좀 더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관점을 확인하며 배우고 챙겨서 믿음의 진보를 이루자. 아멘.
1) 두려워(12)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행 9:43). “무두장이”는 짐승의 가죽을 벗겨서 가방과 신발, 혁대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조선 시대라면 ‘갖바치’나 ‘백정’ 같은 사람인데, 유대인의 시각으로는 ‘부정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율법의 틀을 깨고 여러 날 친교하였던 베드로에게 하나님은 환상으로 더 깨우치셨다(행 10장). 여러 짐승을 보이며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 속 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렇게 세 번이나 실랑이하다가 결국 베드로는 로마군대 백부장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성령강림으로 세례도 베풀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동안 남아있었던 유대교의 전통과 율법의 규례, 이방인과 담이 완전히 허물어졌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의 12사도답게 성령충만한 사도교회 지도자로 당당해졌다.
그런데 베드로가 안디옥에 와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 중인데, 예루살렘에서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들이 당도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을 아직 깨닫지 못하는 교인들이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몸을 숨겼고 다른 유대인들도 따라 했다는 것이다. 결국 베드로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의 정체성과 복음의 확신을 포기한 셈이었다. 베드로는 진정 두려운 게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주어야 할 때 그러지 못함으로, 유대주의자들에게 바울의 이방인 전도를 시비해도 괜찮다고 묵인한 셈이 된 것이다. 그러니 베드로는 유대주의 그리스도인을 지지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비난했던 바리새인의 위선을 시인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당장 바울이 성령충만한 베드로를 책망했다. ‘사도님은 유대인이지만 이방인과 교제한다고 설교해놓고, 유대주의자가 나타나자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행동하다니 사도님의 설교는 거짓이었네요!’ ‘그런 이중적인 신앙생활은 예수님이 십자가로 헐어버린 담을 다시 세우는 짓이요,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다른 복음입니다!!!’ 믿음확신대로 살아가자!
2) 유혹(13)
“유혹되었느니라”(συναπηχθη 쉬나페크쎄 συναπαγω<쉬나파고 astray>의 Aor. pass). 베드로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식사하다가 유대주의 교인들을 보고 슬쩍 식사자리를 뜨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따라 하였고, 바나바도 따라 했는데 바나바의 피신은 유혹이라는 것이다. 그럴 때 바울은 베드로와 바나바의 이중신앙을 보면서 침묵하지 않았다.
사도행전 4장 36-37에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나바는 자기의 밭을 팔아서 헌금하였다. ‘권위자’는 다른 사람을 통솔하는 힘의 권위(權威 authority)가 아니라, 권면하고 위로하는 권위(勸慰 comfort)이다. 그런 바나바가 예수님을 만난 바울을 사도들에게 소개했고(행 9:26-27), 또 다소에서 데리고 와서 안디옥교회를 세우게 한 장본인이었다(행 11: 25-26). 그토록 훌륭한 바나바가 유혹당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우리나라의 초대교회는 남녀유별의 시대였다. 그래서 예배당도 ‘ㄱ자’로 지어서 남자와 여자의 자리를 구별했다. 대한제국의 문화와 풍속을 존중하면서 믿음을 심으려는 뜻이었다. 이처럼 지역과 세대의 문화를 이해하고 병행하되 성경의 근본 진리를 변질하지 않게 전도함이 아주 중요하다. 한국의 천주교처럼 성경의 근본진리를 변질시키는 한국의 문화수용은 큰 잘못이다. 대표적인 게 제사허용과 성물숭배이다. 복음이 “다른 복음”으로 변질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믿음의 본질을 사수하길 축복한다. 아멘.
3) 못 박혔나니(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옛사람의 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 함께 못 박혀 죽었다. 핵심은 하나 됨이다. 자기 자신을 주장하던 ‘나’는 사망했다. 그래서 옛사람 시절에 죄의 행위들을 하던 ‘나’는 죽고 사라졌다. 또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내가 예수님을 믿을 때 내 안에 들어오셔서 지금도 내 안에서 살아 계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존재 방식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그러므로 ‘새로운 나’가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로마서 6:6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καταργηθη 카타르게쎄 καταργεω 카타르게오 to make empty and unmeaning. Aor. pass 과거에 단번에 이루어졌음. ‘죄의 노예 하던 나’가 이미 없어짐. 범죄의 기능이 상실되었음)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성령님이 보혜사로 나를 주장하심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믿음의 진보를 이루길 축복한다.
자 이제 오늘 말씀이 주는 가르침을 정리하자. ‘우리’라는 생각이 없는 신앙인은 복음신앙의 핵심을 놓친 것이다. 소속한 집단만 하나라고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다른 복음’이다. 또 복음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이웃을 차별하는 것은 위선 신앙인이다. 옛사람은 복음의 하나 됨을 방해하면서 융화하지 못하게 한다. 백인과 흑인, 동양인을 차별 없이 사랑할 때 복음신앙이다. 문제는 이 복음 신앙을 실천하지 않을 때 위선이며 책망의 대상이다. 복음의 핵심내용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눅 10:27)이기 때문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