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23일 설교

“비방을 받지 않게!”(딤전 6:1-2 ‘성도의 사회생활’ 22.10.23)

동양의 지도자론 가운데 한 가지는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인데, 자신과 자기 집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국제적인 지도자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는 ‘섬기는 리더쉽’을 중요시하지요. 영어로는 ‘Following Leadership’(따라가는 리더십)이다. 오직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려고 따라가는 것이다. 섬김을 위하여 오신 주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익숙해지고 닮게 되어서 지도력도 생기게 된다는 것이지요. 마가복음 10장 44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의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자꾸만 자신을 낮추고 섬기려고 할 때 그 사람이 큰 자가 된다는 역설의 논리이다. 이것을 자기 집에서부터 익숙하여야 밖에서도 잘하고 하나님이 주신 권력도 자연스럽게 섬김의 지도력으로 활용하는 데 탁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공동체는 수직구조와 수평구조로 어우러져 있는데 수직구조는 가정이라면 부자관계나 형제로 이루어지고, 회사는 사장과 사원의 관계로 계층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교회는 모든 교우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수평구조를 이루게 된다(성경은 ‘하나님의 손자’라는 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음). 그러므로 누구든지 인종이나 신분, 빈부, 직업 등등에 따라 수직구조로 존재할 수 없는 유일한 공동체가 교회이다.

오늘 설교 본문은 굉장히 특이한 내용인데, ‘그리스도인이 된 노예’의 처신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계속하여, 교회의 각 지체가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순종할 것인지 그것을 디모데에게 권해왔다. 감독, 집사, 나이 든 교우, 젊은이, 그리고 과부까지, 이제 교회의 노예들에 대한 가르침이다. 성경학자들에 따르면 당시 로마제국에는 노예가 로마시민의 1/3, 절반, 심지어 4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로마제국의 그 거대한 사회를 떠받치는 하부구조가 노예였다는 것이다. 노예들이 노동자, 병사, 이발사, 요리사, 가정교사의 일까지 했단다. 노예는 전쟁포로나 채무자, 매매, 노예의 자녀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생존권까지 주인에게 예속되었다. 아무튼 노예가 흔했다는 사실이다. 어디에 가도 노예를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교회는 노예를 많이 전도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도 초창기에 양반과 백정이 함께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있었지만, 남녀가 따로 앉아 예배를 드렸고, 양반만 다니는 교회도 있었다. 미국에는 몇십 년 전만 해도 백인만 들어갈 수 있는 교회가 있었다. 그러니 노예를 교우로 받아주었다는 사실은 교회가 놀랍게 복음을 올바로 깨달았음을 말해준다.

그 놀라운 깨달음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유 실체’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스스로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어서 교우를 섬겨 하나님이 뜻을 이루고, 그걸 거룩으로 인식하며 살아간다. “네가 종으로 있을 때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고전 7:21-22).

미국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한 실험이다. 그 선생님은 백인 아이들의 가슴에 빨간 리본을 달아주고 “여러분, 이제부터 빨간 리본을 단 사람은 착한 사람이니 친절히 대하세요.”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식당에서 리본을 단 백인 애들이 앞줄에 서기 시작했고, 흑인 아이들은 스스로 뒤에 서곤 했고, 물을 마실 때도 마찬가지였단다. 1주일 후, 그 선생님은 정반대로 하였다. “여러분, 정말 미안해요. 선생님이 지난주에 깜짝 착각했어요. 원래는 피부가 검은 어린이가 착한 사람이에요. 이제부터 가슴에 빨간 리본을 단 사람들에게 친절히 하세요. 알았죠?” 그러고 빨간 리본을 흑인 아이들에게 옮겨 달아주었다. 그러자 백인 아이들이 빨간 리본을 단 흑인 친구들에게 식당에서도 물을 마실 때도 자리를 양보했단다. 1주일 내내 자신들이 앞줄에 섰는데도... 이 실험은 어떠한 암시를 받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행동유형과 성장속도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피그말리온 신드롬’ (pygmalion syndrome)이라고a` 부른다. 자신이 바라는 기대치를 상대방에게 인식시키면 상당한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피그말리온 효과를 이용하셨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반석’이라고 예고해주셨다. 솔직히 시몬은 반석과 무관하였다. 시몬은 예수님을 따라 물 위로 걸어가다가 파도를 보고 겁을 먹고 물에 빠져 죽을 뻔했고, 또 체포될까 무서워 예수님을 모른다고 계집종 앞에서 3번이나 부인하였다. 그 외에도 시몬은 자주 경솔하였다. 그런데 시몬은 많은 시행착오 후, 반석 인생을 살아갔다고 사도행전이 보여준다. 그런데 이 pygmalion syndrome 효과는 그리스도의 종 생활에도 적용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는 집사’ ‘예수님의 증인이신 권사’ ‘예수님의 편지인 장로’ 자신이 바라는 소망을 호칭으로 불러주다 보면 상대에게 미래의 건강한 자아상을 심어주게 되고 변화하는 날이 온다는 것이다. 아멘.

자 그러면 노예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어떤 신앙 삶을 살아야 옳은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듣고 챙기자.

1) 종(1)

종이 상전을 섬기는 태도를 밝혀놓은 말씀이다. “멍에”(ζυγος 쥐고스 ‘연합하다’라는 뜻이 있음. 짐을 끌도록 소나 말 등의 목에 가로 얹는 막대기구)는 속박당하는 상태,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상태에 있음을 알려준다. 노동자의 의무는 자신의 상전을 마땅히 존중하고, 순응하며, 상전이 요구하거나 맡은 일을 충실히 하라는 것이다. “이는... 하려 함이라”(ἵνα 히나 목적을 나타내는 접속사,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이 그들의 상전들에게 범사에 마땅히 공경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교훈이 비방을 받지 않도록 함). “비방을 받는다”(βλασφημηται 블라스페메타이, βλασφημεω 블라스페메오의 수동태 reproach, revile). “종의 멍에를 메고 있는 사람은 자기 주인을 아주 존경할 이로 여겨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이름과 우리의 가르침에 욕이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새번역) 만일 한 노동자가 나태하여 시간만 채우고 무례한 언행을 한다면, 그 상전은 그 노동자가 믿는 하나님의 교훈을 이기주의로 인식하고, 하나님과 교회와 복음을 비난하게 된다는 것이다. 종이 직장의 상전을 잘 섬기든 빗나가든 왜 목사님이 직장의 상전을 섬기는 태도까지 간섭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목사님은 종들이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고 헌금 잘하고 성실히 교회 봉사하는 것을 챙기면 되지 않느냐는 뜻이다. 그렇지만 종들이 상전들을 잘 공경하면 그 상전들은 하나님의 교훈을 더욱 존중하여 전도할 기회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전도되게 살아가자! 아멘.

2) 섬기라(2)

그리스도인 노동자가 그리스도인 상전 아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경우이다. 왜냐하면 형제의 사랑 안에서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노동자에게 한 가지 위험이 따르는데, 그것은 특별한 배려를 받는다는 착각이다. 게으름이 통한다는 사고방식이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 상전이 곧 그리스도인 노동자가 누릴 특혜조건을 의미하지 않는다. 핵심은 이것이다. 충성스러움은 해당한 열매를 맺는 법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노동자는 상전이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요셉처럼 자신의 신앙관대로 충성하여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게 정답이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 5:46-47).

이러한 사랑을 설교로 들었다. 그래서 먼저 하고 싶어도 자기 자존심이, 자기가 바보같이 보일까 봐 망설일 때 그 심리를 과감히 넘어서서 순종하는 게 믿음이다. 왜냐하면 빛은 자존심 대결을 하지 않고 어둠을 향해 직진하고, 소금도 스스로 먼저 녹기 때문이다. 먼저 희생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만드는 믿음이다. 할렐루야! 결심하자. 우리가 보통 사람처럼 사랑하면 세상과 마귀를 이기지 못한다. 샘물은 넘쳐 흐르기 때문에 썩지 않는다. 이것이 갈릴리 호수와 사해의 차이이다. 갈릴리 호수에 많은 생명이 공생하고 있다. 갈릴리호수 같은 신앙생활하길 축복한다. 아멘.

3) 이것들(2 ταυτα διδασκε και παρακαλει 타우타 디다스케 카이 파라칼레이)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διδασκε, παρακαλει 현재 명령형 지속) 교인들의 삶을 간섭하라. 노예가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주인도 예수님을 믿는 경우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갈 3:28)라는 설교를 들어서, 이 사실을 주인과 종이 함께 알고 있다. 그래서 이 노예는 주인을 가볍게 보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다 같이 평등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라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선언이 그리스도인의 무례함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어지나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선언이 종들에게 주인을 섬겨야 할 도리를 없애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다. 아멘.

그래서 노예들이 교회에서 일터로 돌아오면 실제로 노예이다. 여전히 자신의 환경은 변하지 않는다. 주인에게 순종하기를 거부하면 죽음이 따른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현실적인 질서를 받아들이도록 노예들을 가르치라고 디모데에게 권하였다. 노예제도는 분명히 잘못된 개혁의 대상이다. 그러나 때가 있는 개혁이다. 만약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노예가 아니다!’라고 선언한다면 그에게 자유가 아니라 죽음 같은 고통이 따른다. 이런 개혁의 시간을 ‘하나님의 때’(καιρος 카이로스)라고 한다.

좀 더 설명하면 종이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지만 세상은 그대로이다. 종과 관계하는 사람들과 환경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은혜받은 종을 대한다. 이럴 때 은혜받은 종은 소극적으로 기다리든지 적극적으로 주변을 복음화하든지 그것이 정답이다. 이 이치를 바울이 말씀한 것이다. 스데반은 은혜받았고, 그의 주장은 “그의 얼굴이 천사처럼 빛났다”라고 할 만큼 옳았다. 그 누구도 스데반을 이기지 못했다. 그런데 그에게 온 상급은 승리가 아니라 돌멩이 세례였고, 사망이었다. 우리가 알아야 할 분명한 사실이 있다. 믿음으로 은혜를 받아도 자신만 달라졌지 주변은 그대 있다는 것이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롬 5:20) 이 법칙을 알아야 시험을 이겨낼 수 있다.

자 이제 오늘 설교 말씀이 가리키는 믿음의 푯대를 확인하여 챙기자. 푯대는 엿새 동안에 충실하지 않으면 결코 예수님의 편지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일터에서 그 제도에 충실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교훈이 비난을 받는다고 바울이 강권하였다. 이것은 정말 우리에게 엄청난 도전을 준다. 그래서 우리가 일터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밝히는 게 부담된다. 일부러 밝히지 않더라도 충실을 갖추라는 것이다. 아멘.


최근 게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