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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8일 설교

“그날에 긍휼을 입게!”(딤후 1:15-18 ‘충성과 배신’ 22.12.18)

성탄 트리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밝힐 수 없지만, 1605년 독일에서 성탄절 때 나무로 장식하였다는 기록이 있단다. 성탄 트리의 나무는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와 예수님이 속죄제물로 매달리신 십자가 나무를 상징하여 전나무나 상록수를 사용했고, 성탄 트리 초기에는 나무에 사과와 빵, 장미, 초를 장식하였는데, 사과는 선악과를 의미했고, 빵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의 몸을 의미했으며, 장미는 절망을 물리치려고 생명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의미하는 장식물이었고, 초도 이 세상의 어둠을 빛으로 바꾸려고 오신 예수님을 의미했다고 한다. 그리고 동방박사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 주었던 별도 성탄 트리의 꼭대기에 장식했다. 그렇다면 성탄 트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강조하여 묵상하게 해주는 장식이다.

그런데 지난달 26일 명동성당 앞에 세워진 성탄 트리를 ‘블랙 트리’라고 부르고 있다. 그 성탄 트리는 강원도 산불 피해로 불에 타다 남은 새까만 나뭇가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측은 “매년 봄철 반복되는 산불 피해 재난과 기후변화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갖도록 하려고 만들었다.”라고 설명했는데, 내년 1월 8일까지 명동성당 앞에 놔둘 예정이란다. 그러면서 성탄 음악회나 공연, ‘성탄 시장’ ‘성탄 맛집’ 등등으로 기부금을 마련하여 무료급식이나 구제품, 구제금으로 나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탄 트리는 기쁨과 희망만을 강조하는 ‘즐거운 성탄절(Merry Christmass)’ 일색으로 단순화시키기보다 ‘죄송한 성탄절(Sorry Christmass, Sad Christmass)까지 폭을 넓히겠다는 의도라고 본다.

지금 우리가 함께 살펴볼 설교 본문도 희비애락에 깊숙이 빠진 모습을 보여준다. 사도 바울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두스드라 성에서 전도하다가 돌로 얻어맞고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내다 버려진 일을 당하였고, 자주 비난과 음모로 암살 표적이었으며, 감옥에 끌려가 중죄인처럼 매를 맞았다. 그런데 바울은 마음속으로 원망을 했는지 모르지만... 자기를 모함하여 죽이려는 그 사람들에게 혈기 부리며 원망했다는 성경 구절은 없다. 그렇지만 설교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의 마음에 깊숙이 새겨진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 사람들은 부겔로와 허모게네 그리고 오네시보로였는데, 다 바울이 전도한 교우들로 보인다. 부겔로와 허모게네는 바울의 마음에 못을 박아서 마음 상한 자국을 남겨주었지만, 다행히 오네시보로는 한없이 고마운 성도로 각인시켜주었다. 알고 보면 우리의 인생살이는 이웃의 마음속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고 반대하는 교인으로 이름을 목자 마음에 새길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가 힘들어질 때 희생하고 충성하여 유쾌한 분위기로 바꾸어내는 일꾼으로 이름을 남길 수도 있다. 이웃이 쓰러졌을 때 가서 짓밟는 깡패가 아니라 두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는 친구로, 짐을 나누어지는 응원자로 이름을 새기는 분도 은근히 많다. 그렇다면 내 이름은 어떤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는지 냉정히 점검해 볼 일이다.

설교 본문에 “나를 버린 이 일”이라는 말씀이 있다. “버린다”(αποστρεφω 아포스트레포 reject “turned away and forsook” -Amf- 외면하고 버렸다. 이러한 일을 바울이 당했을 때 애간장을 녹이는 고충에 시달리게 됐다. 그 당시에 바울은 지하감옥에 사형수로 갇혀 있었고, 몸은 늙고 쇠약해져 있었다. 물론 바울은 뜨거운 믿음의 소유자였고, 산 소망으로 끝없이 도전하는 전도자로 신앙 일생을 살아왔다. 하지만 한편으로 감정을 가진 인간이었기에 굉장히 섭섭하고 괴롭기 마련이었겠죠. ‘아시아 사람들이 바울을 버렸다’라고 했는데, 도대체 그 사람들은 누구였나요? 바울은 세 번째 전도여행 때 아시아에서 집중하여 전도하면서 아시아의 수도인 에베소에서 3년 동안 머물렀다(“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행 20:31)라고 했다. 이 기간은 바울의 전도여행 중에 가장 긴 체류 기간이었다. 그만큼 아시아에서 복음전파 때 바울은 심혈을 기울여 눈물로 복음을 심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다가 바울은 두 번째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그때는 황제 네로가 기독교를 박해하였기 때문에 심각한 상황이었다. 바울은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기에 당연히 중죄인이었다. 중죄인 되는 바울을 보고 동역자들이 슬금슬금 도망을 친다는 소식을 바울이 듣게 되었다. 예수님 믿다가 중죄인 되느니 차라리 믿음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바울에게는 청천벽력이나 마찬가지였겠지요. 목숨 걸고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바울이었지만,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자기들도 연관될까 봐 ‘바울을 모른다’ ‘예수를 안 믿는다’ 하면서 변신, 배신했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토록 힘들게 눈물로 가르치고 모범을 보였던 삶이 다 헛수고였으니 허탈감에 빠져드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흔한 일이다(예수님도! 요 6:66-67)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존 밀톤이 소설 ‘실락원’을 썼지요. 하지만 그는 52세 때 실명하고도, 67세에 ‘실락원’을 저술했더니, 그 책이 성서 다음으로 많이 읽히고 있단다. 많은 사람이 그를 ‘끝났다!’라고 여길 때, 그는 “소경 된 것이 비참한 것이 아니라 소경을 이겨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비참한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소경을 비관할 시간에 실낙원을 저술했다는 것이다.

자 그러면 오늘은 바울의 마음에 깊숙이 새겨진 사람들을 보면서 상처보다 고마움은 어떻게 새겨졌는지 저랑 같이 살펴보자.

1) 격려(16)

“자주 격려해 주고”(αναψυχω 아나푸쉬코 ανα<again> + ψυχω<breathe, to cool. ψυχη animal life.‘숨통을 틔워줌으로 미음을 시원하게 해줌’ 개역 성경에는 “유쾌하게 하고”라고 번역했음). 바울은 로마 지하 감옥에 있었다. 몸은 늙고 기력이 쇠약했다. 그런 데다가 가족도 없고 면회 오는 사람도 별로 없다. 그러한 처지인데 오네시보로가 자주 바울을 찾아왔다. 바울이 특별히 중죄인으로 몰리자 그 위험함을 실감한 많은 지지자가 떠나는 것을 보고도 오네시보로는 중죄인 바울을 자주 찾아가 격려해 주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답답하고 허탈했던 마음을 시원하게 바꿀 수 있었다. 새 힘을 얻었고, 큰 격려를 받았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하나님의 사자들에게 달려나가서 자기 집으로 영접하고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5) 하고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그러고 세 가지 복을 받았다. 첫째는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0 꼭 필요한 아들을 약속). 둘째는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니라.”(18 번영 약속). 셋째는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20-21 조카 롯이 살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됨). 酒食兄弟千個有(주식형제천개유, 술과 밥이 있으면 형제 같은 사람은 천명이나 있어도​) 急難之朋一個無(급난지붕일개무, 급하고 어려울 때 함께할 벗은 하나도 드문 법)라고 하였지만, 우리도 이런 헌신을 배우고 시도해 보기를 축복한다.

2) 만남(17)

ἀλλὰ(강조, But)로 시작함: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σπουδαιως εζητησεν με και εὗρεν 스푸다이오스 에제테센 메 카이 휴렌 diligently/ he search out/ me/ and/ he found. 그래서 “he searched hard for me until he found me.” -NIV-) “until he found me.”라고 번역함. 그것은 늙고 쇠약한 몸으로 로마감옥에 갇힌 바울을 면회하기 위해 오네시보로가 로마 거리를, 온 감옥을 샅샅이 뒤졌음을 반영한 번역이다. 아는 사람에게 청탁하고, 죄수 명단을 뒤졌고, 여기저기 다니며 바울이 어디에 갇혔는지 수소문했고, 바울과 비슷한 죄수를 봤다는 말대로 찾았다가 바울이 아닌 것을 확인하고 힘없이 발길을 돌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찾아오는 오네시보로가 바울에게는 얼마나 응원군이었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오네시보로는 에베소에 살고 있었고,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다. 에베소는 지금의 터키 에게해 연안의 도시였다. 그리고 로마는 지금의 이탈리아 로마였다. 뱃길로 2000km가 넘는 해외 나들이였다. 2000년 전 교통수단을 감안하면 몇 달 동안 험난한 시간과 경비와 고생을 각오한 일이었다. 오네시보로는 그토록 어려운 일을 핑계하지 않았고, 사도바울을 찾아가 면회하였다. 그것도 자주! 고마움은 쉽고 간단하게 새겨지지 않는 법이다.

예수님도 마 25:35-40에서 하나님께 복 받는 방법을 말씀해 놓았다.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느니라.”라고. 성도 여러분! 복을 받을 기회는 여러 가지이다. 그래서 자주할 수 있다. 기도생활을 하면서 기회를 그냥 보내지 말고 참여하기를 축복한다. 아멘.

3) 봉사(18)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 이 말씀은 “그가 에베소에서 자기에게 편리한 대로 인색하게 봉사하고”라고 기록할 수도 있다. 이렇게 기록된다면 그 교인은 애물단지이다. 히 13:17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라는 말씀이 있다. 신앙생활은 즐겁게 자원하여 꾸준히 하라는 것이다. 아멘.

오네시보로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부터 바울을 위해 봉사하였다. 에베소에서의 그의 섬김은 디모데도 익히 알 정도로 소문났다. 복음을 위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라면 즐겁게 주의 종을 섬기겠다는 신앙관으로 초지일관하는 성도가 오네시보로였다. 그의 봉사는 일시적이고 감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에베소 때부터 로마 감옥에 면회 다닐 때까지도 시간과 장소를 탓하지 아니하고 꾸준히 전도자바울의 도우미였다. 바로 그러한 모습이 바울의 마음을 유쾌(상쾌 통쾌)하게 해주었고, 결국 고마움으로 새겨져 갔다.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말씀을 대충대충 말고 정확하게 보면, 한쪽만 아님! 그리고 하나님이 아닌 모든 사람임 = 소문남!) 또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εδοξασθη 에독싸스쎄 단순과거 수동태, πατηρ μου 내 아버지 φερητε 페레테 현재형 γενησθε εμοι μαθηται 게네스쎄<단순과거 수동태> 에모이<μοι의 강조형> 마쎄타이. 현재 믿음열매를 많이 맺어야 미래<심판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제자로 인정하여 상 주심이 맞는데, 미래를 모두 과거로 기록 = 확실함!)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 진실한 믿음 생활 때문에 억울하게 조롱과 핍박을 당해 보았는가? 그 고충이 빛날 때가 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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