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9일 설교

“선한 행실을 이루는가?” (딤전 5:9-16 ‘선행하는 믿음생활’ 22.10.9)

사람들은 자신의 체험을 가장 신뢰하려는 기질이 있다. 누구든지 어떤 체험을 하고 나면, 그 체험과 다른 관점을 설득시키는 일은 쉽지 않다. 그 사람이 현재의 체험을 뛰어넘는 또 다른 체험을 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그 체험에 갇혀 있곤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에는 ‘마음의 속음’이 실존하는 법이다. 그래서 개혁신앙의 원리 중의 하나는 “유한함이 무한함을 담을 수 없음”이라는 사실을 철칙으로 한다. 그런데도 마음의 속음 중 하나는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즉 지극히 편협한 지식을 가지고 마치 세상의 수많은 것을 아는 것처럼 행세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은 ‘교만’이라 하고, 교만한 마음은 처방도 궁하며, 특히 성경의 지식으로 교만하여진 경우에 거의 불치병이라고 밝힌다(“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잠 18:12). 그래서 예수께서도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설로 질타하셨지요(“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이토록 독설을 예수님이 퍼부으셨지만, 자기 이념과 사상으로 하나님을 제한하였던 바리새인들의 고집이론은 꿈쩍도 하지 않았음을 복음서 성경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부패한 사람 마음의 근본적인 속성은 간교함이라고 성경은 밝혀준다(“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렘 17:9). 이 세상에서 믿지 못할 변덕쟁이 중 하나가 인간의 마음이다. 그러니 사기꾼이 멀리 있지 않고 자기 마음속에 있는 법이다. 그러한 인간의 마음을 교회 안에서도 신뢰하다가 어리석어지는 경우는 흔하다. 문제는 사람 마음의 간교한 속성을 시인하지 아니할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좀처럼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버텨버린다. 그러한 사람이 삶으로 보여주는 성령의 열매는 가끔 이루어지는데 대부분 본인의 믿음 수준과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전도되게 하시려고 강행하는 경우이다.

오늘 설교 본문도 교회 안에서 젊은 과부를 잘 알아보고 신앙지도를 해가라고 사도 바울이 디모데 목사님에게 자상하게 권면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11-13). ‘젊은’의 기준은 9절에 밝혀놓은 대로 6 0세 이하의 과부를 가리켰다. 본래 성경은 과부의 재혼을 금하거나 부정하게 보지 않는다. 구약성경 룻기에 보면 ‘룻은 유다 지파의 보아스와 재혼하여 다윗 왕의 할아버지 오벳을 낳고 메시아의 족보에 오르는 은혜를 입었다.’라고 마 1:5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도 젊은 과부의 재혼을 악하게 볼 수 있다. 설교 본문 11-12절에,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 11절 중간에 “이는”(γάρ 가르 because)라는 단어로 젊은 과부를 구제 대상에서 제외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밝혀놓았는데, 그 핵심은 “정욕”(‘정욕으로 배신하다’, καταστρηνιάω 카타스트레니아오 κατα<against> + στρηνιάω<wanton 바람둥이 여자> = 정욕의 충동이 그리스도의 충성 봉사를 이겨버림)이다. 이 정도 되면 나머지 신앙생활도 개차반이다(13절에 보면, ‘집집으로 돌아다니면서 비밀을 누설하고, 이간질하고, 그래서 분쟁을 일으킨다.’라고 하였음. 참으로 안타까운 점은, “게으름을 익혀” ἀργαὶ μανθάνουσιν 아르가이 만싸누신 “they learn” μανθάνω 만싸노 to acquire a custom or habit. to learn by practice or experience. μανθητης 제자. 게으름을 온전하게 습득했는데도! 이간질이나 분쟁의 명수라는 것!). 그렇게 되면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거리 되고 전도는 함흥차사처럼 답답해진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세운 양로원에서 그리스도인 할머니가 기거하고 있었다. 어느 날 기자가 그 할머니에게 물었다. “빅토리아 여왕이 종종 여기를 방문합니까?” “그렇지요, 나는 몇 번 여왕의 방문을 보았습니다.”라고 할머니는 흐뭇한 표정으로 대답했단다. 그러자 그 기자가 다시 할머니에게 물어봤다. “그러면 당신이 그토록 신뢰하는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심방한 적이 있었나요?” 할머니는 두 손을 가로저으면서 대답했단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지요. 난 주님의 심방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항상 저와 같이 여기서 살고 계시니까요.” 이게 바로 임마누엘 신앙 삶이다. 이렇게 생생한 임마누엘 신앙생활은 건전하고 건강하게 순종하고 충성하게 한다. 저와 여러분도 쉽지는 않지만 생생한 임마누엘 신앙생활을 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아멘.

자 그러면 생생한 임마누엘 신앙생활로 건전하고 건강하게 순종하고 봉사하며 충성해가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오늘 설교 본문을 통하여 알려주고 있는 바울의 권면을 귀 기울여 들어보고 챙기자.

1) 한 남편(9 ἑνὸς ἀνδρὸς γυνή)

믿음 생활을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간구와 기도로 지속해가도록 구제해주는 과부는 한 남편의 아내(ἑνὸς ἀνδρὸς γυνή 헤노스 안드로스 귀네 “the wife of one husband” -RSV-)였던 자로 제한하라는 것이다. 고전 7:39에 “아내는 그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로워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한 남편의 아내”는 남편이 있는데 이혼하고 다른 남자하고 살았던 전력이 없는 과부였다. 그 당시 에베소 사회는 문란한 정조 풍조로 쉽게 이혼하는 세태였다. 따라서 교회가 구제할 때 한 남편의 아내로 살다가 과부 된 60세 이상으로 제한하였다. 이유는 60이 지나면 노동력이 떨어지고, 재혼 확률도 낮아서 실제로 도움이 필요한 자였다. 이것은 분명히 선별적인 구제인 셈이다.

하나님은 물론 사랑과 자비와 긍휼로 구원받는 기회를 누구나 차별 없이 주시고, 말씀을 듣고 십자가의 대속제물을 받아들이는 자를 죄 사함을 주시고 구원해 영원한 영생 복락으로 인도해 가신다. 그런데 상급은 그리스도인 다 똑같이 무조건 주시지 않는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에 순종하며 겸손히 주의 뜻에 동참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상급은 각각 다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남긴 자에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하셨고, 한 달란트를 그대로 묻어두었던 자에게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이치에 맞게 순종할 때 건전하고 건강하게 봉사하고 충성해갈 수 있다. 아멘.

2) 선한 행실(10)

교회가 구제의 대상으로 선발할 과부는 선한 행실이라는 경력 때문에 상당히 까다로웠다. 그렇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비록 힘든 고난 중에도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생기게 자녀를 신앙으로 잘 키우고, 또 나그네들을 대접하며, 교우들의 발을 씻기고, 환란 당한 자들을 구제하는 과부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것 하나 쉽지 않다. 사실 과부 자신이 돌봄을 받아야 할 처지였기에 더욱 힘든 선행이었지요.

그 선행에 합당한 과부는 솔직히 얼마나 있었을까? 아니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도 해당하기 어려운 선한 행실이었다. 그렇다면 바울은 무슨 의미로 그런 권면을 했을까? 비록 힘든 처지라도 그것을 핑계로 순종을 보류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처지가 험악하더라도 주님의 뜻을 살피며 순종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이다. 창조주요,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선하다 하심이 중요하다. “너희가 두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에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겔 13:19). 하나님의 뜻이 이렇게 뒤바뀌면 비극이고 순 인본주의이며 믿음은 다 가짜이고 만다.

3) 비방 기회(14)

재혼해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려야 할 젊은 과부가 그냥 계속해서 과부로 살아갈 때 13절처럼 사고를 치느니 차라리 재혼하여 충실한 가정을 이루라는 것이다. 젊은 과부들이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가정생활에 성실히 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아무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면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에게 비방 구실을 주지 않아 바람직하다는 게 바울의 당부였다(“대적에게” τῷ ἀντικειμένῳ 토 안티케이메노 the adversary, the enemy, ‘예수교를 방해하는 사람들’ 15절의 “사탄에게”<τοῦ Σατανᾶ the Satan> 결국 사탄에 지배당한 특정인들이 비방하지 못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생생한 임마누엘 신앙생활!). 이러한 신앙생활은 현실이었다. 교회는 영적 문제만 중요시하면 되는 게 아니다. 물론 교회는 신령한 공동체라야 하지만, 또한 도리 문제도 경제적 문제도 아름다워야 한다. 이 둘을 분리하면 신비주의이다.

우리나라 조선 500년은 삼강오륜(三綱五倫)이 사람의 도리로서 철칙이었다. 군위신강(君爲臣綱 임금과 신하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부위자강(父爲子綱 부모와 자식 사이) 부위부강(夫爲婦綱 남편과 아내 사이). 오륜은 군신유의(君臣有義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의로움을 지켜야 함) 부자유친(父子有親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 친함이 있어야) 장유유서(長幼有序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질서가 지켜져야 함) 붕우유신(朋友有信 친구들끼리 신뢰가 있어야 함) 부부유별(夫婦有別 부부간에는 구별이 지켜져야 함)

그런데 과거에 우리나라의 도둑들은 도둑질할 때 세 가지를 꼭 지켰단다. ‘과부나 고아의 집은 털지 않는다. 효자나 열녀의 집은 털지 않는다. 절간이나 신당은 털지 않는다.’ 그래서 이 3가지를 도도삼강(盜道三綱 도둑이 철칙으로 여기는 도리)이라 하였다. 이토록 도둑들도 천벌 받을 짓은 하지 않겠다고 도리를 만들어 지켰다면 삼강오륜이 사회에 얼마나 막강한 영향을 주었는지 실감할 수 있다. 교회가 타락하면 사회도 나라도 타락한다. 교회가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는데 누가 하나님을 무서워하겠느냐는 것이다.

오늘 설교 본문을 묵상하고 있으면 어떤 일이든지 자기 신앙관대로 된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어렵고 괴로워도 처신을 올바로 하는 성도는 결국 인정받아 존중받지만, 슬쩍 살살 빗나가고 때로는 변질하며 변명한들 사람과 하나님 앞에 무시당한다. 그러므로 설교 말씀 중에 “젊은 과부”와 “참 과부”를 마음 판에 새기며 우리 스스로 믿음 소망 사랑과 은혜로 정도로 살아가는데 더욱 힘쓰자는 것이다.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으니 자주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자녀답게 알차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면서, 또 그러한 삶으로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고 심판대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삶이 생생한 임마누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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