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13일 설교
“나로 말미암아!”(갈 1:18-24 ‘전도되는 삶’ 22.3.13)
코닥 필름이 있다. 사진작가들은 사진을 촬영하려고 할 때마다 감광판에 새로 화학약품을 바르는 시대에 조지 이스트먼(George Eastman)은 이미 약품을 코팅한 감광판을 생산하는 기계를 개발하여 1880년 ‘코닥’이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세계 최초로 틀에 둥그렇게 감긴 롤필름(roll film)을 만들었다. 그리고 1888년에는 아마추어들이 그냥 사용할 수 있는 휴대용 카메라를 맨 처음 판매하였다. 그래서 회사명칭 ‘코닥’이 필름의 대명사로 통할만큼 회사는 급성장해갔고, 1970년대에는 필름 업계의 시장점유율이 90%를 넘어 거의 독점하였다. 하지만 상업시장은 항상 태평하게 그대로 있지 않지요. 1990년대에 디지털카메라 시대가 시작됐다. 그런데 코닥회사는 디지털카메라를 세계최초로 개발해 놓고도 세상에 내놓지 않고, 옛 ‘아날로그 필름’으로 버텼단다. 그것은 창업자 이스트만이 세계 최초로 롤필름의 개발선구자라는 명성을 고수하는 데까지 해보자는 게 그 이유였고, 또 하나 디지털카메라를 상용화하면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는 전통적인 롤필름 시장이 위협받게 될 것을 염려한 탓이었다. 만약 코닥회사가 곧바로 디지털 시대에 뛰어들었다면 롤필름에 이어 또다시 디지털 혁신을 선도했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디지털카메라를 다 준비해 놓고 디지털카메라의 시대가 시작됐는데도, 코닥회사는 ‘설마’하며 망설이다가, 위험신호를 알아차린 후 뒤늦게 디지털카메라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2004년부터 파산설이 나돌더니 결국 2012년 1월 19일 파산보호 신청을 하고 말았다. 코닥은 급변하는 필름시장에서 변화할 시기를 놓치고 마침내 돌연사(sudden death)하게 된 셈이다.
오늘 설교 본문도 놀라운 신앙체험을 하고 올바르게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저랑 같이 살펴보자. 우선 변화에 대한 중간평가부터 확인해 보자(21-24. 이 말씀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있는 유대교회들이 사도 바울의 믿음 변화에 대한 평가를 기록해 놓은 것인데, 하나님이 보실 때 굉장히 훌륭함! “알지 못하고” ἤμην δὲ ἀγνοούμενος 에멘 데 아그노우멘노스 미완료, 현재분사 수동태. 바울의 얼굴을 직접 본 사람은 계속 없는데, 설교가 180도로 바뀌었다는 소문<ἀκούοντες 아쿠온테스 현재분사>을 계속 듣고 있음. 그런데 소문을 들은 교우들은 계속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ἐδόξαζον ἐν ἐμοὶ τὸν θεόν. 에독싸존 엔 에모이 톤 쎄온. 미완료, 바울 자신 안에서 = 강조!>).
바울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유대교를 믿었고 조상의 전통에 충실했는데 그것을 ‘하나님께 충성’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깡패짓을 했다. 그러니 충성은 아니었다. 바울이 고백해 놓았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이런 착각은 심각하고 불쌍한 삶이다. 혼신을 바쳐 수고한 헌신이 모두 헛수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의 훌륭한 점은 그 헛수고를 깨달은 즉시 미련없이 버리고 다시 새 인생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올바른 회개는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믿음의 본질적인 내용이 십자가와 부활에 맞춰져 있어야 올바른 예수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삼상 16:7 말씀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를 잘 암송하고, 쓰고, 외치고... 그러다가 결정적인 큰일(大事)에는 쉽게 얼굴을 아는 쪽으로 기울어져 지방색, 학연, 외모로 사람을 선택하잖아요.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를 우리가 정확하게 알고 올바로 실천해야지 대충 넘어가면 불순종하는 거다. 교회를 박해하던 자가 멸하려던 그 믿음을 전하고 있으니 ‘바울이 대단하다’라고 감탄할 게 아니라 복음의 확신에 순종하는 바울이 대단하다고 감탄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보이지는 않는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그의 삶을 지속하여 변화하는 모습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변화는 생각도 못 했던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변화되자 그 소문을 들은 교우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시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아멘.
인간은 일단 익숙해지고 나면 편리한 점을 좋아한다. 가만히 그렇게 머무르면 이제 급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신앙관이나 전통, 습관은 그래도 좋다. 그렇지만 꼭 변화해야 하는데 단지 익숙하고 편리하다는 이유로 그 상태로 머물러 있다면 의미와 가치로 볼 때 빵점이다. 개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삶이 쉽게 변화한다면 개혁하지 않는 사람들은 없겠지요. 개혁하는 데는 대단한 희생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변화를 찬성하고 또 하고 싶어 하지만 빗나간 자리에 익숙해져서 그냥 머무르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나서 얼마나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나요?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다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아멘.
자 그러면 폭력배 사울이 바울로 살아가는 모습을 저랑 같이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고 챙기자.
1) 삼 년(18)
“그 후 삼 년 만에”이 말씀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지 삼 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갔음을 말한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새로운 세계( new paradigm)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그 새로운 세계를 정리하기 위해 사람들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가서 3년간 머물렀다. 거기서 바울은 주님과 더욱 깊이 교제하면서 요즘 언어로 표현하면 신학적으로 신앙체계를 세워 확정한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 엄청난 변혁 가운데 대혼란 때 사람들을 찾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먼저 그 모든 변화를 성경적으로 분석하고 정리하며 확증해갔다는 것이다.
바울은 롬 12:2에 이렇게 밝혀놓았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그런데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리스도인은 변화부터 받아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10년, 20년을 믿어도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기 쉽다. 그래서 어떤 문제를 당하였을 때 하나님보다 점괘를 먼저 찾지 않던가? 그러고 그러지 않았다고 극구 부인하며 오히려 상대를 모함하는 짓을 위대하다는 사람들이 도맡아 한다. 하기야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생각대로 일을 처리하고 나중에 엔돌의 무당을 찾아가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사람과 의논을 일체 배제하자는 게 아니다. 존경하는 인물들의 충고도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비중은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하며 말씀과 조화되는 해답을 찾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첫 출발부터 그랬다. 시도해보자. 아멘.
2) 십 오일(18)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게바는 베드로의 아람어식 발음이다. 즉 베드로를 만나러 예루살렘으로 갔다는 것이다(‘방문하려고’ ἱστορεω 히스토레오 ‘베드로를 알고자 하여’<to visit in order to become acquainted with> ‘탐지하다 조사하다 확인하다’<ascertain>). 바울은 베드로를 만난 적은 없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도였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다. 문제는 바울이 전에 예수 믿는 교회를 핍박하고 멸하려 했던 가해자였고, 베드로는 그러한 피해자의 대표자였다. 예수님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죽이던 자가 이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전도한다고 하나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은 반신반의할 정도였다. 그럴 때 중간에 나서서 중재해 준 사람이 바나바였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행 9:26-29) 바울은 사울시절 때문에 바나바의 도움으로 겨우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나봤지만 전도하다가 “헬라파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겨우 15일간 예루살렘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화해하려고 먼저 손을 내미는 바울을 배우자는 것이다(“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후 5:18-19). 아멘.
3) 쓰는 것(20)
“보라(ἰδοὺ 이두 감탄사)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ἃ δὲ γράφω 하 데 그라포 복수 성경책)은 하나님 앞에서(ἐνώπιον in the judgment of) 거짓말이 아니로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예수님께 직접 받은 것이라 했고, 사도직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메섹에서 사울에게 직접 명하셨다. 하지만 예수님이 공생애 3년 동안 하셨던 가르침과 치유, 훈련도 다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3년간 조사하고 분석하며 깨닫고 버리고 정리했고 또 베드로를 만나 확인했다. 이러한 바울을 보면서 우리는 은혜받은 자의 올바른 모습을 배우게 된다. 예수님을 알아가는 믿음의 진보이다(빌 1:25, 고전 13:8-10). 이는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호 4:6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선민을 자부하고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지식은 부족했다. 명심하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수준 미달하면 안타까운 불신앙 짓을 하거나 동조하고 나선다. 성경이 보여주는 축복의 본질을 아는가? 모세를 따라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자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과 같고, 내 행위와 선택, 가치관, 인격, 삶이 예수님을 닮아 높아가며 삶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어가는 모습이다. 그래서 나의 삶을 통해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자신을 구원하고 자유케 한 예수님의 복음을 확증하고 전파하는 바울을 봤다. 그는 복음의 내용이 엉터리일 때 삶도 파괴였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충성이라고 고집부렸다. 그래서 믿음의 내용을 올바로 알고 실현해 가자는 것이다. 세상기준의 성공을 축복으로 착각하지 말자. 하나님이 찬양받게 산다면 훌륭한 성공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