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13일 설교

“있을지어다!” (빌 4:23 ‘축도’ 22.2.13)

은퇴하신 목사님이 어느 교회의 주일 낮 예배에 참석하고 실망한 예배 소감을 인터넷에 올렸다. 그 내용인즉, 목사님이 예배를 시작하면서 “영광을 거두어 주옵소서”라고 말하고, 장로님은 예배기도를 마칠 때 “예수님 이름을 받들어 기도합니다.”라고 하고, 헌금기도는 “하나님, 축복해 주옵소서!”라고 하더니, 축도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감동 감화 교통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라고 하며 예배를 마치더란다. 사실 이 네 가지 예배순서는 황당할 만하다. 예배 원리를 무시한 용어들을 남발했기 때문이다. 예배순서는 예배의 기본원리상 두 방법(two way)으로 나눠진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예배자들에게 내려주시는 시간이다(예배선언, 용서선언, 말씀선포, 위탁과 축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예배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다(찬송, 기도, 신앙고백, 헌금).

그런데 황당하게 하는 게 뭣인가? ‘영광’을 하나님께서 거두시면 엄청나게 비참해진다. 삼상 4:21에 보면,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 시부와 남편이 죽었음을 인함이며”라는 말씀이 있다. 그렇다면 ‘영광’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에게 필수이다(“그는 또 성막과 제단 주위 뜰에 포장을 치고 뜰 문에 휘장을 다니라.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출 40:33-34 성막을 완성한 때>,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겔 43:4-5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천국 성전을 보여줌>,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받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합 2:15-16> 영광이 없음의 비극!). 그러므로 “영광을 거두어 주옵소서”라는 말은 성경과 너무나 모르고 기도한 셈이다.

또 “예수님의 이름 받들어 기도합니다”는 요 14:13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강조점은 예수님의 언약에 있지 ‘예수님의 이름’ 자체를 받드는 데 있지 않다. 그리고 “하나님, 축복하여 주옵소서!”라는 헌금기도의 ‘축복’(祝福 빌 축, 복 복. ‘복을 빈다’)은 신성모독(神聖冒瀆)이다. 하나님은 복을 실현하시지, 누구에게 복을 실현해 달라고 빌 수 없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게 하나가 있는데 바로 ‘축복’이다. 그래서 “축원하옵나이다”라는 말도 ‘축원하는 목사’가 제삼자로 있게 표현하지 않았음으로 잘못이라는 것이다.

오늘 설교 본문은 빌립보서 맨 마지막 말씀이다. 우리는 작년 10월 10일 주일부터 4개월간 주일마다 빌립보서를 말씀 여행하며 살펴봤다. 저는 믿음 삶의 교훈을 많이 알아차렸는데 여러분은 어떠했나요? 이제 설교 본문을 함께 읽어보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ἡ χάρις τοῦ κυρ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μετὰ τοῦ πνεύματος ὑμῶν. 직역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은혜가 너희의 영과 함께”). 이런 형식으로 축복하기를 즐겼던 분이 바울이었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몬 1:25>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갈 6: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살전 5:28> 이런 축복문이 바울서신에 26개나 있음). 그런데 우리나라 개신교의 축도의 성경 본문은 고후 13:13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축도(祝禱 빌 축, 빌 도. ‘빌고 빔’ ‘Benediction’)를 ‘복을 비는 기도’ ‘하나님이 예배드리는 자들에게 복을 내려주심을 목사가 선언하는(降福宣言) 예전의 순서’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모두 문제가 있는 설명이다. 축도는 4세기에 성찬예식 직전에 시행되다가, 중세기 때 예배의 끝 순서로 정착되었고, 종교개혁자들(루터, 칼빈)은 예배의 끝부분 때 아론의 축복 말씀을 그대로 선포하였고, 현재도 미국과 유럽의 교회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다(민 6:24-2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아론의 축복 말씀에서 복을 주시는 분은 ‘여호와’이시고 축복하는 자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분명하다. 이 사실은 아브람에게도 확실히 확인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그렇다면 목사는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심을 간절히 사모하며 알리는(祈願 optative) 입장을 벗어나지 않는 게 축도이다. 그래서 ‘선언’도 ‘축원’도 ‘강복’도 모두 주체(주어)가 1인칭언어임으로 중재자로 축복기원하는 축도에는 어긋난다는 것이다.

자 그러면 축도의 핵심내용은 무엇인지 저랑 같이 알아보자.

1) 주(κυρίου 퀴리우 κυρίος의 소유격)

‘주’라는 말씀은 ‘관계’(소속)를 의미한다. 이 관계를 성경은 주로 ‘부자관계’ ‘주종관계’ ‘목양관계’ ‘왕과 백성관계’로 설명하고 있는데, 바울은 자신을 빌 1:1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말했고, 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졌다고 밝혔다. 21에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라고 고백하였고, 3:8에서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실토하였다. 4:19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성도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라고 확신하였다. 이처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깊숙하게 정통했다. 누구든지 예수님과 정통하여 자신의 삶 전체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한다면 그게 성령충만이다.

하나님의 자녀 삶을 시작한 사람은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교인인데, 교회에 등록하고 예배만 참석하는 것을 열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다음은 제자훈련생이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닮기로 결심하고 사명 위주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이다. 그 다음엔 성도가 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교회에서 맡은 일에 책임지고 해내고, 또한 기도나 봉사 전도를 찾아 자원하는 일꾼, 사도행전 6장의 7일꾼이다. 그리고 12사도가 있다. 이들은 예수님을 배우는 데 힘쓰고 서로 사랑하며 최선을 다해 주님의 몸으로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에 초신자가 신앙인격(知 情 意 聖)을 가지도록 신앙 삶을 돕는 전도자이다. 우리 자신은 어느 형에 해당하는지 가늠해 보고 분발하자. 아멘.

2) 은혜

헬라어 성경에는, 맨 먼저 나오는 말이 ‘은혜’이고 26번 중 24번이나 압도적으로 많이 나온다. 은혜는 굉장한 의미와 필요성을 가지고 있다. 은혜(χάρις 카리스)는 ‘자격 없는 신자에게 그냥 주어지는 엄청난 특혜’인데, 그것은 선물인 영혼 구원과 동시에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알게 하는 수단이고, 성도답게 누리는 모든 신령한 복 생활을 포함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가득하면 생명력이 넘치는 신앙 삶을 살게 되고, 어떤 고난과 핍박이라도 이겨내며 소망 중에 감사 생활을 하게 된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2-4)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구원받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은혜의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받은 구원을 유지하는 것도 역시 은혜로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는 성도에게 믿음 삶의 일평생 무조건 필요 충족이다. 노아, 모세, 마리아, 스데반이 그랬다. 은혜로 살아가면 믿음 삶의 수준이 달라진다. 아멘.

3) 심령(ἡ χάρις τοῦ κυρ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μετὰ τοῦ πνεύματος ὑμῶν.)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의 영에 함께”라고 축복하고 있다. ‘영’은 그 사람의 속사람인 영혼이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 영혼과 늘 함께하고 있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유혹을 당해도 빗나가지 않는다. 그런데 가끔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다 예배의 감격을 잃고 조그만 일에도 삐지는 것은, 우리 심령에 주님의 은혜가 부족함으로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의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바로 나를 위한 구원사건으로 고백 되는 구원의 감격이 살아 있어 감정과 판단에 영향을 주느냐는 것이다.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프랑스의 ‘스트랄스 부르크’라는 도시에서 한 예배당에 세워놓았던 예수님의 동상이 폭격으로 하필이면 예수님의 두 팔이 떨어져 나가 있었다. 그래서 교회의 중직자들이 모이고 그 동상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의논하였단다. 두 팔만 복원시키자는 의견, 아예 전체를 새롭게 만들자는 의견으로 나눠졌다. 그런데 한 분이 이렇게 제안했다. “폭격 맞아 두 팔이 없는 동상 그대로 놔둡시다. 그리고 그 아래 이렇게 써 둡시다. ‘예수님은 당신과 나의 팔과 손을 필요로 하십니다.’” 모두가 감동을 받고 찬성하였단다.

주님은 우리를 통하여 일하길 원하신다. 고통받는 이웃들의 아픔을 공감함으로 그들에게 찾아가서 주님의 손이 되어 붙잡고 그들의 눈물을 위해 중보기도 한다면, 그 순간 그 사람은 주님의 손발인 것이다. 우리의 손이 그리스도의 손이 될 때 틀림없이 예수님의 사도인 것이다. 전광훈 목사에게 질린불신자들이 감동하기 시작할 것이고, 개독교들은 마음을 열기 시작할 것이며, 사회는 변하기 시작할 것이다. 바로 이 부르심 앞에 저와 여러분이 있다. 한 해라도 동참해보자. 아멘.

‘축복’ ‘축원’ ‘축도’라는 말은 목사가 강단에서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예배시간에 기원하는 축도를 흔히 축복기도 즉 복을 빌어주는 기도로 오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이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분명한 것은 예배 ‘본다.’와 ‘드리다.’가 다르듯이 ‘축복해 주옵소서’ 와 축복을 실현해주옵소서’는 분명하게 다르다. 축도는 그날 선포된 설교의 내용을 요약한 것도 아니고, 교회의 평화나 예배자들의 평안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복주심을 확신하여 알리고 기원하며 엿새로 나아가게 함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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