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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0일 설교

“영광이 세세토록!”(갈 1:1-5 ‘사도 확신’ 22.2.20)

영국의 화가 윌리암 홀만 헌트(William Holman Hunt 1827~1910)라는 화가가 1854년에 그린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이라는 유명한 성화가 있다. 이 그림은 선명한 조명으로 뚜렷한 명암 효과를 나타내고 있는데, 한 남자가 손에 등불을 들고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는 보석들을 단 외투를 입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있어서 ‘만 왕의 왕’을 암시해준다. 그리고 문 주변에 여기저기 마구 자란 풀과 특히 문 앞에 아무렇게나 자란 덩굴이 문을 타고 올라가 반쯤 덮고 있어서 문을 오랫동안 폐쇄하였음을 말해준다. 특히 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손잡이가 없다. 그러니 바깥에서 문을 잡아당겨 열 수 없다. 따라서 그 집으로 들어가려면, 안에서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 문은 사람들이 안팎으로 드나드는 통로이다. 그런데 문은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하는 곳이지만, 특정인을 거부하고 차단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만 왕의 왕’은 등불을 들고 집안에서 문을 열어줄 때를 조용히 기다리며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또 등불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나게 한다. 계 3:20에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렇게 성경은 마음을 열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자신의 대속제물로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는다.’라고 가르친다.

오늘 설교 본문에서 바울 자신은 십자가 예수님과 정통하고 있음을 이렇게 기록하여 놓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1 ‘사도’ ἀπόστολος 아포스톨로스<‘보내심을 받은 자’ 심부름 꾼, 사명자>로 뽑혔다고). ‘사도’는 예수님께서 밤새 철야기도를 하시고 12명을 선발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한 특별한 이론교육(course work)과 특수훈련을 시킨 후, 성령 충만하게 하여 파송한 제자들을 말하는데, 사도 바울은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에 정통한 사도인 것을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이런 말씀은 ‘함흥차사 박 순’을 생각나게 함.)

이성계가 조선왕국을 세우고 본부인의 아들 여섯을 제쳐놓고, 둘째 부인에게 낳은 막내 방석을 세자로 임명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다섯째 방원이 조선 새 왕조 7년 때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복동생 두 왕자 방번과 방석 그리고 세자 지지세력를 살해했다. 두 아들과 평소에 아끼던 정도전 등 심복을 잃은 태조 이성계는 상심하여 둘째 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궁궐을 떠나 떠돌았다. 왕위에 오른 정종이 간곡히 청하여 모셔왔다. 2년 후 방원이 스스로 세자로 앉더니 왕위에 오르자 분노한 태조는 이방원의 왕위를 거부하고 고향 함흥으로 낙향하였다. 이에 태종 방원은 자꾸 차사(差使)를 보내 태조 이성계를 모셔 오려 했으나 태조는 차사가 당도하면 죽이거나 가두어버렸다. 아비 이성계와 아들 이방원은 팽팽히 대립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심부름을 보낸 사람이 너무 늦을 때 ‘함흥차사’라고 일컫게 되었다.

이러니 누구도 함흥차사를 두려워했다. 그럴 때 충신 박순(朴淳)이 나서서 하인도 없이 망아지가 딸린 어미 말을 타고 함흥으로 가서 망아지는 나무에 매어 두고 어미 말만 타고 갔다. 박순과 이성계는 죽마고우였기 때문에 그들은 반갑게 술을 마시며 옛 정담을 나누었다. 그때 어미 말이 자꾸 울어댔다. 태조는 시종에게 알아보라 일렀다. 시종이 돌아와 아뢰었다. “태상왕 전하, 박 대감께서 타고 온 말이 우는 소리입니다.” 그때 박순은 태조 앞에 무릎 꿇고 애원하였다. “태상왕 전하, 하찮은 짐승도 저렇게 자기 새끼를 위해 지극정성이옵니다. 하물며 사람이 저 짐승보다 못해서야... 부디 통촉하시옵소서.”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던 태조가 입을 열었다. “천륜이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니...” 그러자 박순은 눈물을 흘리면서 절을 올렸다. 그런데 태조를 모시던 신하들이 박순을 암살하자고 자꾸 건의했지만, 태조 이성계는 그냥 박순을 한양으로 보냈다. 그가 용흥강을 건넜을 때쯤 태조는 신하의 건의를 받아 칼을 주며 “박순이 용흥강을 건넜거든 쫓지 말고 만약 건너지 않았다면 목을 베어라.”라고 명했다. 태조는 박순을 살리려는 셈이었다. 그러나 박순은 도중에 병이 나 지체하다가 용흥강을 벗어나지 못해 태조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자객이 돌아와 태조에게 사실대로 보고하자 태조는 “이런 충신을 죽이다니... 내가 그에게 한 약조를 어찌 번복하랴.” 하면서 슬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2사도 역시 모두 복음을 전파하는 삶을 살다가 순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 13권 이상을 기록했는데, 갈라디아서도 바울이 썼다. 바울이 쓴 다른 책들과 비교하면서 읽어보면 갈라디아서를 시작하는 서문은 좀 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서문은 대개 ‘보내는 사람’ ‘받는 사람’ ‘축복 인사’로 되어있는데 갈라디아서는 사도를 강조하며 길게 써 놓았다.

자, 그러면 오늘 설교 본문인 갈라디아서 서문을 좀 더 세밀하게 저랑 같이 살펴보자.

1) 사도(1)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Παῦλος ἀπόστολος, οὐκ ἀπ᾽ ἀνθρώπων οὐδὲ δι᾽ ἀνθρώπου ἀλλὰ διὰ Ἰησοῦ”) 1절 끝에 있는 “바울은”이 헬라어 성경은 맨 앞에 있다. 그런데 무척 길게 설명하였지만, 핵심은 바울 자신이 사도라고 밝힘이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임을 이중 부정과 이중 긍정의 어법으로 강조하였다. 먼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다. 그리고 두 번의 긍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고 밝혔다. 그런데 두 번의 부정과 두 번의 긍정하는 말 사이에 “오직”(ἀλλὰ 알라)이라는 접속사가 있다. 우리 말 ‘오직’은 ‘유일한’의 의미로 생각하기 쉬운데 원뜻은 ‘그러나’(δε 데)의 강조형이다. 전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도로 택하셨고, 때가 되어 바울을 부르시고 사도직을 감당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바울이 사도 됨은 사도행전 9장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님께 직접 훈련받은 적이 없기에 사도에 대한 시비를 당했는데, 이것은 아주 중요했다. 결국, 바울이 전한 복음의 권위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력이나 신분과 공로로 사도의 자격을 결정한다면, 바울은 예수님께 배운 경력은커녕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한 전력 때문에 아무리 회개해도 사도가 될 수 없다. 그러한 바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가 되었다. 그것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증거라는 것이다. 바울 자신을 사도로 인정하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원리를 받아들이는 문제와 직결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을 사람의 생각이나 사람에게서 난 게 아니고 하나님을 통하여 사도가 되었다고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ἀλλὰ διὰ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καὶ θεοῦ πατρὸς<“but through Jesus Christ and God” -NKJV, RSV-). 그렇다면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말씀을 오해하지 말자. 바울이 사도로서 신학적 자격과 실력을 실제로 갖추지 못했음으로 그것을 합리화하려는 게 아니었다. 바울이 말한 그 ‘행함’은 무엇이고 그 ‘믿음’은 무엇인지 혼동하지 말자는 거다.

2) 함께(2)

바울은 서한을 ‘보내는 사람’을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라고 밝혔다(οἱ σὺν ἐμοὶ πάντες ἀδελφοί 호이 쉰 에모이 판테스 아델포이 σὺν<쉰>은 한뜻으로 협력관계를 의미함, μετα<메타>는 공간적으로 같이 있음. ἐμοὶ<나에게>의 강조형. 특히 나 자신에게 친밀한 협력관계라는 것임. “All the brothers who are here join me” -GN-). 서한을 보내는 사람이 바울 혼자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이 전하는 서한의 내용은 뜻을 함께하는 많은 형제가 동의하고 친히 공유하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결국, 갈라디아서는 하나님을 통하여 세워주신 사도가 쓴 것이고 그 내용도 바울과 함께 동역하는 모든 형제가 인정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사도에게 동참하길 축복한다. 아멘.

3) 건지시려고(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구출작전을 알려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고 그래서 우리를 건져내셨다는 것이다(ἐξέληται 에크셀레타이 pluck out 많은 데서 과일이나 잎을 잡아 땀).

하나님이 보실 때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그렇다면 죄인 밭에서 골라 뽑아내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골라 구원하신 이유를 아는가? 답은 에베소서 1장 3-5에 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별하셨다.” 우리가 그토록 고귀한 존재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아멘.

물론, 그리스도인이 건짐을 받고 살아가는 곳은 여전히 죄악 세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죄악 세대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은 성령님이 하시는 보혜사로 우리를 돕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러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다른 마음으로, 다른 가치관으로, 다른 선택을 하며 차별되는 꿈을 꾸고 살아간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 때문이다. 이 삶을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대속 제물로까지 희생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세세토록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τῶν αἰώνων) 돌리는 일에 “아멘”(5) 할 수 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할 때, 내가 어떤 처지였는데, 그런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고, 그 일로 나는 어떤 혜택을 누리는지 실감할 때 하나님을 드높이며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충만하게 올림을 지극히 합당하게 생각한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의 뼈대를 간추리자. 바울은 자신이 ‘예수그리스도의 사도’임을 명심하고 기회만 있으면 고백하고 감사했다. 사도가 ‘심부름꾼인 종’이니 확실한 사실은 출세한 감투는 아니다. 바울은 자신을 사람들을 섬기는 종으로 인식하였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사도를 안타깝게도 특권으로 보기도 한다. 사도인식을 중요시한 것은 복음에 정통하게 하고 투철한 복음증인으로 살게 하기 때문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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