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27일 설교
“있을지어다!”(딤후 1:1-2 ‘생명의 약속’ 22.11.27.)
중국 춘추전국 시대에 복부제는 노나라의 ‘선부’라는 고을의 사또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웃 제나라의 군병들이 쳐들어왔다. 복부제는 고을 백성을 서둘러 성안으로 피신시키고 성문을 닫으라고 지시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성 밖에 보리밭이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제나라 병사들이 보리를 약탈해갈 게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직속 신하들이 복부제 사또에게 건의하였다. “백성을 무조건 성안으로 피신시킬 것이 아니라, 고을 백성에게 내 것 네 것 가리지 말고 마음대로 보리를 추수하여 즉시 가져가라고 명을 내리시지요. 그러면 너도나도 달려들어 재빨리 추수할 것입니다. 한해 농사를 적에게 고스란히 넘겨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복부제는 그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였고, 곧바로 고을 사람들은 성안으로 피신시키고 성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하지만 제나라 군병들이 쳐들어와서 그 많은 보리를 약탈해갔다.
이 사실이 온 나라에 소문나자, 복부제는 급기야 재판정으로 끌려갔다. 임금님이 복부제에게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적에게 이로운 일을 하였느냐? 차라리 그 곡식을 내 백성이 먹게 했어야지!” 복부제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제가 한순간 적을 유익하게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상황이 긴급하다고 해서 백성에게 네것 내것 없이 마음대로 가져다가 먹으라고 하면, 그들이 앞으로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아마도 피땀 흘려 살 생각을 하지 않고, 남의 것은 공짜로 가져다 먹어도 된다는 그런 판단을 배우게 될 것이고, 그런 불로소득으로 곡식을 마련할 수 있다는 악한 심보를 가지게 되면, 그것은 10년이 걸려도 고치기 어렵습니다.” 복부제의 이 깊은 뜻에 감동한 임금님은 오히려 그에게 상을 내렸다고 한다.
이렇게 복부제처럼 ‘진리의 가르침을 따라 생활하는 그러한 삶을 진리의 열매(眞實)’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오늘 설교 본문에서 보여주는 바울이 그랬다.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χαρις ελεος ειρηνη απο θεου 카리스 엘레오스 에이레네 아포 쎄우). 이 말씀은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축도인데, 바울이 성경 서신을 시작했던 전형적인 문장이었다. 먼저 “로부터”(απο 아포 distance of time and place, forth from, departure, source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과 예수님에게서 출발했고, 원천, original이라는 것임) 그래서 “은혜”는 헬라어 χαρις(카리스)의 번역인데, 하나님께서 무조건으로 베푸시는 호의(죄 용서하여 구원하심, 그러한 수준의 사랑이나 보호하심. 이 은혜를 받으면 엄청난 순종과 충성을 하였다고 노아와 마리아, 스데반이 성경을 통하여 보여준다고 지난주일 설교로 확인하였음). 그리고 “평강”은 ειρηνη(에이레네)의 번역, 유대인들의 전형적인 인사말 ‘솰롬(שָׁלוֹם)’에 해당하는데,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화평함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서 흘러 내려오는 그 은혜가 임한 곳에 평강이 이루어진다. 또 “긍휼”은 ελεος(엘레오스)의 번역인데, 히브리어로 라하밈(רַחֲמִים 어원은 רֶחֶם<레헴 : 모태, 자궁, 그래서 모정, 연민의 정, 동정>. 영어로는 mercy, pity, compassion(Com<함께> + passion<감정> ‘함께 공감하는 것’). 우리 한글 성경은 ‘긍휼’(矜恤)이라고 번역했지요(矜 = 矛<창 모> + 今<이제 금>, 이제 창을 가졌으니 자신만만함<矜持>. 恤 = 忄<마음 심> + 血<피 혈>, 마음에서 피가 흐름. “그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 19:34>. 예수님이 우리 죄인들을 불쌍히 동정하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돌아가셨다는 말씀인데, 이게 바로 긍휼임!). 그러므로 바울이 디모데 목사에게 보내는 편지의 서두에 “긍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축복하는 것을 보면, 바울이 디모데 목사의 곤경을 얼마나 실감하고 있었는지 그것을 알아차리게 한다.
그런데 우리 한글 성경의 설교 본문 2절은 “편지하노니”라는 동사가 있는데, 헬라어 성경에는 없다. 바울은 동사가 필요한 문장에서 일부러 동사를 생략함으로써 더욱 강조하려는 바가 있다. 그것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알리는 게 편지인데, 바울도 비록 편지로 디모데에게 알리고 있지만, 마음만큼은 아버지가 바로 곁에 있는 아들에게 말하듯이, 믿음의 참 아들 디모데에게 다정다감하게 알리고 있으며, 은혜와 긍휼과 평강도 단순히 편지글의 형식으로 쓴 인사말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실제로 디모데에게 임하는 것을 강력히 실감하자는 것이다. 아멘.
어느 팔순의 목사님이 임종하는 시간이었다. 그 목사님의 아들도 목사였는데, 젊은 아들 목사가 별세할 아버지의 곁에 앉아서 위로해드렸단다. “아버님은 오십 년 동안 목사답게 충성하셨네요.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도 올곧게 전하셨고, 순 구제와 선교로 목회하시면서 형편껏 교회를 분립하셨잖아요. 아버님의 목회 일생은 참으로 훌륭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버지 목사님은 아들의 말을 끊으시고, “나에게 십자가 보혈을 증언해다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내 칭찬보다 오로지 예수님이 대속하신 보혈이다. 예수님이 긍휼하셔서 흘리신 십자가 보혈을 붙잡고 천국으로 떠나련다.”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자 그러면 저와 여러분도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실제로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받아서 엄청난 순종과 충성을 이루는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사도 바울의 증언에 귀를 기울여보자.
1) 뜻(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διὰ θελήματος θεοῦ 디아 쎌레마토스 쎄우 θελήμα will, design, purpose) 따라서 이 말씀은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려는 바와 별개다. 그러므로 ‘성공의 개념’을 거부한다. 우선 하나님의 뜻은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고 그 계획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실행하여 성취해 나가신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이나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것이나 이스라엘을 특별히 하나님 백성으로 선별하신 일은 모두, 우리 그리스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구원의 역사’라고 말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진행하신 일을 성경에 중점적으로 기록해 놓았다는 것이다.
어느 날 개가 닭에게 시비를 걸었다. “너는 새벽마다 ‘꼬끼오!’ 하고 울어서 주인을 새벽이면 깨우는 사명을 잘 감당하더니 요새는 왜 벙어리로 지내는 거냐?” 닭이 따지듯이 대답하였다. “요즈음 세상이 달라져서 주인이 언제 자고 언제 깨는지 알 수가 없고, 또 자기가 일어날 시간을 핸드폰으로 맞춰놓고 자는데 너라면 언제 울겠냐?” 개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닭이 개를 책망했다. “너는 낯선 사람이 올 때마다 잘도 짖더니 요즘에는 도둑이 앞뒤 옆집에서 담을 넘었을 때 어째서 가만히 있었냐?” 개가 닭에게 되물었다. “주인이 도둑놈인데, 너 같으면 사명감당 하려고 언제 짖겠냐?” 요즘 현실은 요지경이라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뜻대로 순종하기가 너무나 혼동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직하게 성경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하며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은 선명하게 드러나는 법이다. 체험하기를 축복한다. 아멘.
2) 생명의 약속(1)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이 말씀은 약속의 핵심이 영생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참 영생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만 있다. 그 참 영생을 아담의 선악과 범죄가 단절시켜버렸다. 그렇지만 참 영생의 회복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제물을 통하여 실현되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다’라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완전한 대속제물을 우리가 시인하고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며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 예수님은 성령님의 보혜사 되심을 시작하신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짐’이라는 ‘통치권의 교체’를 의미한다. 사탄의 죄악통치에서 성령님의 깨우치심과 생명의 통치로 바뀐 것이다(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세상은 어떤 가치를 말할 때는 흔히 돈과 연관한다. 가령 ‘시간은 돈이다’ ‘정보가 돈이다’ 시간이나 정보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산다’를 세상의 가치로 볼 때 전혀 돈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집사로, 권사로, 장로로, 목사로 일하는 것을 돈으로 인정해줍디까? 전혀 아니다. 그래서 전도가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생의 확신은 “예수님 안”을 최고, 최대, 최상으로 선호한다. 아멘!
3) 사도(1 αποστολος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심부름꾼)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1:8)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4:6) 바울의 처지는 추운 지하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여 초라하게 죽음을 예감하고 있는 한심한 늙은이였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사명이 사도임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다. 자, 그렇다면 무엇이 더욱 큰 것인가? 중죄인으로 죽음을 예감한 자신의 현실과,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도가 되었다는 그 사명, 어느 것에 붙잡혀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물론 자신의 현실은 각자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럴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형편을 믿음으로 판단하면서 선택할 수 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신앙관 때문에 그렇다. 사도 바울이 그랬다. 감옥에서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사도라고 당당하게 내세우고 있다. 비참한 현실이 우리의 믿음생활을 구차하게 만들지 못하게 하는 신앙관으로 살아가길 축복한다.
바울은 로마서 1장 5절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제물을 믿고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다음에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사명의 직분을 감당하도록 계획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이 사명의 삶을 깨닫고 순종할 때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다. 아멘.
자 이제 오늘 설교 말씀이 우리 자신에게 보여준 믿음 생활의 나침반을 확인해 보자. 올바른 복음 삶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맞게 반응한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의 대속제물로 죽게 하셔서, 영원한 사망에 처한 죄인들이 예수님 십자가의 도를 믿고 구원받는다는 게 복음의 골자인데, 바울은 끝까지 복음을 증언하는 믿음생활을 이어가는 그리스도인을 디모데 목사에게 강권하였다. 그런데 복음의 내용에 생소하므로 무작정 복음의 예찬론에 동조하는 교인보다 복음의 실체를 알고 신실하게 증언해 가는 믿음 생활이길 축복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