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31일 설교
“늘 성전에서 찬송하자!”(눅 24:44-53 22.12.31)
어느 아주머니는 늦둥이를 낳고 나니 정류장으로 다가오는 버스의 번호를 얼른 식별하지 못할 만큼 현저하게 시력이 나빠졌단다. 그래서 안경을 맞춰 쓰고 다니는데, 안고 있는 아기가 자꾸 안경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안경을 거의 안 쓰게 되었다. 그러다가 안경을 안 쓰면 눈이 더욱 나빠진다는 권면도 받았고, 아이도 걸어 다니고 해서 안경을 새로 맞추었다.
새 안경을 쓰고 거리로 나서던 날, 그 아주머니는 그동안 얼마나 희미한 세상에서 살아왔는지 실감하게 되었단다. 버스의 번호는 물론 사람들의 얼굴 표정까지 잘 보이니까, 판단과 선택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성경을 읽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아 자주 성경을 읽었는데, 요한복음 16장 13절 14절을 읽다가 ‘안경을 쓴 것처럼 밝게 신앙생활을 하는 법’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인도하시리니’<ὁδηγησει 호데게세이 he will guide>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οὐκ γαρ λαλησει αφ ἑαυτου αλλα 우크 가르 랄레세이 아프 헤아우투 왜냐하면 자신의 것으로 절대로 아니하고 오히려> ‘들은 것을’<ακουσει 아쿠세이 he will hear> ‘말하며’<λαλησει 랄레세이 he will speak> ‘너희에게 알리시리라’<αναγγελει 아낭겔레이 he will disclose>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εμε δοξασει 에메 돜싸세이 he will bring glory to me –NIV->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εμου λημψεται και αναγγελσει 에무 렘페타이 카이 아낭겔세이 he will receive and he will know> 성령은 하나님의 뜻에게로 안내해주시고, 알아차리게 해주시며, 하나님의 영광과 연결시켜주신다는 것이니, 최고 최대 최적의 도우미임!).
그래서 새 안경을 쓴 아주머니는 성경을 읽다가,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생각을 더욱 잘 보고 알아차릴 수 있게 도와주시는 해결사 성령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생각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올바로 알아차린다고 생각해보자. 이것은 새 안경을 쓰고 시내를 활보하는 아주머니처럼 신앙의 희미한 시야를 또렷하게 볼 수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성경을 더 밝고, 더 깊이, 훨씬 더 확실하게 알아차리게 되므로 얼마나 감격, 감사하겠는가! 그야말로 ‘할렐루야!’이다.
오늘 설교 본문도 우리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심 바로 전에 11제자들과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따르던 교우들에게 ‘증인으로 신앙생활을 해가라’라고 강권하신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47-48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μετάνοιαν εἰς ἄφεσιν ἁμαρτιῶν 메타노이안 에이스 아페신 하마르티온, μετά<together, with, after, behind> + νοεω<conceive, understand, thought, frame of mind> 마음의 구조 틀을 몽땅 바꾸고 죄 용서를 받는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 = 얼마나 올바로 이루어지는지!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욜 2:12-13>. 또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렘 4:3-4>).
수많은 선교사님 가운데 교과서적인 선교사로 평가받고 있는 분이 영국 출신 William Carey 선교사이다. 그는 인도에서 놀랍게도 34개국어로 성경을 번역하였다고 한다. 캐리 선교사님이 노년에 다시 인도를 방문하였는데, 어느 모난 사람이 케리 선교사를 망신시키려고 이러한 질문을 하였단다. “케리 선교사님, 당신은 선교사의 일을 하기 전에는 구두 만드는 일을 하였다면서요?” 그러자 케리 선교사님이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잘못 알고 계시네요. 저는 구두를 만드는 재주는 없고 다만 구두를 기웠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일부러 비난하는 질문을 당해도 화를 내지 않고 웃으면서 대답할 정도라면, 케리 선교사님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겸손하게 순종하고 살았는지 가늠할 수 있게 한다. 바로 이러한 점을 저와 여러분이 배우고 실행할 때 성경을 쓰기만 하는 신앙생활과 비교할 수 없는 신앙 수준이라는 것이다. 아멘.
자 그러면 저와 여러분도 어떻게 하면 케리 선교사처럼, 회개를 올바로 이루고 증인수준으로 신앙생활을 해가게 되는가? 설교본문에서 우리 예수님의 처방을 좀더 세밀하게 살펴보고 챙기자.
1) 마음(45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διήνοιξεν(디에노이크센 to open the sense of a thing, to understand and receive)
αὐτῶν τὸν νοῦν(눈 intelligent, 지식적으로 알아듣고 이해하며 수용하는 능력을 마음이라고 했음) τοῦ
깨닫게(συνιέναι 쉰에이나이 comprehend thoroughly, perceive clearly, to be well-judging. 말씀의 참뜻을 알아차림) τὰς γραφάς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는 것은 한 마디로 잠자는 사명의식을 흔들어 깨우신 일을 말한다. 아무리 큰 시련에 시달려도 사명의식은 꿈틀거려야 전도하는 증인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하신 분이 우리 예수님이었음을 설교 본문이 말해준다. 아멘.
우리나라의 전도 초창기에 기독교인들이 장례식 중에 찬송가를 불렀는데 그것은 유교 상식상 상상도 못할 일이었단다. 장례 중에 시간을 맞추어 사망을 슬퍼하며 곡을 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기독교인들은 장례식 때 찬송을 하였는가? 그것은 죽음을 몰아내는 부활의 천국이 실존함을 확신하였기에 슬픔 중에도 한편으로 위로를 받으며 감사함을 찬송하였다. 우리 성경은 부활을 확실하게 증언해주고 있다. 아멘.
2) 머물라(49)
“위로부터”(ἐξ ὕψους 엨크스 휲푸스, 출처가 이 세상이나 인위적이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출처가 하나님이라는 그것은 “능력 δύναμις” ‘하나님의 전지전능’ ‘기적을 이루어 구원을 이루는 힘’). 이러한 이치를 볼 때 예수님의 증인들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도우심을 지원받게 되어 있다. 특히 “입혀질”(ἐνδύσησθε 엔뒤세스쎄 ἐνδύω to put on, clothe의 Aor. ‘성령이라는 옷’을 입는 것). 성령으로 보쌈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의 온전한 통제가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17-19에 이렇게 밝혀 놓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새번역’은 18을 이렇게 번역했다.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과 상속의 풍성함을 올바로 안다면 세상중심으로 빗나갈 교인은 단 한 분도 없다는 확신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언약해 두신 크고 놀라운 축복의 삶이 실존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해당하기를 축복한다.
3) 성전에서(53)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καὶ ἦσαν<미완료> διὰ παντὸς<all, every, whole> ἐν τῷ ἱερῷ εὐλογοῦντες<praising, “praising and blessing” -NKJV-> τὸν θεόν. “And they stayed continually at the the temple, praising God.” –NIV- +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49 ἐπαγγελίαν, ἐπαγγελλω declare, pronounce, undertake, promise. 하나님은 먼저 선포하시고 착수하여 성취하심) + 깨닫게 하심(45 συνιέναι 쉰에이나이 comprehend thoroughly, to be well-judging. 참뜻을 알아차림). 그렇다면 ‘성전에서 찬송하니라’는 단순히 예배당에서 찬송만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 법칙을 깨닫고 맞게 순종함이 찬송으로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어느 나라든 민족이든 말과 행동으로 인사를 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인사를 할 때 주로 과거의 일을 육체적 현상으로 물어본다. ‘먹었느냐’ ‘잘 잤느냐’ ‘아무 일 없었느냐’ 등등. 그러나 성경의 인사는 미래에 중점을 두고 앞날을 축복한다. ‘살롬!’ 하나님의 임재로 이루어지는 안전과 질서, 평강이 지속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살롬’ 인사는 하나님의 법을 따른다는 신앙고백이 담긴 기도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법을 잘 따를 때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언약을 이루시며, 감격하게 도우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란다. 아멘.
자 오늘 새해 첫 새벽 출발점에 서서 우리의 삶 방향을 확인해두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사망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직후에, 11명의 제자를 찾아가 만나봤더니 패잔병처럼 무기력하고 두려워하며 방 안에 숨어 있었고, 그러다가 결국 그들은 옛날에 하던 일을 다시 하려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예수님을 열렬하게 추종하던 일은 한때 현상이었고 신앙 삶이라고 내놓을 것은 없었다. 맞다. 쓸모없이 무익한 제자들이었다.
‘유종의 미’라는 말을 할 때가 있다. ‘한번 시작한 일을 끝까지 잘하여 맺은 좋은 결과’를 말한다. 바로 우리 예수님이 오늘 설교 본문을 통해 ‘유종의 미’를 제대로 보여 주셨다. 이제 예수님의 마지막 시간이 되었다. 예수님은 곧바로 하늘로 올라가시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없이 이 세상에서 믿음 생활을 해가야 했다. 제자들은 내가 크냐? 네가 크냐? 이 이익에 따라 다투는 소인배들이었다. 그러한 제자들을 사도행전의 제자들로 바꾸는 ‘유종의 미’를 예수님이 이루셨다. 그것은 성경을 깨우침과 언약확신으로 찬송하고 기도하며 축복하게 함이었다(“celebrating with praises and blessing and extolling God” -Am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