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13일 설교

“믿음 소망 사랑의 통장!”(딤전 6:17-19 ‘올바른 성도의 삶’ 22.11.13.)

미국 뉴욕 근교의 뉴헤이븐에 안식년 선교사들을 위한 연구센타 OMSC(Overseas Ministries Study Center)가 있단다. OMSC는 선교사와 목회자들의 재충전이나 연구를 후원하려고 1922년에 설립하였고, 그동안 100여 나라에서 2만 5000여 명이 이용하였고, 한국의 선교사와 목회자들은 100여 명 정도 된다고 한다.

OMSC는 깨끗한 아파트 10개쯤 갖추어 놓고 안식년을 맞이한 선교사들이 가족과 함께 와서 쉴 수 있게 도와주는데, 그 운영비의 총 3/4을 한 사람이 후원하고 있다고 한다. 그분이 누구냐 하면 찬송가 작곡가 윌리엄 하워드 돈(W.H. Doane)인데, 그는 찬송가를 2200곡이나 작곡하였고,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슬픈 마음 있는 사람”(91장) “예수 나를 위하여”(144장) “인애하신 구세주여”(279장) 등등 우리 찬송가에도 15곡이 있다. 작곡가 돈은 원래 사업가였지만 찬송가의 저작권만 해도 굉장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돈은 일생 주님을 잘 섬기다가 별세하였고, 그의 두 딸(마거릿, 아이다)이 아버지의 신앙 삶을 기리며 OMSC 센터를 세웠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진정으로 남아있는 것은 무엇이던가? 나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한 것은 별세와 함께 사라진다. 그렇지만 주님의 뜻에 동참한 것은 그대로 남아 상급을 결정한다. 이러한 이치를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9장 6절에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오늘 설교 본문도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값지게 살아가는 삶을 깨우치라고 강권하고 있는데, 핵심구절을 같이 살펴보자.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19)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다. “좋은 터”(θεμέλιον καλὸν 쎄멜리온 칼론 a good foundation of a superstructure of faith. 믿음이게 지탱해주는 기초, 절대로 허물어질 수 없는 구원과 천국 상급이 신앙 삶을 만들어 간다는 것임! 그래서 바울은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고 했다<ἵνα ἐπιλάβωνται τῆς ὄντως ζωῆς 히나 에필라본타이 테스 온토스 조에스. 우리 한글 성경은 번역을 생략했지만, ‘위하여 손에 꼭 쥐고 있음’ ‘영생을’ ‘eternallife’ -NKJV->). “그렇게 하여, 앞날을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스스로 쌓아서, 참된 생명을 얻으라고 하십시오.”(표준새번역). 예수님께서도 마 6:20-21에서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 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라고 천국에서 이루어지는 보상은 확실하다고 밝히셨다.

그러면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에게 궁금해지는 게 있다. ‘올바른 믿음생활’이라는 관점에서 ‘교회의 성공은 어떠한 모습인가?’ ‘성취한 목회’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 마 7:21을 통하여 말씀해 주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런데 현재 한국의 교회는 대부분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와 대형교회와 대형교회를 쫓아가는 교회이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대형교회인데도 시민들에게 무관심이나 사팔뜨기에 시달이고 있다. 교회에 대한 인식이 심각하리만큼 부정적인 것은 대형교회들이 ‘자축회’(自祝會)로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처럼 왜 부자가 지옥에 가던가요? 그것은 문밖에 있던 거지 나사로가 굶든지, 추워서 떨든지, 병이 들었든지 상관없이 자기들만 편안하게 살아갔기 때문이다. 부자가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다면 그러한 나사로를 외면하지 않지요. 우리의 경건함과 생활은 따로따로 이루어질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은 공존한다는 것이다. 보이는 형제들에 대한 사랑의 크기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함의 크기인 것이다. 약 1:27을 보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기적이고 소유 지향적이고 현세적이라서, 가져도 가져도 끝까지 더 가지고 싶어지는 것은 인간의 탐욕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산은 백두산도 금강산도 아니고 부동산이라고 한다.

자 그러면 이 탐욕을 이기고 “좋은 터”를 잘 쌓아가는 믿음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바울의 권면을 잘 들어보자.

1) 소망(17)

사도 바울은 부자들에 대한 신앙지도에 대하여, 가장 먼저 ‘마음을 높이지 못하게 할 것을 명하라’라고 디모데 목사님에게 강권하였다. “마음을 높이지”(ὑψηλοφρονεῖν 휩프셀로프로네인 ὑψηλος<high> + φρονεω<think> ‘생각을 키움’ 재물을 앞세우고 스스로 자신을 착각하여 교만해지고 남들을 멸시함). 바울은 디모데 목사에게 부자들이 교회에서 재력 과시나 교만함을 못하게 엄중히 가르치라고 강권했다. 물질의 번영이 믿음의 진보와 건전한 도시번영으로 발전해 가면 바람직한데 에베소는 반대였다. 그러니 에베소 교회는 믿음의 변질과 경건의 능력이 위험해졌다. 그렇게 되면 그 교회의 숙제는 타락 예방이다. 그런데 이 숙제가 쉽지 않다. 확고한 신앙관이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처방하기를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라고 했다. 올바른 소망 삶을 살자. 아멘.

2) 누리게(17)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 “누리게 하시는” 이 말씀을 올바로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εἰς ἀπόλαυσιν 에이스 아폴라우신 ‘즐거움을 위하여’<ἀπόλαυσιν to obtain a portion of a thing. ‘성과’나 ‘결실’을 즐거워함.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고 하나님과 함께 즐기는 것임! “그대는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명령하여, 교만하지도 말고,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도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하십시오.”(표준새번역). 신 15:9-10에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그런데도 사람이 재물의 탐욕에 사로잡히면 생각이 병들고, 그러면 처지도 신분도 외면하고, 이웃도 친구도 심지어 부모 형제도 자신까지 속이곤 한다. 그러고도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 왜냐면 이미 자신의 사고방식이 변질했기 때문이다. 모든 재물은 실제로 하나님의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잠시 맡긴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과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신 8:17-18). 이 이치를 몰라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재물 삶에 실패하곤 하고, 결국 애써 모은 재물이 오히려 독으로 변한다. 잠 23:5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재물이 사라질 때 싸우고 그만큼 시끄럽다는 것인데, 우리는 IMF 이후로 자주 목격하곤 한다. 탐욕을 이기는 믿음이기를 축복한다. 아멘.

3) 너그러운 자(18)

“너그러운 자”(κοινωνικούς 코이노니쿠스, 복수형. ‘공감으로 교제하는’ ‘동무’ ‘반려자’ 이러한 뜻이 담겨 있음). 부자들이 범하는 살인적인 착각은 재물을 주신 하나님의 계획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재물에 지배당하는 점이다. 그래서 바울은 아주 적극적으로 세 가지를 처방하였다. “선한 사업을 많이” “나누어 주기” “너그러운 자.” 이 처방은 시 37:27-29의 다윗을 생각나게 한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 도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영히 거하리니 여호와께서 공의를 사랑하시고 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 이러한 성경 말씀을 볼 때 ‘홀로의 믿음’을 불순종이다. 부자들은 자기 재물로 어려운 이웃들을 돕되 단순히 물질만 나누지 말고 진실한 마음까지 따뜻하게 나누라는 것이다.

성경은 부자를 무조건 죄악으로 보지 않고, 부자의 삶을 올바로 깨우치고 있다. 너그러움을 하지 않는 부자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19-21)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것이 어떠한 모습인가? 재물을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부자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내가” “내 곡식” “내 곳간” “내 영혼”... 이것은 자신을 주인으로 한참 강조하였다. 그리스도인은 키가 조그맣고 목소리도 크지 않아도 괜찮다. 그러나 참으로 커야 하는 것은 마음이다. 피부는 곱지 않더라도 신앙관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만큼 고와야 한다.

오늘 말씀은 한마디로 “믿음생활을 올바로 하라”는 것이다. 이 세상을 가난하지만 부요한 자로 살아가는가 하면, 부자인데도 가난한 자로 살아가는 분도 있다. 17절을 보면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παράγγελλεω 파라겔레오 charge, command)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1:18에서는 “이 교훈을 명하노니”(Ταύτην τὴν παραγγελίαν παρατίθεμαί 타우텐 텐 파라겔리안 파라티쎄마이<옆에 가까이 둔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지나가는 길에 한 번 권면하는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실행하여야만 하는 중요한 명령을 강조해 준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 목사에게 이토록 부자들에 대하여 강경하게 강권했던 이유는 재물이 가지고 있는 위험천만한 교만성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세우심을 받은 사도의 신앙관을 배우게 된다. 사람의 신분과 직업, 소유한 정도에 상관없이 믿음의 분량대로 판단하는 바울이다. 그러니 이러한 신앙관이야말로 목사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이 함께 배우고 실천하여 꼭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실현하여 전도되게 해 가자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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