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25일 설교
“생각해보라!”(딤후 2:1-7 ‘예수님의 좋은 군사’ 22.12.25)
오래오래 전에 스코틀랜드에서 있었던 일인데, 어느 날 목사님 두 분이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단다. 한 목사님이 탄식을 이렇게 했단다. “나는 지난 3년 동안 내 나름대로 성실하게 목회를 하였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실제로 거듭난 성도는 단 한 분밖에 없었네요.” 그러면서 그 거듭난 성도는 로버트 마펫이라는 청년인데, 그 청년이 3년 동안의 목회사역을 통해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어갔는지 설명하더란다. 그러자 그 설명을 듣고 있던 다른 목사님도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단다. “나는 최근에 우리 교회에서 한 주간 동안 부흥집회를 하였는데, 커다란 기대와 달리 딱 한 사람만 등록하더군.” 그런데 여러 해가 바뀌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한 목사님을 통하여 거듭나 3년간 지도받았던 로버트 마펫은 아프리카 선교의 초기 선교사가 되었고, 일 주일간 부흥 집회 때 유일하게 등록하였던 그 청년은 데이비드 리빙스턴이었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대륙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씨뿌린 전도 탐험가였다.
내가 가지고 있지만 사용할 수 없는 것들을 예수님께 맡기고, 대신 사용 가능한 새것들을 예수님께 받아가는 그 교환하는 곳이 교회이다. 어거스틴은 사생아를 낳을 만큼 방탕한 밑바닥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교회 역사상 거물이 되었다. 어거스틴 이름 앞에 Saint(성자)를 붙여 부른다(St. Augustine). 이 세상에서 아무리 버림받은 사람도 교회에 몸담으면 금 그릇같이 귀하게 우리 창조주 하나님께서 변화시키신다.
오늘 설교 본문도 사도 바울이 목사 디모데에게 주님의 일을 믿음으로 소신껏 하라고 신신당부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한다(1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Σὺ οὖν, τέκνον μου, ἐνδυναμοῦ ἐν τῇ χάριτι τῇ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쉬 운<도치법, 강조> 테크논 무, 엔뒤나무<ἐν + δυναμοῦ = empower, to acquire strength, ἐνδυναμοω의 현재 수동태 ~에게 권능이 부여되고 있음> 엔<in 제한된 영역> 테 카리티 테 엔<in 제한된 영역> 크리스토 이에수,).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 목사에게 당부하는 말씀의 핵심은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이다(“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πληρης 플레레스 abounding in, complete, full, perfect. 예수님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분한 상태였음. 은혜란 하나님의 호의를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그냥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임. 즉 죄용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심, 권능과 은사를 주심, 일꾼 삼으심... 이게 다 하나님의 은혜임>. 그 은혜와 진리를 적재적소에 알맞게 활용함이 강함임).” 내 아이디어로 선한 일을 많이 하고, 내가 의롭게 충성을 잘해서 많은 사람에게 칭찬을 받기 때문에 그런 점을 ‘강함’이라고 한 게 아니다. “은혜 가운데 강하다”라는 말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감사 감격하여 잘 활용하는 점이 탁월함을 강조한 표현이다. 예를 들면 기도를 열심히 하는 교인을 세밀히 보면, 아주 열정적으로 기도를 하는 이유가 하나님께 축복을 받으려고 몸부림을 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가 감사함으로 열심히 기도하고 충성하는 이 열정을 바울은 ‘강한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옥 백성인 나를 은혜로 선택하시고 나를 구원하여 주신 후에, 오늘도 나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겨주시니 한량없이 감사합니다.’라고 하게 된다. 이러한 감사는 자원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헌신과 충성을 ‘답게’ 해내는데, 이게 바로 ‘은혜 가운데 강함’이고, 여기에 성탄의 참된 의미가 있고, 성탄의 올바른 영향과 진실한 결실이 있는 법이다. 경유하는 성탄절과 다르다는 것이다.
여호수아서 14장에서 우리는 갈렙의 용맹을 볼 수 있다. 갈렙이 누구인가?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정탐 때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을 보여주었던 유다지파의 지도자였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족속을 정복한 후에 각각 지파 별로 땅을 분배하였다. 그때 갈렙은 85세 젊은 노인이었다. 그런데 그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헤브론 산지를 자신에게 할당해달라고 자원하였다. 갈렙이 요청했던 산지는 씨 뿌리고 양을 치기에는 부적합한 땅이었고, 가나안의 원주민 중에 거인족이었던 아낙자손이 있었다. 전투에 불리한 산지요 목축에 불편한 가파른 땅이었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수 14:12)
얼마나 분명하게 믿음을 보여주는지! 85세 중년 노인이 산지를 달라고 자원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 신앙의 행동화였다. 설명 신앙이 아니고, 말로만 끝내는 믿음이 아니라 삶을 만드는 신앙이었다. 이런 신앙생활을 저와 여러분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다면 성경을 안 써도 괜찮다.
자 그러면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갈렘처럼, 바울처럼 실제 우리의 삶으로 만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가? 설교 본문에서 바울이 디모데 목사에게 전수하는 그 모습을 좀 유심히 보고 배우자.
1) 부탁(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παρʼ ἐμοῦ 파르 에무<나 자신> from, origin)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παράθου πιστοῖς, 파라쑤 피스토이스)(παράθου, παρατιθημι to place by the side of, near. 딤전 4: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ὑποτιθημι 휘포티쎄미 ‘밑에 놓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강한 신앙인은 무엇을 하는지 보여주었다. 다음 세대에 복음을 전승하는 것이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 전승을 네 단계로 가르쳤다. 첫째는 하나님으로부터 바울 자신이 복음을 받았다. 둘째는 그 복음을 디모데에게 전승했다. 셋째는 디모데는 충성된 사람들에게 깨우쳤다. 넷째는 충성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 깨우친다. 이것은 마치 올림픽의 성화를 전달하는 것과 같다. 복음의 대를 이어가는 교회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자교육이 아니라 제자훈련이었다. 훈련은 이론을 실제로 연습하여 습득하는 것이다.
2) 고난(3)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συγκακοπάθησον 슁카코파쎄손 συν + κακοπάθεω to show endurance in trials and afflictions 누구와 함께 = 혼자 아님!)” 우리 예수의 병사들은 알든 모르든 마귀와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다. 군인의 최고 미덕은 자신을 희생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군인은 전쟁에 대비하여 철두철미한 훈련을 받고 백전백승을 목표로 삼는다. 또 군인은 명령복종은 군인정신의 핵심이고 생명과도 같다. 명령 불복종은 전쟁 때는 총살이고 평시에도 가혹한 벌을 받는다. 그리고 예수의 좋은 병사는 법대로 경기하는 운동선수와 같다고 했다. 어느 경기나 규칙이 있는데, 지키지 않으면 경고를 하다가 퇴장이나 실격, 패배 처리한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성경 말씀과 교회법을 잘 따라야 좋은 성도라는 것이다.
성경에는 좋은 성도를 사울 왕으로 설명해 놓았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사울 왕은 전쟁을 승리한 후에 인간적인 생각을 하였다. 소와 양, 염소를 불태워 없애느니 살려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면 좋겠다는 생각대로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 사울은 승리의 기쁨에 빠져서 승전비도 세웠다. 그러자 선지자 사무엘이 와서 사울 왕을 책망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2-23)
사울의 순종은 선택적 순종, 부분적 순종이었고, 자신의 유익을 살리는 순종이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에 대충 맞추었다. 그래서 사울 왕은 왕의 자리를 박탈당하고 말았다. 성경은 목사든, 장로든, 집사든, 권사든, 찬양대든 모두 하나님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위해 세우신 일꾼이다. 순종은 기본이다. 그런데 고난이 따르지 않는 순종은 없다. 명심하길 축복한다. 아멘.
3) 총명(7)
“내가 말하는(λέγω 레고 “I am saying” -NIV-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로 강하게 신앙생활을 함) 것을 생각해보라(νόιεω 노이에오 “Reflect” -NIV-).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σύνεσιν 쉰에신 “inshight and understanding” -Amf-)을 주시리라.”
많은 고난 속에서 복음을 전승시키는 설명을 곰곰이 생각해보라(Reflect)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그 설명에 대한 이해(식견, 통찰력, 순종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실 것이라고 응원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힘든 일을 당했을 때 ‘욕봤다’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욕’(辱)이라는 말은 한자로 별 진(辰)과 마디 촌(寸)이 결합한 글자이다. 별 진(辰) 글자는 밤하늘의 별들을 가리키는데, 옛날에는 별자리의 움직임을 보고 시기를 판단하였고, 마디 촌(寸)자는 손목에서 손가락 마디만큼 떨어진 곳에 맥이 뛰는 자리라고 해서 법칙, 규칙을 의미했다. 그래서 옛날에는 별의 움직임을 무시하고 놀면 그 사람에게 그 고을의 원님이 벌을 주었다. 그래서 ‘욕’(辱)은 농사를 지을 때 때를 놓치는 게으른 농부나 분별력이 없어 마을 일에 협력하지 않는 사람을 혼내주는 일을 가리켰다. 그래서 혼내는 벌을 욕할 욕(辱) 자로 표현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욕(辱)을 당해 본 사람은 얼마나 수치였겠는가?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이다. 게을러 기회를 놓치고 창피한 욕을 보지 않기를 바란다. 누가 찾아와 손 내밀기를 바라기 전에 다가가 인사하고, 먼저 친절을 베풀고 고난을 피하지 않는 능동적인 신앙생활로 그리스도인의 몸된 교회를 건강하게 만들어 가길 축복한다.
캘리포니아의 세퀘어(square) 나무는 300피트(91m)정도의 높이까지 무성하게 잘 자란단다. 특이한 것은 이 거목의 뿌리가 얕고 사방으로 길게 뻗는데 대개 군락을 이룬단다. 그래서 나무들의 뿌리가 서로 뒤엉켜 거센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도록 서로 지지해준다는 것이다. 우리도 스퀘어 나무들처럼 사방으로 길게 역지사지하여 아픔을 나누고 중보기도로 상부상조하는 교회 공동체이길 축복한다.
자 이제 오늘 설교를 매듭짓자. 복음의 4세대가 이루어진 교회, 이루어가는 교회, 이루려는 교회가 좋은 교회이다. 우리 은혜로교회의 복음 4세대로 자원하고 심판대를 기대하는 성도가 많아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