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0일 설교
“헛 되지 않게!” (갈 2:1-10 ‘진리로 통하는 복음’ 22.3.20)
교회들이 신앙생활하고 있는 실제 모습을 우리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보시며 평가하시는데, 그중에 7교회를 선정하여 요한계시록 제2장 3장에 기록해놓았다. 그런데 첫 번째 교회가 에베소 교회이다. 이 교회는 수고하였고, 근면과 인내, 거절까지 잘하였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는 강한 열정과 정의감과 판단력으로 개혁을 하였고, 이단도 무력화시키는 실력으로 월등하게 충실한 교회였다. 그렇지만 사랑이 변질하는 게 화근이었다(“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 2:2-4). 사랑이 시들시들한 수고, 사랑이 병든 비판, 사랑이 변질한 개혁... 결국 하나님이 보실 때 악함이다. 그 변질을 오래 고집하면 믿음 생활은 무효처리한다는 것이다.
특히 마음을 긴장시키는 말씀이 있다.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참으로 값진 믿음 생활이다. 예수님이 욕을 먹지 않게 하려고 참아가며 열심을 냈다니 빛과 소금 된 믿음 삶으로 존중하기에 충분하다. 그렇지만 사랑이 병드니까 그 훌륭한 칭찬들은 옛 추억으로 잠겨졌고, 한때의 현상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사랑이 무기력해지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는 법이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지식은 고집이게 되고, 똑똑하고 영리하다고 자칭하지만 실제로는 독재로 험악해진다. 대책은 변질해가는 사랑을 얼른 점검하여 잃어버린 사랑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교의 믿음생활은 모든 일에 사랑이 빠지면 아무것도 아니요, 알맹이 없는 헛수고로 평가받는다는 것이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오늘 설교본문도 사랑이 기본임을 역설(力說)하여 예수교의 진면목으로 보여주고 있다(9-10. 함께 읽어본 이 말씀은 이방인의 전도자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인 야고보와 베드로, 요한을 만나 그동안 해오던 설교내용을 대조해 보니 무엇을 수정할 것이 없이 서로 일치함으로 ‘친교의 악수’를 나누며, 해오던 그대로 지속하기로 하고, 다만 가난한 자를 돕는 사랑의 실천을 빠뜨리지 말자는 부탁을 받고, 바울이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요, 베드로를 비롯한 12제자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인 것을 인정한 셈이다. 그럴 때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자신들의 복음이 더 좋고, 바울이 이방인에게 전하는 복음은 시시하다고 비난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울도 자신의 복음 설교가 더 우수하고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가라지라고 시비하지 않았다.
또 사도행전 12장 끝에 보면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자 바울과 바나바가 구제헌금을 전해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바울이 전해준 구제헌금을 예루살렘 교회가 받았다면 이방인의 헌금을 받은 것인데, 율법상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렇지만 절대로 상종을 엄금해오던 예루살렘의 유대인 중심의 교회가 이방인의 교회에게 손을 내밀고 친교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토록 높은 벽을 어떻게 극복해냈는가? 같은 복음을 믿기 때문이었다. 이게 우리 예수님이 기필코 원하셨던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의 한 모습인 것이다.
‘교인들이 설교를 좌우한다.’라는 말에 공감하는 목사님들이 적지 않다. 교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내용만 골라서 설교하는 풍조라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들이 교인들의 입맛에 맞춰서 ‘아부’인지 ‘아양’인지 교인들이 기분 좋게만 설교한다는 것이다. 율례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와 정반대이지요.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עָשָׂה 아사 make, act, create 창세기 1장에 많이 나옴)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스 7:10. 70년 바벨론 포로생활 후에 결론지은 예방대책).
사회가 거짓 부패 쪽으로 기우는데 교회의 입과 눈, 귀를 닫아버리니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은 흉년이지요. 시민에게 발포명령을 내려 수천 명을 살상하고 된 대통령을 찾아가서 축복기도를 해 준 목사님들이 계셨잖아요. 그러면서도 설교 중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라 하면서 혼자 십자가 지고 가는 척은 했지요. 그렇다면 왜 이렇게 설교자들이 이중으로 살아갈까? 하나님의 심판대를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암기한 지식으로는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고 창조주시며 심판주라고 큰소리칠지라도 실제 삶은 그림일 뿐이고 심판주는 죽어서 겪는 일이니 아직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판단하고 선택하며 생활해 갔다.
자 그러면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믿음생활을 좀 더 살펴보면서 우리 자신과 맞춰보자.
1) 계시(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을 방문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따르는 순종이었다(κατὰ ἀποκάλυψιν. 카타 아포칼뤼프신 “I went in response to a revelation” -NIV-) 유대주의 교인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예수님을 믿고 얻은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다시 율법주의 교인으로 돌리려 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예수교 구원의 본질이 아니었다. 바울이 증거한 구원의 본질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화목제물로 믿는 바였다(“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롬 3:25-26). 그래서 바울은 구원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에 유대주의 교인들의 주장을 단호히 거절해 왔는데,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서 12사도를 만나 대화하라고 해서 올라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주 곤란한 문제를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간단히 해결하실 때도 있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갑자기 보지도 먹지도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아나니아를 보내 안수로 즉시 완치시켰다. 또 빌립을 광야로 보내서 에디오피아 경제관료가 세례받게 하셨고, 베드로를 고넬료 집으로 보내 성령세례를 받게 하셨다. 이럴 때 하나님은 다 계시로 하셨다. 이런 계시를 체험할 수 있기를 축복한다. 아멘.
2) 한시도(5)
바울은 복음을 혼동시키는 자들에게 잠시도 굴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οὐδὲ πρὸς ὥραν 우데 프로스 호란 “we did not give in to them for a minute.” -GN-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διαμείνῃ πρὸς ὑμᾶς continue, unchanged). 이러한 점은 바울의 소신이었다. 복음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은 취미로 하는 종교활동이 아니고, 남들의 입장을 배려하여 타협하는 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뜻에 충실한 신앙관대로 살아가는 삶이다.
유대인의 남자는 누구나 할례를 받았다. 그러나 바울은 할례를 회심의 내용으로 보지 않았다. 할례는 신약의 세례와 비슷하다. 그런데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신자는 죄 씻음의 표로 세례를 받는 것이니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헬라인 디도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다고 했다.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며 충성하길 축복한다. 아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왕이 있어야 하리니”(삼상 8:19)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게 돌보심을 포기하고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이었다. 하나님의 통치보다 가시적인 통치체제인 왕정을 선호하는 이스라엘 백성이었다.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는 것을 예수님의 천국복음 보다 앞세웠다. 지금도 이런 일을 반복하고 있다. 성경을 통한 깨달음 대신 ‘보수’를 앞세우고 그것을 순종인양 자랑한다. 그러나 복음이 아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는 더 아니다. 성경으로 본질을 잘 알아차리길 축복!
3) 상관 없으며(6)
“어떤 이들이든지”(ἦσαν 에산 they were εἰμί 미완료, 그들이 전부터 있어 온 바를 바울은 상관 않음.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일꾼을 택하셔서 사용하심으로, 그 계획에 얼마나 순종하는지 그 순종수준이 중요하다는 것임.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에 명품 순종하고 명품 충성하는 게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바울의 확신하였음!) 그러므로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한 이들” 특히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10)를 중요시하였다. 각자의 사명을 재확인하고 인정하였으며, 서로의 명성보다 복음내용의 일치에 가치를 두었다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맡겨주신 사명에 충성하는 삶과 그 확신이 필요하고 중요하지, 예루살렘이냐 시골이냐 유력하냐 무명이냐는 내세울 게 아니라는 것이다. 아멘.
이제 우리 자신을 보자. 교회를 다닌다고 다 순종이고 충성이며 친교인가? 세상의 자랑들로 친교를 하지 않나요? 그러한 인간적인 방법과 친교는 교회를 친목단체로 변질시키고, 다른 복음으로 만든다. 종교개혁의 5대 정신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 교회는 예수님에 의한, 예수님을 위한, 예수님의 교회라야 한다. 그것은 교회구성원의 의는 일절 사라진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그랬다. 우리도 그런 신앙생활을 하길 축복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