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6일 설교
“관심을 가집시다”(빌 4:21-22 ‘그리스도인의 문안 인사’ 22.2.6)
지난 1일이 우리나라 최대명절인 설이었지요. 설의 유래는 대체로 4가지의 설(說)이 있는데 새로 맞이한 날이 낯설기에 ‘낯설다’의 어근 ‘설다’에서 ‘설’이란 명사가 되었다고 본다. 또 한 해가 새롭게 개시(開始)하는 날을 가리키는 ‘선 날’이 ‘설날’로 바뀌었다고 보며, 그리고 나이를 의미하는 순수한 한국어인 ‘살’이 설로 정착했다는 시각, 마지막은 ‘근신하다’의 옛말인 ‘사린다, 사간다’에서 ‘설’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보며, 설을 ‘쇠다’라는 말도 ‘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여 나쁜 기운을 쫓아낸다.’라는 의미로써, 설날은 한 해 동안 탈 없이 잘 지낼 수 있도록 언행을 조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것만 옳고 나머지는 다 틀렸다기보다 4가지 의미를 종합하는 편이 좋다. 왜냐하면, 설을 한자로 원단(元旦 아침들 가운데 으뜸), 그리고 비슷하게 ‘머리’라는 뜻으로 ‘머리 수 首’를 써서 세수(歲首), 연수(年首)라고 표현했고, 특별히 신일(愼日 ‘근신하여 경거망동을 피함’)이라 하여 우리 선조들은 설날을 개시할 때 묵은 1년을 다 떨어버리고 새로운 1년을 잘 시작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날의 풍속은 매우 다양했는데, 설날 아침에 일찍 세수하고 마련해둔 새 옷으로 갈아입고 그 새 옷을 ‘설빔’이라 했다. 그러고 아침에 가족과 형제들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어른들께 순서대로 세배를 드리면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세뱃돈을 주며 덕담으로 한해의 형통을 축원하였다. 그러고 아침식사(歲饌)로 떡국을 먹었는데 그것은 ‘새하얗게 새로 태어나라’라는 의미였다. 하얀 눈이 내린 계절에 하얀 한복을 입고 하얀 떡과 국물을 먹으며 지난해 묵은 흠을 다 씻어 버리고, 하얀 도화지 같은 한해에 새로운 그림을 멋지게 그려가는 삶을 살자는 뜻이었다. 그래서 어른들은 세주(歲酒 전혀 가공하지 않아 가장 원초적인 그대로 한 해를 시작하여 무병 형통하겠다는 뜻으로 찬술을 먹음)도 마시며 흥을 돋우었다. 그렇게 아침식사를 마치면 이웃과 친척을 찾아가 세배를 드린 후에, 윷놀이나 널뛰기, 연날리기 등등 놀이를 즐기며 대보름까지 지속하였다. 그런데 설을 ‘구정’(舊正)으로 부르기도 했다. 구정은 ‘옛 설’이란 뜻인데, 일제강점기 때 대한민족의 미풍양속의 얼을 말살시키려고 양력의 1월 1일을 신정(新正)이라 하고 설날을 구정이라 칭한 일제의 잔재라서 1985년 ‘민속의 날’로 지정하며 ‘설날’의 명칭을 되찾고 사흘간의 공휴일로 정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오늘 설교 본문도 축복을 담은 덕담으로 인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을 강권하고 있는데, 특별히 “문안”이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ἀσπάζομαι 아스파조마이 greet, welcome, pay respects). 이러한 인사는 신약성경의 서신서마다 꼭 나타나는데, 이러한 신약성경의 인사 말씀들을 읽다 보면 그 당시 성도 간에 아름답게 축복하는 교제를 하면서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복음이 전파되는 삶에 얼마나 치중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사도시대의 교회는 일단 한뜻을 가진 공동체였다. 그래서 친밀한 사랑의 친교가 훈훈하였다. 그들의 믿음생활은 겉모양보다 속 본질을 중요시함으로, 그들은 어디든 모일 수 있는 곳에서 모였고 함께 모인 자들이 곧 교회였다. 그것은 사도들의 신앙관 때문에 그랬겠지요. 한 마디로 금방 눈에 띄는 특징은 활기찬 친교와 연합이다. 현대교회가 이러한 모습을 회복하는 일이야말로 진정으로 필요한 개혁이다. 대체로 교회가 관습적인 형식에 묶여 거의 박제처럼 되어감을 공감하기 때문이다(박제가 뭔지 알지요? 동물의 겉모습이나 크기는 실제 동물과 똑같은데 단지 속이 텅 비어 있고 죽어있음).
사실상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서 판결을 기다리는 처지였고, 빌립보 교회는 핍박과 다툼과 가난에 시달렸다. 그런데도 바울은 빌립보서에 ‘기쁨’이라는 말을 무려 16회나 반복하며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4)라고 하면서 서로 문안하라고 강권하였다. 생각해보자. 이게 합당하나요? 당장 자신의 처지도 다급한데 어떻게 고난에 눌린 교우들에게 태연히 기뻐하라고 권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특히 이 세상에서 맛보는 기쁨은 오래가지 못한다. 아무리 큰 만족도 어느새 사라진다.
세모와 네모, 동그라미가 나오는 컴퓨터 앞에 원숭이를 앉혀 놓고 원숭이가 손으로 마우스를 마구 누르다가 세모 모양을 누르면 맛있는 바나나를 주었다. 그리고 원숭이의 만족지수를 알 수 있도록 컴퓨터와 원숭이의 머리를 연결해 놓았다. 언제 원숭이가 가장 만족하였을까? ① 바나나를 먹으려는 순간 ② 바나나를 다 먹은 후에 ③ 세모 그림이 컴퓨터 화면에 나타났을 때 ④ 바나나를 먹고 있을 때. 정답은 ③번이다.
우리 인간도 비슷하다는 실험이다. 기쁨은 무엇을 얻을 때보다 성취가 확실해졌을 때 흥분하고 감격한다. 하루 만족하려면 이발을 하고, 한 주일을 만족하려면 여행을 하고, 1달을 만족하려면 집을 사고, 1년을 만족하려면 결혼하고, 평생 행복하려면 남을 위해 봉사하라고 한다. 사람마다 만족 기간은 다르겠지만 사실 무엇을 얻었다 해도 금방 평상시로 돌아가고 그것을 지키려면 피 말리는 수고를 하게 되는데 더욱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래서 세상의 만족은 인간에게 오래 머물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인 저와 여러분은 기쁘게 문안하고 친교하는 믿음생활을 이어가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설교 본문을 함께 살펴보자.
1) 예수 안(21)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Ἀσπάσασθε πάντα ἅγιον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Greet every saint in Christ Jesus.” -RSV, NKJV- “Greet all the saints” -NIV- “Greetings to each one of God’s people who belong to Christ Jesus.” -GN-)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in Christ Jesus 예수님과 연합함!).
롬 6:4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으로 살아난 신앙인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성도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좀처럼 순종하기 어렵다. 그러나 성도는 할 수 있음) 그런데 우리는 사도신경으로 늘 고백한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성도의 친교는 우리의 숙제이다. 우리는 숯불을 모아 놓고 밥을 짓고, 고기도 굽는데, 대장간의 숯불은 쇳덩어리를 녹인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교인’이라 하고, 예수님 안에 살아가는 신앙인들을 ‘성도’라고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그냥 ‘교인’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우리는 집사나 권사나 장로나 목사이기 전에 성도라야 한다. 성도는 자신의 믿음 때문에 핍박을 받을 수 있지만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때 못 박은 로마 백부장이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 27:54)라고 고백하였다. 십자가에서 순교를 당하기는 해도 양심을 흔들어주었다. 오늘날 교회들이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이유는 교회가 ‘성도의 교제’에 서툴기 때문이다. 성도의 교제에 열심을 내기를 축복한다. 아멘.
2) 함께(21)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빌립보서를 쓰는 바울은 로마에서 감옥살이 중이다. 그런데 빌 1:1에 보면, 바울과 디모데가 함께 편지를 쓰고 있다고 밝혔다. 또 딤후 4:11에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라는 말씀을 볼 때 누가는 항상 바울과 동행하였음으로 함께 있었을 것이다. 로마서를 대신 기록했던 더디오도 함께 있었겠지요. 이렇게 바울 곁에 여러 사람이 있었고 ‘동역자’였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의 이름을 아무도 밝히지 않고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라 했다. 사도행전 9장 15절에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라는 말씀처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의도대로 한결같이 충신이었다.
차를 타고 가는데 아들이 운전하는 아빠에게 물었단다. “아빠, 자동차 바퀴는 어떻게 굴러가지요?” “그걸 설명하려면 상당히 복잡한데...” “그래도 설명해봐요.” “휘발유를 태우면 힘이 생기는데, 그 힘이 변속기로, 추진축으로, 차동기로, 앨셀축으로, 차바퀴로 전달되면 자동차 바퀴가 굴러가게 된단다.” 아빠가 설명을 끝내자 엄마가 한마디 했다. “나도 전혀 알아듣지 못했네.” 아빠도 한마디 했다. “그럼 당신이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좀 해봐요.” 엄마는 설명을 간단하게 끝내버렸다. “아들아, 저 옆 차 자동차 바퀴를 봐봐. 바퀴가 빙글빙글 돌아가잖아.”
여러분은 누구의 설명을 좋아하나요? 아빠의 설명은 이치에 충실하나 생각을 많이 따라 해야함으로 까다롭다. 그러나 엄마의 설명은 듣는 데 별로 부담도 없이 쉽고 흥미롭기까지 하다. 지금 저는 설교를 말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기 바란다. 언약법칙은 복잡하나 믿음의 진보를 이룬다. 그런데 이웃 나라 일본은 노벨상 수상자가 100명이 넘는데도 세계에서 최상위에 속하는 두뇌를 가졌다는 한국은 왜 1명뿐인가? 일본과 달리 한국의 대학은 기초과학을 소홀히 하고 돈벌이에 편리하고 안전한 학과에만 몰리기 때문이 아닌가? 하나님의 자녀 삶도 마찬가지이다. 힘들어도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길 축복한다.
3) 가이사의 집(22)
“가이사 집 사람들 중 몇” 기특한 표현인데, ‘가이사라’는 당시 황제 네로인 시저(Caesar)인지라, 그 악명 높던 네로의 왕궁 사람들에게 전도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미 빌립보서 1:13에 밝혀놓았다.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시위대 안에도 전도됐다는 것이다. 그들은 노예일 수 있고 기술자도 귀족과 왕족도 가능했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종이나 자유인,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생각과 달리 바울을 죄수 된 방식으로 당시 로마 제국의 핵심부에 복음을 심으셨다. 만일 바울이 죄수가 아니고 그냥 자유인으로 로마에 왔다면 황제의 시위대 사람들을 접촉하는데도 장애가 많았을 것이다. 요셉도 술 참모를 만난 곳은 감옥이었다. 하나님은 가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구원의 성취를 이루어 가신다. 종종 우리에게 억울한 짐들이 몰려오고 아무리 기도해도 그 짐들이 그대로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십자가가 아닌지 점검해 볼 일이다. 아멘.
오늘날 종교 다원화 시대요, 극도의 개인주의 시대에 교회에서 호칭하는 ‘성도’는 의미상 신약성경과 너무 달라졌다. 신약성경은 오랫동안 거룩히 구별된 그리스도인들을 성도라고 불렀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의 정체성을 잘 알고 주님을 올바로 섬기는 일에 순종하여 건강하고 건전하게 친교 하였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