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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1일 설교


어떤 사람이 친구의 끈질긴 전도에 못 이겨서 우선 성경을 창세기부터 읽어보기로 하였단다. 그런데 창세기를 읽고 나니 성경을 읽을 마음이 싹 사라지더란다. 그 이유는 위기를 모면하려고 자기 부인을 누이라고 속여 다른 족장에게 바치고, 또 두 딸이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성관계를 하여 아이를 낳고, 며느리가 과부 되더니 시아버지를 속여 동침하고 아이를 낳고... 정말 요지경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록한 책이 성경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는 이토록 지저분한 종교를 믿을 수 없다고 확정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기보다 먼저 자신의 선입견으로 성경을 대하기 때문에 생긴다. 성경은 거룩한 책이니까, 당연히 존경할 만큼 윤리와 식견으로 살아간 사람들의 삶으로 기록되어있어야 한다고 속단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성경을 읽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게 된다. 사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우리처럼 허약하여 실수하고 죄를 범하여 고민하는 사례들이 허다하다. 그러니 성경의 내용은 우리 자신의 삶을 대신한다. 그래서 성경이 지옥 가는 사람을 보여주든 천국 가는 사람을 보여주든 다 우리 자신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불교계의 큰 인물로 평가받았던 중 성철은 종정으로 취임한 후에, MBC 기자가 인터뷰 하면서 “1,300만 불자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더니 대뜸 “내 말에 속지 마라.”라고 대답하였단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나요? 성철 자신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불교 신자들이 달을 보고 깨달아야 정상인데 손가락만 보니 엉뚱하게 속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설교 본문도 비슷한 이치를 말해주고 있다(10). 지금 저랑 함께 읽어본 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성탄하시고 특히 하나님의 언약대로 죄인 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셨다고 바울이 디모데 목사와 에베소 교회에게 증언한 것이다. “드러내신지라”(φωτίσαντος Aor. 포티산토스 φωτίζω 포티조 to light up, make known. 불을 켜서 ‘밝게 하다, 조명하다’ 지금까지 어두워서 볼 수 없었는데, 이제 예수님께서 오셔서 빛을 비추어 밝히 볼 수 있도록 드러나게 하셨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우리 인간에게 죄를 짓게 하여 사로잡고 지배해온 사망세력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사망하셔서 우리의 죗값을 온전히 치르시고, 이제 사망에서 영생 복락의 길로 인도해 가시는 것을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εργα 에르가 복수: 불순종, 분열, 실패, 낙심, 거짓말, 질병, 포기... “the works of the devil” -NKJV-)을 멸하려(λυσῃ 뤼세 Aor. λυω untie, set free) 하심이라.”(요일 3:8). 바로 이 일이 복음의 핵심인데, 누구든지 이 일을 인식시키고 백하며 함께 삶으로 누리는 일을 복음전도라고 일컫는다.

골프선수 타이거 우즈는 1991년 미국 주니어 아마추어 선수권대회에서 15세로 최연소 우승을 하더니, 1999년에 8개의 PGA 토너먼트를 석권하였다. 그리고 골프 역사상 5번째로 글랜드 슬램을 달성하였고, 역사상 가장 연속적으로, 그리고 역사상 가장 많은 세계 랭킹 1위를 차지했단다. 사람들이 우즈에게 골프를 잘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항상 ‘연습’이라고 대답하였단다. 우즈의 아버지는 흑인이었고 어머니는 태국인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세 살 때부터 골프를 시켰단다. 그의 아버지가 “지금부터 우즈 골프학교 시작이야.”라고 말하면 그때부터 우즈는 절대로 말을 하지 않고 공을 쳐야 했다고 한다. 그러고 골프 연습을 하는 우즈 옆에서 아버지는 온갖 방해를 했단다. 왔다 갔다 움직이고, 부스럭거리고, 쿵쾅 소리 지르고... 공을 치려다가 소리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아버지는 호통을 쳤단다. “공을 치려고 할 때 벼락이 쳐도 공에서 눈을 떼지 말라!”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우즈는 아버지가 방해하는 어떤 소리에도 반응하지 않았고, 끓어오르는 분통도 참아내는 훈련을 해냈는데, 훗날 우즈가 어떠한 위기상황에 빠져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출애굽기나 민수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40년간 험악한 광야에서 실패와 좌절, 슬픔과 고통을 곱씹으며 단련시키신 후에 젖과 꿀이 흐른다고 언약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에 정통하는 훈련을 원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아멘.

자 그러면 저와 여러분이 심각한 고난을 지나갈 때,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만큼 건강하고 건전하게 그리고 부흥성숙하는 목회를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는가? 바울이 디모데 목사님에게 전수하는 그 비결이 우리가 찾는 정답이다.

1) 세우심(11)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일꾼인 바울이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밝혀놓은 말씀이다. “세우심을 입었노라”(ἐτέθην ἐγὼ 에테쎈 τίθημι Aor. pass. “I was appointed” –NKJV- 나 자신은 하나님께 임명받은 일꾼임!) 한 마디로 바울 자신의 사명인식인데, 올바른 목회자라면 그 마음에 반포자와 사도, 교사임이 항상 살아있어야 할 만큼 막중한 임무이다

첫 번째 선포자는 한 마디로 전령이다. 선포자는 전쟁할 때 싸우기 전에, 적군에게 미리 왕의 뜻을 전달하는 특사이다. 복음의 선포자는 새 임금인 구세주가 오셨다고 알린다. “지금까지 주저앉자 영혼을 어둡게 하고 무능과 무기력하도록 지배했지만, 이제는 예수님이 오셨으니 너는 떠나라!”라고 먼저 가서 예수님을 대신하여 외치는 종이 선포자다. 두 번째 사도는 만왕의 왕 창조주 하나님의 권세로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 수습하라는 특명을 받고 떠난 일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고 키우고 추수하는 종이다. 세 번째 교사는 예수님의 복음에 대하여 그 내용과 약속, 법칙, 삶을 잘 설명하여 깨우치는 일을 하는 자이다.

목사안수를 받고 스코틀랜드 시에 있는 한 교회를 맡게 된 목사님이 첫 주일부터 현대인들이 범하고 있는 죄들을 설교하였단다. 새로 부임한 젊은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려고 교인들이 많이 모였다. 그런데 예배 후에 백발이신 교회사찰이 목사님에게 와서 이런 말을 해 주더란다. “목사님, 이제 목회 시작인데, 교인들이 떨어지지 않는 설교를 하십시오. 꼭 죄를 지적하는 설교하시려거든 옛날 야곱이나 사울 왕이나 가롯 유다의 죄에 대하여 설교하시면 됩니다. 제발 우리 교인들의 죄는 지적하지 마십시오. 죄를 지적하는 설교는 교인들을 자꾸 떠나게 할 겁니다.” 그 사찰의 충고대로 우리 자신과 상관없는 설교만 하다가 영국교회가 망해서 오늘날처럼 되었다. 예수님의 뜻대로인 교회가 있고, 음부의 뜻대로인 교회도 있다. 이 사실을 명확하게 식별하여 몸담기를 축복한다. 아멘.

2) 확신함(12)

“확신이라”(πέπεισμαι 페페이스마이 완료 수동태. 하나님께서 확신시켜주셨다는 것! πειθω 페이쏘 influence by persuasion, convince, obey. πιστις 믿음, πιστος 충성).

하나님께서 어떻게? “믿는 자(하나님)를 알고”(οἶδα γὰρ 오이다 가르 “because I know” -NIV- ≠ 암기) “그가 능히”(δυνατός ἐστιν 뒤나토스 에스틴 “He is able to keep” -NKJV- 실제! 실체! 실존! =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사 49:16-) 그래서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ἀλλʼ οὐκ 알 우크 nevertheless not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니함. “nevertheless I am not” -NKJV- 어떠한 고난이 닥쳐온들 부끄러워하지 않음! 하나님이 설명해주실 때 생긴 확신 때문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답게 정말 파란만장하게 온갖 고난의 현장을 누비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바울은 극심한 방해 속에서 굶주리고 헐벗고 춥고 심지어 죽음의 위협으로 암울하던 상황에서도 복음을 심었다. 그 용기의 원천은 한 마디로 확신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전도하려는 열정을 디모데 목사님에게 밝히고 또 시도하도록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는 거다.

3) 지키라(13-14)

“지키고 ... 지키라”(두 가지인데, 바른 말과 아름다운 것을: 바른 말은 바울이 직접 아려주었고, 아름다운 것은 성령님이 보혜사로 해줬음. 그런데 바울이 바름 말을 해주는 모습을 자세히 보면; “ὑποτύπωσιν<휘포튀포신 sketch, formulate, pattern> ἔχε<에케 to have> ὑγιαινόντων<휘기아이논톤 healthful, uncorrupted, safe, pure> λόγων ὧν παρʼ ἐμοῦ<myself> ἤκουσας ἐν<엔 in> πίστει καὶ ἀγάπῃ τῇ ἐν<엔 in> Χριστῷ Ἰησοῦ. original 생생한 현장에서, 바울자신과 함께, 바울 자신이 직접 예수님의 믿음과 사랑을 전달해주고 formulate 형성해주었음!)

그리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ἐνοικοῦντος ἐν ἡμῖν 에노이쿤토스<ἐνοικεω 현재 분사 dwelling> 엔 휘민) “부탁한”(παραθήκην 파라쎄켄 to place by the side of, near, to set before 보혜사 되심! 다정다감하고 정확하게 하심! 충성수준! 끝까지 수호하고 실현해야 했음을 보여줌).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수시켜주었던 그 믿음과 사랑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말씀 선포자마다 의식 속에 살아있어야 할 필수품이다.

갑돌이와 갑순이의 사랑은 다 아실 거다. 노래 가사대로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마을에 살았고, 그들은 서로 사랑한다고 온 동네 소문났다. 그런데 그들은 따로따로 시집가고 장가갔다. 그러면서도 첫날 밤에 달을 보고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러면서도 안 그런 척하고 고까짓 것 하였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결혼하지 않았나? 여러 대답이 가능해진다. 숫기가 없어서, 사랑은 했지만 결혼할 만큼은 아니라서, 갑돌이 갑순이니까 둘이 친척이라서 등등.

그런데 이런 설명이 가능해진다. 둘 다 자기가 ‘갑’(甲)이었기 때문이다. 갑돌이 갑순이라는 이름처럼 은연중에 자기가 갑이 되려는 마음이 강했다는 거다. 그래서 서로 사랑을 하였는데, 고백은 먼저 하지 않았다. ‘왜 내가 먼저 고백해? 자존심이 있지’ ‘내가 왜 고개를 숙여야 해? 지가 나한테 와야지! 내가 갑인데...’ 둘이 다 갑갑하고 부딪치다가 끝났다는 것이지요. 누구든지 을이 되었다면 결혼했다는 것이다. 서로에게 끌리고, 사랑하면서도 끝내 자기 고집대로 아닌 척하다가 을돌리에게 시집가고 을순이에게 장가든 날 밤 가슴앓이했다. 고집 바보들이지요. 그런데 오늘날도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갑돌이와 갑순이를 자주 볼 수 있다. 노상 자기주장을 고집하기 때문에 상대를 품지 못하고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예수님의 것을 생활하자!

자 이제 오늘 설교 말씀 중에 발견한 나침반을 챙기자. 건강하고 건전한 교회는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의 사명이 잘 이루어지고 또 유지되고 있다. 우리 교회를 진단하면서 간구하고 응답받길 축복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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