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4일 설교
“불타는 믿음!”(딤후 1:3-9 ‘믿음의 유산’ 22.12.4.)
어느 신학대학 교수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며칠 후에 죽는다’는 가정하에 유서를 작성해보라고 했단다. 재산분배를 위하여 변호사를 찾아가 공증하는 그러한 유서가 아니라, ‘자신이 천국 가면서 꼭 전해주고 싶은 중요한 심정’에 초점을 맞춘 유서였다. 그 수업을 듣고 목사인 나도 내 일생을 정리하는 기회로 삼고 ‘저의 마지막 시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과연 나는 죽을 준비를 잘해 두었는가? 우선 내 마음대로 살았던 날이 많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후회해도 내가 과거로 되돌아가서 다시 살아가게 할 수는 없다. 이제라도 남은 삶을 하나님의 계획을 알차게 이루는 게 죽음 후에 있을 심판을 잘 준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제가 심판대에 섰을 때 주님이 저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평가해 주신다면 더는 바랄 게 없지요. 그러려면 앞으로 나는 먼저,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고 육신의 사지를 움직일 때까지 주님의 십자가를 전해야 한다. 그러려면 이 세상을 이겨내는 신앙관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감사하며 죽을 수 있게 살아가련다.
성경은 심판을 두 가지로 말하고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의 심판이다. 이 심판은 영생과 영벌을 결정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회개하고 십자가 대속제물이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았으니 그 후에, 이 세상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왔느냐를 총평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계획실현에 동참한 일들에 대하여 저울질하는 자리이다. 또 하나의 심판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인데, 요한 계시록 20장에 “크고 흰 보좌의 심판”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흰 보좌 심판은 엄밀히 말해서 사람들을 천국과 지옥으로 분류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들은 모두 불신자로 살았으므로 당연히 지옥 백성이다. 다만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살았던 삶에 대하여 형벌의 수준을 결정하는 심판석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점은 그 심판석에 교인들도 섞여 있다는 사실이다.
설교 본문에는 ‘생각한다’라는 말이 4번 나오는데,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3) “네 눈물을 생각하여”(4)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5),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6)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자주 생각해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감사해지고 가까이하고 싶었으나, 한편으로는 아쉬운 점도 분명해졌다고 설교 본문에 밝혀놓았다(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ἐπαισχυνθῇς 에파이스퀸쎄스 ἐπαισχυνομαι 에파이스퀴노마이의 단순과거 수동태 be ashamed of 당황하며 수치로 받아들여지는 것! 디모데 목사님이 정작 수치로 받아들인 게 뭐였는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do not be ashamed of the testimony of our Lord nor of me His prisoner,” -NKJV- 예수님에게 소속된 죄수인 바울을>).
그리고 “함께 고난을 받으라”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복음증거에 따르는 학대를 서로 분담하자”(ἀλλὰ συγκακοπάθησον 알라 슁카코파쎄손 συν<쉰, with> + κακοπαθέω<카코파쎄오 to suffer affliction or evil>라는 뜻이다. 그래서 디모데 목사님의 소극성, 소심함, 여성스러운 점은 분명하지만 外柔內剛이었다. 디모데 목사님을 자세히 살펴보면 훌륭한 강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감옥에 갇혔을 때 디모데 목사님을 빌립보 교회에 보내겠다고 편지하였고(빌 2:19), 바울은 자신이 쓴 성경 가운데 6권을 디모데 목사님이 성경기록을 도왔다고 밝혀놓았다(고후 1:1, 빌 1:1, 골 1:1, 살전 1:1, 살후 1:1, 몬 1:1). 또 바울이 자신의 임종을 예감하게 되었을 때, 디모데 목사님을 찾았고 ‘속히 오라’고 하였다(딤후 4: 19). 그리고 디모데 목사님도 한때 감옥에 갇혔다가 석방됐다(“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히 13:23 ἀπολελυμένον 아폴렐뤼메논 ἀπολύω 아폴뤼오 to release from a tie or burden, librate, forgive. 완료분사 수동태>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어느 권사님이 새 예루살렘 성을 둘러보게 되었단다. 예루살렘 성은 높다란 시온산 꼭대기에 가지가지 보석으로 웅장하게 잘 지어져 있었다. 권사님이 한 진주 문 앞에서 문을 두드렸더니, 천사가 문을 열고 내다보더란다. 그래서 “저는 대한민국 교회에 다니는 아무개 권사입니다.” 천사가 설명해주었다. “이 성은 믿음생활을 하는 성도만 들어올 수 있는데요.” “아, 잘됐네요. 저는 서울에 있는 세 교회에서 집사로 10년, 대한민국교회에서 권사로 3년 다녔습니다.” 천사가 핸드폰으로 찾아보더니 “아무리 권사로 3년을 교회 다녔어도 믿음으로 충성한 일은 고사하고 권사님 명단에 없고 집사 명단에도 없는 데요.” 그러자 그 권사님이 “우리 교회 목사는 누구이고, 부목사들, 장로들, 권사들은 누구누구입니다.” “그렇게 교회를 오래 다녔다면 믿음 없이 다닌 모양인데, 그러면 다니는 교회마다 꼴통이라서 이름을 기록할 수 없었나 봐요. 이름이 없으면 천국에 올 수 없답니다.” 그러고 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 쾅 소리에 잠을 깨어 보니 꿈이었다. 그게 꿈이었기에 다행이지 큰일 날 뻔했다.
자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믿음생활이 심판대에서 헛일로 판명되지 않으려면 무엇을 잘해야 하는가? 사도 바울이 데모데 목사님에게 강권하는 글을 다시 살펴보자.
1) 청결한 양심(3)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디모데 목사님은 양심을 따르는 가문에서 자랐다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다른 피조물보다 위대하게 창조하신 몇 가지 중 하나가 양심이다. 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골방인데, 그리스도인에게 청결한 양심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이고, 한없이 중요한 하나님의 파수꾼이며, 신앙생활의 나침반이다. 이 양심은 항상 진실의 편에서 반응한다. 그러니 디모데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천국백성으로 살아가는데 아주 유리한 신앙인이었다(“섬겨오는” λατρεύω 라트류오<현재형, 진행 중> “I worship with a pure conscience my fathers,” -Amf-).
물론 양심 그대로 살아간다고 하여도 그 삶을 다 신앙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양심이 더러워지면 하나님과 교제가 어려워져서 그 사람의 언행과 삶은 점점 위선으로 변질하게 된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 범죄 때 우리 인간의 양심은 하나님께 순종할 능력을 상실해지고 말았다. 그래서 양심의 종류가 다양해졌다. 더러운 양심이 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딛 1:15. 죄에 오염이 되어 빛으로 나오려 하지 않고 오히려 빛보다 어두움을 좋아하는 사람들임). 또 화인 맞은 양심이 있다.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딤전 4:2. 양심의 신경이 쇠약해져서 죄에 대한 감각이 둔해졌다는 것임). 청결한 양심으로 믿음생활을 하길!
2) 눈물(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마다 세 가지 액체를 흘린다. 그것은 땀과 피와 눈물이다. 땀은 수고할 때 흘린다. 땀을 많이 흘린 자는 근면하게 살아가는 자이다. 그리고 피는 희생을 입증해준다. 순교나 순직은 헌신하는 동안에 이루어진다. 그런데 눈물은 공감함의 표현이다. 사람이 슬픔을 공감할 때 눈물을 흘리고, 감격해도 눈물을 흘리며, 때로는 회개하며 아파할 때 눈물을 흘린다. 어떠한 눈물이든지 눈물을 흘리는 때는 진실하고 순수하며 성숙해진다.
열왕기하 22장에 보면 요시아 왕은 성전을 수리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책을 발견하여, 그것을 서기관에게 읽게 하였다. 왕은 말씀을 들을 때 옷을 찢고 통곡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빗나간 것을 회개함의 표시로 마음을 찢는 심정으로 왕복을 찢고 통곡한 것이다. 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사 38:4-6). 우리 하나님 앞에서 눈물의 위력은 엄청나다는 것이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가르쳤다. 눈물이 마르지 않는 믿음생활이기를 축복한다. 아멘.
3) 거짓 없는 믿음(5)
“거짓이 없는 믿음”을 디모데의 외할머니 로이스는 어머니 유니게로, 유니게는 아들 디모데에게로 3대째 유산으로 전하였다는 거다. 디모데를 낳은 아버지는 헬라인이었고, 디모데의 생모 유니게는 유대인이었다. 그렇다면 유인인의 특성상, 디모데가 거짓 없는 신앙인이 된 것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영향이었음이 자명하다. 디모데는 여러 수준의 믿음 중에 거짓 없이 순도 높은 믿음을 소유했다. 위선적이거나 형식적이 아닌 진실한 믿음이 삶을 만드는 그러한 신앙인이었다는 것이다. 성도에게 최고의 장점은 믿음이다. 믿음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엄청난 무기이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그런데 디모데는 바울처럼 열정적인 믿음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조용히 은근하면서 그러나 끈기 있는 믿음으로 살아갔음을 오늘 설교 본문도 보여준다. 그것은 디모데가 매사를 자신이 결정하기보다 어머니가 결정하고 인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아들이 스스로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그러한 믿음 생활을 하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어려워진다.
믿음 생활을 마음껏 하려고 찾아온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가 미국이다. 그들은 신대륙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한 일이 예배당을 지어 신앙생활을 하였고, 그다음은 학교를 세웠다. 그러면서 영국과 맞서 싸웠고 마침내 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국가를 세웠다. 그러고 그 독립 기념으로 화폐를 발행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그 돈에 “IN GOD WE TRUST”(우리는 하나님을 믿노라)라고 인쇄해 두었다. 그런데 그들은 돈을 셀 때 지폐를 밖으로 밀어낸다. 우리는 반대로 자기 쪽으로 돈을 당기잖아요. 우리가 “이 돈은 내 거야! 내 거야!” 하고 돈을 셀 때 미국인들은 “이 돈은 내 거 아니야! 하나님 거야!”하고 센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복 받기를 원한다. 그런데 진짜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살아가야 한다.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제일 귀하고 요긴하게 여기는 돈에다가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해 놓고 “이 돈은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것!”하고 하던 미국은, 지금도 세계 최대 강국으로 군림하잖아요.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자녀 삶을 신앙고백과 일치하게 해가길 축복한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 말씀을 경청한 성도답게 반응할 삶을 정리해 보자. 옛말에 “부자는 3대를 못 간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자녀에게 물려 줄 가장 중요한 유산은 재물보다 믿음이다. 6절에는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은사를 다시 불일 듯 하게”라고 했다(“to fan into flame the gift of God” -NIV- “to stir up the gift of God” -NKJV- 디모데의 믿음 생활을 활성화함) 믿음 삶을 동사로 하길!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