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27일 설교
“저주받은 설교!” (갈 1:6-11 ‘그리스도의 복음’ 22.2.27)
이탈리아 정부는 로마 관광의 명물이었던 포르타 카페나 광장(Piazza di Porta Capena)에 세워진 오벨리스크를 본래의 주인인 에티오피아에 2005년 4월 19일(67년 후)에 반환했다. 그것은 1937년 독재자 무솔리니가 에티오피아 북부 악숨(Axum)에 있던 오벨리스크를 세 동강 내어 로마로 강탈했기 때문이다. 이 오벨리스크는 길이가 24m, 무게는 180t이나 됐는데 한 덩어리의 암석을 깎아 만든 것이었다. 오벨리스크 지하는 왕의 무덤이고 무덤 속에서 금속과 상아 등 매장유물들이 발견됐다. 그런데 우리가 머나먼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옛 돌 비석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제작장소와 시기 때문이다. 고대시대에 악숨 황제는 부국강병을 남기고자 4세기 초에 악숨에 기념비를 세웠는데, 악숨 왕국은 4세기 초에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였다.
에티오피아인들은 기원전 1000년경,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과 에티오피아 스바 여왕 사이에서 낳은 아들 메넬리크(Menelik)가 북 에티오피아 악숨(Axum)에 왕국을 건국했다고 본다. 악숨 왕국은 기원전 300년에 페르시아에서 인도와 중국으로 가는 길목이었던 홍해를 장악하고 고대 로마와 동맹을 맺을 만큼 강대국이었다. 그래서 악숨 왕국은 고대 로마제국, 페르시아, 중국과 함께 세계 4대 강국으로 통했을 만큼 막강했다. 그러다가 7세기경에 쇠퇴했지만, 에티오피아 국민은 지금도 여전히 악숨 왕국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에티오피아의 경제장관이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빌립에게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에티오피아는 20세기 중반까지 기독교 국가였다. 6·25전쟁 때 우리나라에 전투병을 지원할 정도로 강대국이었다. 그러다가 군부 쿠데타(1974)로 공산국가가 됐고, 교회는 무기력해지더니 지금은 극빈국으로 전락하였다. 복음이 살아있을 때는 구제하는 나라였는데, 복음을 짓밟자 나라 꼴이 거지 됐다는 것이다. 에티오피아의 오벨리스크는 결국 ‘복음의 권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입증해주는 증표’인 셈이다.
오늘 설교 본문도 철철 넘치는 복음의 확신을 볼 수 있게 한다(8 “천사라도 ...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최 강경으로 선포함. 9절에도 반복하고 있고 전에도 강조해왔다고 확인시키고 있음. 불신자들은 이러한 모습을 지적하면서 ‘기독교는 너무나 독선한다’ ‘지극히 편협하다’라고 화를 냄). 그런데도 바울은 왜 이토록 강도를 높였을까? 사도 바울은 6절에 대답을 해 놓았네요.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ἕτερον 헤테론 other, different, illicit 不法 “a different, even an opposition gospel.” -Amf- 조금 달라진 복음이 아니라 전혀 반대라는 것임. “떠나”<μετατίθεσθε 메타티쎄스쎄 현재형, change over, 지금도 ~에서 ~으로 바꾸고 있음. “deserting” -RSV, NIV, GN- 복음을 버리고 가짜 복음을 따르고 있음>. 그래서 바울은 이상하게 여겼다<Θαυμάζω 싸우마조 astonish, surprise>고, 헬라어 성경은 맨 앞에 나와 있음<Θαυμάζω ὅτι οὕτως 싸우마조 호티 후토스 놀랬다. 이와 같은 것을>. “속히”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갈 4:13-14. 얼마나 존경하고 감격, 감사했으면!“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행 14:8-11> 이랬던 사람들이 속히 떠나고 있으니... 안타까워 속상하고 환장했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올바른 복음을 따르던 갈라디아 교인들은 복음을 속히 떠나 복음 아닌 것을 따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큰 문제였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난 셈이었기 때문이다. 출 32:7-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18 모세가 이르되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내가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하고 진에 가까이 이르러 그 송아지와 그 춤 추는 것들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날에 백성 중에 삼 천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그러니 사도 바울도 “다른 복음”을 전하고 따르면 저주를 받으라고 엄중하게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울의 선포는 혼내는 책망이지만, 또 한 편으로는 ‘아직 기회가 있으니 어서 돌아오라’라는 재촉이었다. 왜냐하면 “떠나다”(μετατίθεσθε)가 현재형이기 때문이다. 떠남을 완전히 완료하기 이전이니 이제 사도 바울의 재촉을 듣고 다시 올바른 복음으로 다시 돌아오라는 강권이었다.
자 그러면 설교 본문을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면서 바울의 마음을 올바로 읽어보자.
1) 그리스도의 복음(7)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렇다면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어떠한 것인가? 바울은 롬 1:17에 대답해 놓았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παρεσις 파레시스 to let pass)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5-26)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하나님의 의가와 죄 용서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야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책을 읽기만 하면 10% 정도 알아차린단다. 듣기만도 10%, 보기만 하면 30%, 보면서 들으면 50%, 보면서 말하면 70%, 말하면서 행동하면 90%, 배운 내용을 남에게 가르칠 때 99%란다. 성경을 읽든지 듣든지 배우든지 신앙 삶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성경 암기쟁이이는 된다. 그러나 배운 말씀을 행하며 남에게 물들인다면 말씀을 깨달은 그리스도인이다.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우고 행하며 이웃에게 물들여지는 삶을 살아가길 축복한다. 아멘.
2) 지금(9)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지금’이라는 뜻으로 가장 많이 쓰는 헬라어는 νυν(뉜)인데 설교 본문에는 ἄρτι(아르티, 과거의 어떤 것과 비교하여 나타낼 때 자주 사용하는 부사)이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에 대하여 자신이 과거에 가르쳤던 설교내용과 지금 갈라디아서에 쓰는 내용이 똑같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러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받아드렸던 그 빗나간 복음은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 7절에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누가 그렇게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바울을 의심하게 하고, 바울이 가르친 복음을 변질시켰는가? 유대주의자들이 그랬다. 그들은 선동하여 교우들의 마음을 흔들어 서로 논쟁과 다툼을 하게 하여 문제를 일으키고 (troublemaker), 결국 교회의 화평을 깨트렸다. 이것은 사단이 하와를 유혹할 때 하던 방식이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1-5)
사단이 유혹은 하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하더니, 말씀을 바꾸고 범행하게 하였다. 유대주의자들도 “복음”을 수정했다. “다른 복음”은 용어는 같지만, 그 개념과 방법이 달라진다. 겉으로 보기에는 같아도 속 내용(meaning)은 바꿔진다. 결국은 비슷한 게 아니라 완전히 빗나간다. 현재도 가짜 설교의 용어는 말씀, 주님, 모세, 회개, 구원, 은혜, 축복 등등 성경용어를 동일하게 사용하지만 그 해석이 엉터리요, 억지이며 순전히 맹종을 강요한다.
3) 그리스도의 종(10)
“사람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 이 말씀은 진리를 진리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들을 흔들어 깨우는 양심선언이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쉽고 편리하고 기분 좋게 하는 연설이 아니라, 영생복락으로 가는 길과 영원 불 못으로 떨어지는 길을 선택시킨다. 우리의 생명과 직결되는 인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의 특성은 절대성과 유일성이다. 하나님만 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여도, 주님은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하신다(마 7:22~23). 진리의 복음인지 속 내용을 잘 분별하고 속지 말라는 것이다.
요즘 이단들이 득세하네요. 가짜를 복음인 양 속이고 속은 것을 보면 안타깝다. 아무리 진짜처럼 속여도 가짜는 가짜이다. 이단들은 ‘가짜’나 ‘거짓’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전하는 사람보다 전하는 내용이 진리이고 복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전한 올바른 복음은 결코 사람들에게 좋게 하려는 게 아니었다고 밝혔다(“좋게 하다” πείθω ‘설득하다’, “아니니라” οὐκ ἂν ἤμην 우크 안 에멘. 미완료 형 “구하였다면” 과거형임, 과거 그때부터 아닌 것을 지속함). 불편하고 힘들어도 그리스도의 종을 선호하고 따르길 축복한다. 아멘.
은혜로 성도 여러분, 오늘 설교 말씀이 가리키는 화살표를 확인해 보자. “속히 떠나 복음 아닌 것을 복음인 양 속고 따라가는 교인들을 사도 바울은 보았다고 했다. 그런데 짝퉁은 어디 가나 짝퉁이다. 그런데도 짝퉁을 좋아하는 것은 쉽고 편리하기 때문이다. 겉모습이 아니라 속 내용이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을 비슷하게 하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어 세속적인 종교인일 뿐이다. 믿음도 교회도 천국도 빗나갔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확인해 보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