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6일 설교
“너 하나님의 사람아!”(딤전 6:11-16 ‘믿음의 선한 싸움’ 22.11.6.)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면에 문준경 전도사님의 순교 기념관이 있다. 문 전도사님은 소박당한 여인이라는 흠을 가지고도 신안군 증도면에 10여 개의 교회를 개척하여 섬 주민 90%를 전도했고, 그러다가 6.25 때 공산군에게 순교 당했단다. 전도사님이 전도한 사람 중에 목회자가 1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문준경 전도사님은 17살 때 결혼하였는데 첫날 밤부터 소박을 맞고도 20년 동안 시부모를 섬겼고, 시부모님이 별세하자 목포로 나와 이성봉 목사님께 전도 대원으로 훈련받은 후, 섬에 돌아와 전도하며 교회를 개척해가는데, 갑자기 동네에 염병이 발생하여 섬사람들이 마구 죽어 나갔다. 정부도 방관하는 환자들을 문 전도사가 그들과 함께 죽겠다고 홀로 뛰어다니며 환자들을 돌보면서 사망자들은 장례를 치러주었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본 동네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중에 6.25 전쟁이 일어나서 너도나도 피난하여 숨었는데 문 전도사만 교회를 지키다가 순교하였다는 것이다.
이태리의 밀라노 대성당은 3개의 문을 거쳐 들어간단다. 그런데 첫 문에 새겨진 말이다. “모든 기쁨은 잠깐이다.” 둘째 문에는 “모든 고통은 잠깐이다.” 마지막 세 번째 문에는 “오직 중요한 것은 영원함이다.” 참으로 곱씹어볼 만한 인생의 교훈이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즐거운 일을 만나면 만족해하고, 또 죽을 것 같이 힘든 일을 당하면 고통스러워 낙심하지만, 모두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진다. 그런데 이 두 가지에 흔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은 여전히 막중한 문제는 사후의 영원한 생명이다.
오늘 설교 본문도 11절을 보면 ‘영원한 생명’에 막중한 비중을 두고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Σὺ δέ, ὦ ἄνθρωπε θεοῦ 쉬 데 오 안드로페 쎄우)라고 시작한다. 사실은 우리 한글 성경은 번역을 생략하였는데, 헬라어 원문에는 ὦ ‘오’라는 감탄사가 있음. 그리고 “오직”<δέ>은 ‘그러나’임)라고 시작한다. 그래서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너 그러나 오! 하나님의 사람아!”이다. ‘현대인의 성경’은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인 그대는 이런 것들을 피하시오.”라고 번역했다. 성경은 모세(신 33:1), 사무엘(삼상 9:6), 엘리야와 엘리사(왕상 17:18, 왕하 4:7). 그러니 참으로 위대한 호칭이다. 바울은 감탄사와 함께, 단어의 순서까지 바꾸면서 “너”를 강조하며 디모데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호칭하여 ‘다른 사람은 어떠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리는 디모데 너만큼은 물들지 말아야 할 것들이 분명하게 있다.’라고 강권하였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물들지 말아야 할 게 무엇이었는가? 이미 앞에서 설명한 ‘다른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부자 되려는 자들’, ‘탐욕 자들’, ‘돈 사랑에 빠진 사람들’ 그래서 ‘믿음에서 떠난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사람인 디모데 목사님이 항상 살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바울이 명령한 불량 인물들은 하나님의 사람 디모데 목사만 아니라 디모데가 지도하였던 에베소 교회도 해당하였고, 뿐만 아니라 이 시대에 거듭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지금 아멘으로 응답하는 우리도 마찬가지로 해당한다.
히말라야 고산족들이 살아가는 데 대단히 중요하고 필요로 하는 게 양이란다. 사람들은 양을 팔고 살 때 당연히 양의 몸집에 따라 값을 정한다. 그런데 그 고산족들은 양들을 가파른 산비탈에 놓아두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양들을 지켜본단다. 그래서 양이 산비탈 위로 올라가면서 풀을 뜯어 먹으면 마른 양이라도 값이 비싸고, 산비탈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살이 쪘더라도 값은 내려간단다. 왜 그런가? 위로 올라가려는 양은 당장 올라가는 게 힘들더라도 산허리에 있는 깨끗한 초장을 만나게 되니까 점점 튼튼하게 커가는데,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당장은 편할지라도 점점 협곡바닥에 이르고 풀이 부족하니까 자꾸 굶주리다가 마르고 병들기 마련이다는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도 당장 힘들고 어렵다고 쉬운 넓은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어렵고 험악하여도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좁은 생명 길로 찾아간다. 저와 여러분도 ‘너 오! 하나님의 사람 아무개야!’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신앙생활을 이어가길 축복한다. 아멘.
자 그러면 “너 오! 하나님의 사람아!”에 합당하게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사도 바울이 설교본문을 통하여 디모데 목사님에게 강권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고 필요한 것은 챙기자.
1) 피하라(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φεῦγω 퓨고 flee, escape, to stand fearfully aloof). 피할 “이것들”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한 마디로 ‘불순종파들’이었다. 디모데 목사님만 아니라 젊은이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여러 ‘불순종파들’을 피하는 데 익숙해야 한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에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록해 놓았다. 그만큼 걸려드는 일이 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세상의 사탄문화, 귀신 놀이 할로윈 데이, 마약, 동성연애, 이단이 믿음을 갉아먹는다.
성경에 보면 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청년 요셉을 날마다 유혹하였는데도, 요셉이 그 범죄를 이겨냈던 것은 유혹하는 자리에서 도망쳤기 때문이었다. 다윗도 사울 왕이 잡아 죽이려고 할 때 계속 피신하다가 사울 왕을 암살할 기회가 생겼을 때, 그 암살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라는 사실을 직감하자 즉시 그 자리를 떠났다. 어떤 처지든지 나 자신이 죄에 빠지게 된다는 판단이 서면 도망가야 한다. 한마디로 불순종이 보이면 발을 빨리 움직여 떠나라는 것이다.
2) 따르라(11)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δίωκω 디오코 rapid motion, pursue direction. “aim at” -RSV-). 무엇을 붙잡고자 뒤좇아가야 하는가? 의와 경건, 믿음과 사랑, 인내와 온유라고 하였다. 쉽게 말하면 불순종과 반대되는 것,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미 있는 순종’을 쫓아가는 것이다. 유능한 그리스도인은 도망하고 동시에 쫓아가는 것을 잘한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진보를 이루게 한다. 저와 여러분은 순종을 쫓아가는 일에 우리의 마음과 재능과 시간을 자원하여 집중하기를 축복한다. 아멘.
운동경기 용어 중에 ‘fair play’가 있다.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fair play의 전략은 실력이다. 이 세상은 전문가를 원하고 있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자기를 위하고 남을 지배하려고 실력을 쌓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고 세상 사람들을 섬겨서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실력을 쌓는 것이다. 다윗이 실제로 골리앗 장수를 패배시킨 무기는 물매였다. 다윗의 물매 실력은 골리앗의 이마에 물매 돌이 박힐 정도였다. 물매 실력이 전문가였기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승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 것이다. 전문실력을 갖추기까지 열심히 따르기를 축복한다. 아멘.
3) 싸우라(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믿음의 선한 싸움’은 결국 영생을 놓고 마귀와 전투하는 것이다. 마귀는 온갖 거짓으로 틈을 노리고 그리스도인을 공략해서 기어코 지배하려 한다. 마귀의 지배목적은 포로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맞서 싸워 이겨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허점 없는 무장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어떻게 싸울 것인가? 엡 6:11에 보면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라고 했는데, 공격용 무기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마귀가 예수님을 세 차례 시험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거절하여 승리하셨다. “믿음의 선한 싸움”의 핵심은 혈과 육이 아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싸움을 하는 게 아니다. 그 싸움에서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일은 바로 ‘조절’이다. 조절은 모든 경기마다 기본이다. 성령의 열매 중에 “절제”가 바로 조절이다. 때마다 나 자신을 조절하시는 보혜사에 순종해야 한다. 아멘.
삼상 17장에 보면 사울 왕은 골리앗 장수와 싸워보지도 않고 벌벌 떨고 있었고, 골리앗은 다윗과 맞서 싸우다가 패하였다. 그렇다면 골리앗 장수보다 사울 왕의 패배가 비굴하다는 것이다. 골리앗 장수는 싸우다 패했기 때문에 고려해볼 일(一勝一敗 兵家常事)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싸워보지도 않고 패배하는 것은 바보인 것이다. 이 세상을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믿음으로 볼 때, 이 세상은 더럽고, 악하며, 어둡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깨끗하려면 싸워 이겨야 한다. 선하게 살기 위해 싸워 이겨야 한다. 자칫 잘못하여 방향을 잃고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둠과 싸워 이겨야 한다. 아멘.
4) 취하라(12)
“영생을 취하라”(ἐπιλαβοῦ τῆς αἰωνίου ζωῆς 에필라부 테스 아이오니우조에스 “Take hold of the eternal life” -NIV- “영생”이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τῆς>가 있으므로 ‘그 영생을 꽉 붙잡으라는 뜻이 있음.’ 그리고 “취하라”<ἐπιλαμβανομαι의 부정과거 “피하라” “따르라” “싸우라”는 모두 현재형. 영원한 생명을 과거에 소유한 사실 자체로 만족하지 말고 완전히 자신의 삶으로 만들어 누리라고 강권함>). 그러니까 바울은 ‘영생을 놓칠 수 있다’라고 본 것이다. 영생은 과거에 내가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때 시작하였지만, 여전히 지금도 진행되는 과정이다. 영생은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진다. 이 이치를 확신하면 감격과 감사로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책망도 없이 지속하라고 권하였다.
미국행 대한 항공 비행기 안에서 생긴 일이다. 비행기가 이룩한 후에 한 시간쯤 지났을 때, 파리 한 마리가 윙윙 날아다니더니 비행기의 천정에 앉았다. 보나 마나 한국 국적의 파리였겠지요. 그 파리는 비자도 안 받고 비행기표도 안 사고 미국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 파리가 좌석을 차지하는 것도 아니고, 기내식을 먹을 것도 아니다. 그냥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탄 것이다. 파리도 올바로 비행기를 타면 미국으로 가는데 눈에 보이는대로 음식 냄새를 따라 쓰레기차를 타면 마침내 쓰레기 처리장으로 가고 만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따라가면 영생복락에 이르게 된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말씀이 가리키는 신호등을 확인해 보자. 사도 바울은 설교본문을 “아멘”으로 마치고 있다.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16절 끝부분을 성경전문용어로 ‘송영’(짧은 찬송 doxology)이라고 한다. 그 당시에 에베소 도시는 수많은 사람이 신전에서 우상숭배를 하고, 거짓 교사도 많았다. 그러한 사회에서 교인들은 자신의 신앙을 쉽게 의심하거나 좌절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너 오!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디모데 목사에게 강권한 내용은 오직 하나님께 영원한 권능이 있음을 확신하면서 찬송하였던 바이다. 거짓이 판치는 도시에서 목회하는 참 아들 디모데에게도 역시 확신과 위로를 주기 위함이었다. 이 확신과 위로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의 ‘송영’(doxology)이 우리에게도 자주 찬송으로 하나님께 드려지기를 축복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