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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8일 대전신대 설교

무엇을 보느냐?”(암 8:1-4 ‘대전신학대학교 설교’) 22. 11. 8.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 나라로/ 구름 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이는 건/ 샛별이대란다 길을 찾아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달’이라는 동요 가사인데 윤극영 작사 작곡이지요.

영(1903.9.6.-1988.11.15.) 작가는 16살 때 1919년 3.1운동 항일저항에 참가하였고, 일본유학시절에는 20살 때부터 방정환(1899.11.9-1931.7.23) 선배와 함께 도쿄에서 ‘색동회’를 조직하고 동요를 작곡하였단다. 그 당시 조선말 가사로 된 노래는 찬송가정부노래 뿐이었는데, 나라를 빼앗기고 방황하는 한민족의 비운을 동요 ‘달’로 노래했던 분이 21살 청년 윤극영이었다. ‘반달’은 일제강점기 때 우리 민족의 을 달래줌으로, 한반도는 물론 만주벌판에도 급속도로 퍼져나가 아동이나 성인을 가리지 않고 조선인들이라면 누구나 애창하는 노래였고, 세계명곡 200수에까지 선정될 만큼 명곡이라서, 반달은 ‘하얀 쪽배’라는 제목으로 중국음악 교과서에까지 실릴 정도로 ~물이었다!

배’는 대한민국의 운명을, ‘토끼’는 5천 년 역사에 빛나는 한반도를, ‘대’는 살아있는 푯대를, ‘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는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한국민족의 망국 서러움과 만주북간도를 유랑하며 독립운동 하는 신세를, 그리고 너도나도 서구문명에 도취되어 유학 가는 판국에 한반도의 5천 년 역사의식과 전통을 ‘샛별’로 표현하고 삶의 길이라고 절규하여 대! 한민족의 울을 노래로 승화시킨 민족동요였다. 그래서 일제는 ‘동요금지령’을 내리기까지 하였고, 그는 ‘설날’ ‘고기잡이’ ‘따오기’ 등을 계속 작곡했지만 마침내 로 변절하였고, 공산당을 위한 작곡자로 변절하기까지 하였다니 안타깝기만 하다.

한 사람이 일생을 ‘애국자’로 살아가다가 ‘변절자’로 살기도 한다. 이것은 목회자의 삶에도 통한다. 오늘 설교본문도 애국자로 초지일관하는 선견자 아모스를 본다. 지금 우리가 주목하려는 말씀은 “보이셨느니라”이다(1. הִרְאַנִי 히레아니

הִ + רְאַ + נִי

<my> נִי 니

라아 ראה = see, visit, observe, live, experience, perceive, choose,

Hiphil הִ 히 하나님께서 아모스에게 시키는 것임).

= 사물을 확인하면서 인식하고 받아들임

오늘 설교 본문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모스에게 “여름 과일 한 광주리”를 보여주시고 물어보셨다

(מָה ־ אַתָּה רֹאֶה עָמֹוס 마 앗타 로에 아모스


“Amos, What do you see?” 하나님께서 아모스에게 “여름 과일 한 광주리”를 보여주고 제대로 알아차렸는지 확인하셨다는 것임. 이것은 설교자에게 엄청난 필요충분 사건!).

여기서 “여름과일 한 광주리”는 오늘날 우리의 현실로는 ‘성경책 bible’에 해당한다. 전문용어로 ‘기록된 말씀’이지요. ‘기록된 말씀’에는 하나님의 언약과 언약성취의 원리와 법칙이 담겨져 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의 문장만 많이 읽고, 많이 쓰고, 성경의 문장 자체를 암송하는 것을 대단한 자랑으로 삼는 분들이 있는데, 사실대로 표현하면 ‘주마간산’(走馬看山 산의 외모만 대충 보았을 뿐 산속 속에 있는 내용을 전혀 모르니 안타깝다는 뜻임. 우리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 이런 말씀을 기록해 놓으셨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 6:28생각하여 보라” καταμανθανω (‘제자’ μαθητηsμανθανω ; to learn by practice or experience. to acquire a custom or habit. 이미 습득한 풍이나 사상, 가치관을 수님의 것으로 바꾸어주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분을 예수님은 ‘사도’라고 부르셨고, 오늘날에는 주로 ‘목사님’ ‘전도자’ ‘교사’ ‘선교사’가 그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일을 Professional하게 fulltime으로 해보겠다고 도전장을 내고 열심히 준비하신 분들이 여러분이잖아요).

설교 본문 2절 중간부터 3절을 보자(“내 백성이 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그를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그날에 궁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것이며 곳곳에 시체가 많아서”).

그렇다면 “여름 과일 한 광주리”는 하나님의 계획이나 생각을 알리는 문장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재앙으로 심판하심, 그게 ‘말씀’으로 보아야 올바른 것이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해놨다. “무엇이든지 기록된 바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 또 1:7에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의 형을 받음으로 울이 되었느니라.” 거울의 용는 너무나 뚜렷하다. 누구나 자신의 모습을 보고 판단하고 고치기 때문이다.

시골 동네에 90살 먹은 할머니가 교회에 나오더니 얼마 되지 않아서 이상한 말을 하고 본인이 통역하는데 내용은 천국 목격담이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제정신일 때 “이 세상은 아무리 좋아도 천국에 비하면 시궁창과 같다.”라고 말하자, 동네 사람들이 새롭게 교회 다니고 교회의 권사님, 집사님들이 천국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갖고 열심히 순종하더란다. 생각해 보자, 그 할머니가 본 환상보다 더 정확하고 자세히 실감나게 환상을 기록해 놓은 책이 요한 계시록이고 에스겔서이며 스데반이 순교하는 장면이잖아요. 우리에게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그림이 아니라 그림의 내용설명, bible meaning이다. 그러니 성경해석학 공부는 필수라는 것이다.

눈물겹게 순종하는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글이 있는데 같이 들어보자.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워진 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 위당 정인보 선생의 제자요, 동양사학자 민영규 교수의 ‘예루살렘 입성기’ 중에서-

실제로 지구가 거대한 자석이라는 물리적 근거 때문에 지남철은 떤다고 하는데 누가 봐도 지남철은 북쪽을 가리키며 항상 떨고 있지요. 그러나 사람은 다들 지남철처럼 사는 건 아니다. 만약 교회의 일꾼이 떨면서 최선을 다해 순종한다면; ‘떨고 있는 목사님의 설교’ ‘떨고 있는 장로님의 기도’ ‘떨고 있는 권사님의 전도’ ‘떨고 있는 신학생들의 결심’은 믿어도 좋다는 거다. 떠는 것을 구약성경에 יָרֵא(야레 ‘경외’ ‘fear’, afraid, terrify)라고 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상실한 행, 소프라노 구호로 할지도 실상은 야고보서 용어로 ‘죽은 믿음’이다.

제자 재여(宰予)가 낮잠을 자는 것을 보고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썩은 나무는 다듬어서 조각할 수 없으며 더러운 흙은 담장에 바를 수 없노라.” 朽木 不可彫也 糞土之牆 不可圬也. 聽其言而 信其行, 청기언이 신기행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그가 하는 말을 듣고 그래서 그가 하는 행동을 믿었지만,’ 聽其言而 觀其行. 청기언이 관기행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그의 행동을 관찰한다.’

재여는 공자의 제자 중 언변이 가장 뛰어났고 자로, 안회, 자공 이러한 제자들과 함께 공자를 14년이나 풍찬노숙(風餐露宿)을 하며 보좌한 제자이니, 그를 게으르고 경박하다고 속단하기엔 뭔가 아쉬움이 있다. 그렇지만 공자는 재여의 언행 불일치 하는 나약한 소신을 한탄했던 것이다.

어느 시대나 아모스형 설교자와 아마샤형 설교자는 있었지요. 우리 한국교회도 뼈저린 36년이 있었고, 그 후유증은 곳곳에 남아있지만, 특히 위안부(慰安婦보다는 ‘노리개’가 더 사실인데도) 그 할머님들께서 자신의 신분을 공개하면서까지 변하시는 용기 때문에 깬 의식을 가지고 살던 국민은 개를 숙이고 동참했잖아요! 요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아모스의 결심’을 실행하는 것도 대단히 용있는 순종이라고 판단되기에 께 실천하자고 강권해 보았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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