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2일 설교

“존대함을 이루는 교회!”(딤전 5:1-8 ‘가정같은 교회’ 22.10.2)

1933년 나치 치하의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하였던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3.23.-1980. 3.18.) 교수는 인간의 심리와 사회의 상호작용을 깊이 연구하면서, 문화의 병폐를 고쳐 ‘건전한 사회’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프롬을 정신분석학자이면서 사회심리학자로 분류한다.

그런데 프롬은 1956년에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이란 책을 출판했는데, 그 책에서 사람이 성숙한 사랑을 하려면 사랑의 네 가지 기본 요소 즉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째 보호함이다. 어머니가 어린 자식을 안전하게 보살피는 것이나, 꽃을 사랑하는 사람이 꽃을 잘 관리하는 것은 꽃을 사랑함 때문이다. 둘째는 책임이다. 여기서 말하는 책임은 직장에서 월급을 받고 의무를 다하는 임무와 전혀 다른 자발적인 행동인데, 사랑하는 사람을 역지사지(易地思之)하면서 자원하여 그가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책임지고 돕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존경(respect)이다. ‘respect’가 ‘re-spect’(다시-바라보다)인 것처럼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봄을 지속하면서 그의 독특한 개성을 존중할 때 성숙한 사랑을 이룬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지식인데, 온전히 성숙한 사랑을 이루려면 사랑에 관한 보호와 책임과 존경은 물론, 사랑하는 사람에 관한 관심을 가지고 이해까지 갖추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네 요소가 실행되지 않는 사랑은 인간의 아름다움과 반대되게 공격적인 현실로 사랑을 표현하게 되고,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자신의 파괴 또는 상대의 파괴’를 범하게 된다고 프롬은 보았다.

본래 ‘사랑’은 분리된 사람끼리 ‘하나’로 묶어주는 보이지 않는 끈과 같은데, 그 끈이 때로는 썩은 동아줄과 같아서 중간에 끊어지고, 그래서 줄이 짧아 단단히 묶어줄 수 없으며, 또 쉽게 풀리는 재질로 만들어진 줄이라서 종종 풀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프롬은 인간의 사랑을 크게 ‘남을 살리는 사랑(biophilia)’과 ‘남을 죽이는 사랑(necrophilia)’으로 구분하였다. 실제로 사람이 ‘사랑하고 싶다’라고 하는 말은 ‘사랑하는 사람과 상생작용을 하고 싶다’라는 의미보다 ‘나의 자랑을 보여주고 그 사람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다’라는 의미로 표현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사랑을 나누고 싶은 상대를 찾기보다 과연 상대를 사랑할 수 있도록 그 병폐부터 고쳐야 함을 지적하여 준다. 그러므로 프롬은 성숙한 사랑을 위해 ‘경험하고, 훈련하라!’라고 처방했다. 사랑함을 기술능력으로 본 것이다. 사실상 사랑함의 실태는 여러 가지이다. 부자간 사랑, 형제자매 간, 연인 간, 친구 간, …. 이러한 다양한 사랑을 경험하고, 그 경험 중에 능동적인 실력을 갖추어 성숙한 사랑을 해보라는 것이 프롬의 강권이었다.

오늘 설교 본문도 성숙한 사랑 삶을 강권하고 있는 바울을 보게 하는데 저랑 같이 확인해 보자(1-2). “꾸짖지 말고 권하되”(μὴ ἐπιπλήξῃς, ἀλλὰ παρακάλει 메 에피플렠세스 알라 파라칼레이 ἐπι<upon> + πλήξῃς<strike> παρα<by, relative> + κάλει<call, invite> “Do not rebuke an older man harshly, but exhort him.” -NKJV- ἀλλὰ<오히려, 강조! 그래서 “에게 하듯”을 4번 반복함 = “아버지에게 하듯” “어머니에게 하듯” “형제에게 하듯” “자매에게 하듯” = 이해 + 인내 + 사랑>.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움직임이 더뎌져 실수도 자주 한다. 손발이 따라주지 않아 그렇다. 지적사항이지요. 그럴지라도 교회는 책망이나 부끄러움을 주지 말고 오히려 사랑과 공손으로 대하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하나님의 집”(3:15, ἐν οἴκῳ θεοῦ 엔 오이코 쎄우 in God's household –NIV- = 한 세대를 지칭하는 대가족을 의미함. 이 말씀에서 우리는 바울의 교회관을 볼 수 있음)라고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는 안타까운 늙은이도 있고 경험 부족한 젊은이도 있으니, 부모님께 하듯이, 형제자매에게 하듯이 이해와 인내와 사랑으로 대하라는 것이다. 공경과 기다림으로 함께하는 교회의 분위기를 볼 수 있게 해준다. 교회는 끼리끼리만 교제하면 되는 단체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대가족 신앙공동체임으로 각 연령층과 여러 봉사반이 서로 상생하는 신앙공동체라야 한다는 것이다.

저는 ‘가족’보다 ‘식구’라는 말에 더욱 친밀함을 느낀다. 설날이나 한가위 때면 친척들이 한 방에서 아침을 먹었다. 밥을 뜸 들일 때 새어 나오는 밥 내음은 진짜로 흐뭇했고, 또 겨울에도 어머니는 늘 밥 한 그릇을 아랫목 담요 속에 묻어두곤 했다. 그것은 갑자기 찾아오는 나그네 손님을 위한 배려였다. 부잣집도 아니었으나 나그네조차 식구로 환대하는 마음씨였다. 골고루 가난하였던 그 시절의 인심이 오히려 더 넉넉하였다.

예수님의 식탁도 인격적인 사랑을 공감하는 자리였다. 예수님은 어느 때나 고의로 식탁에서 제외하는 일을 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세리와 식탁을 같이 하는 것도 거절하지 않으셨다. 그 당시 세리는 민족의 배신자로 한없이 무시당하였는데도 그 아픔을 품고 살아가는 서러움을 받아 주고 감싸주셨다. 그러니 예수님의 밥상은 ‘받아들이고 용서하시는 자리’였다. 부활하신 주님은 디베랴 호숫가에서 밤새도록 빈 그물질한 시몬에게 153마리의 큰 고기를 잡게 해주시고, 또 아침 밥상에 초대하셨다. 시몬은 부활하신 주님의 길에서 너무나 멀어져 넓은 길로 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주님은 이해와 인내와 사랑으로 시몬과 함께 아침밥을 먹으면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의 분위기를 시몬에게 맛보게 했다.

자 그러면 성숙한 사랑이 작동하는 교회를 이루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바울의 권면을 더 들어보자.

1) 참 과부(5 Χήρας τίμα τὰς ὄντως χήρας.)

누가 참 과부인가? 참(ὄντως 온토스 indeed ‘진실로 과부인 자’).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참 과부”는 첫째 외로운 자, μεμονωμένη , 메모노메네 μονοω<to be left alone> 완료 수동태 둘째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 셋째는 주야로 항상 간구하는 자임. ταῖς δεήσεσιν καὶ ταῖς προσευχαῖς 타이스 데에세신 카이 타이스 프로슈카이스 그녀의 간구들 그리고 그녀의 기도들. 기도 생활에 집중하고 있음을 강조해 놓았음. 의지하고 소망할 데가 하나님뿐이라는 것!). 그 당시 에베소는 항구도시로써 성적으로 아주 타락한 사회였다. 그러한 퇴폐환경과 풍조를 이겨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참 과부를 양육해내는 교회를 이루어 보라고 바울은 디모데 목사에게 강권하였던 것이다.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6) 믿음으로는 무의미한 삶을 살고 있어서 허송세월만 하는 모습이다. 예수님 용어로 “불법을 행한 자”이다. 요즘도 경건한 신앙 삶에는 무관심하고 세상 풍조를 따라가다가 세상에서 책망당하는 교인들이 있다. 뉴스에 종종 나오지요. 간음 사건, 재물 문제, 자살 등등. 불신자들도 부끄러워 얼굴을 못 드는데, 교인들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전도를 막고 교회를 쓰레기쯤으로 만들어 버린다. 지금 한국교회가 추락하는 이유도 바로 이거다. 교회가 성경을 안 읽고 안 쓴다고 비난한 게 아니잖아요. 대책은 자신의 마음을 진정한 성령의 성전이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빈 성전인 교인이 아무리 성경을 읽고 쓴들 빛과 소금의 삶과 멀어져 있다. 그렇지만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삶으로 만들며 복음의 빛과 편지 되어 복음이 전파되는 삶에 도전해보자는 것이다. 아멘.

2) 효(4)

참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가 있는 경우에 먼저 자기네 가정에서 효도를 배우게 하는 게 성숙한 사랑의 믿음 생활이라는 것이다. 배우게 하는 것은 효도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서 오랫동안 훈련을 해야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효행은 예수교의 미덕이다. 그런데도 가족 돌보기를 남들에게 떠맡기려 하고 외면하는 교인은 믿음을 배반한 자라고 바울은 밝혀놓았다(8).

“배반한”(ἀρνεομαι 아르네오마이 refuse, deny, disclaim. 자신의 신앙 고백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입증하는 행위). 딤후 2:12에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ἀρνεομαι> 주도 우리를 부인<ἀρνεομαι>하실 것이라.”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실토하더라도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그 모습이 결국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부인하는 셈이라는 것이다.

어떠한 것을 참 경건이라고 하던가? 겉 보다 속 내용으로 하나님을 올바로 찬양하는 신앙 삶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려고 구별되는 삶을 살아간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사실은 그들의 위선이었다. 그들의 종교 행위는 실제로 대단하였고 그들이 종교생활을 열심히 잘하였던 것은 맞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함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상좌에 앉아서 자신의 신앙 행위를 돋보이려고 애를 썼다. 예수님은 경건을 자랑하려는 기도나 구제와 금식에 질색하셨지요. 참 경건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는 중에 참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행위와 생활로 표현하여 찬송과 영광을 이루곤 한다. 묵묵히 시도하는 성도를 축복한다. 아멘.

3) 존대(3)

“참 과부를 존대하라” “존대하다”(τίμαω 티마오 to respect of worth, to honour with reverent service. 과부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그것에 맞게 경제적 도움까지 지원하는 것을 가리킴). 그렇다면 바울이 과부를 존대하라는 권면은 과부들에게 심리적인 면에 관심과 배려를 기울이고 또 과부들에게 실제적으로 생활의 도움을 베풀어 거룩한 성도로 살아가게 살피라는 강권이다. 그런데 교회에는 생활의 궁핍을 당하는 성도들이 과부뿐만 아니다. 그 당시에 대표적인 허약자가 과부들이었으니, 꼭 과부가 아니더라도 무거운 짐을 진 교우와 함께 그 짐을 나누는 교회를 이루라는 것이다.

막 12:42-43에 두 렙돈을 헌금한 가난한 과부에게 예수님께서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라고 칭찬하셨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렇게 믿음생활을 수준높게 잘할 수 있도록 도우미 역할을 자연스럽게 하는 교회로 자리매김을 하라는 것이다.

스펄젼 목사님이 길을 가다가 한 소년이 새장 속의 갇힌 새를 괴롭히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 물어봤단다. “너 그 새를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소년이 대답했다. “글쎄요, 괴롭히며 놀다가 죽으면 버려야죠.” 스펄전 목사님은 그 소년에게 2파운드나 주고 그 새를 사서 하늘로 날려 보냈단다. 그리고 이틀 뒤 부활절에 스펄전 목사님은 이런 설교를 했단다. “마귀는 사람을 괴롭히다가 죽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엄청난 대가로 독생자를 내주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십자가입니다.”

은혜로 성도 여러분! 사랑합니다. 이제 오늘 설교에 알맞게 우리의 믿음 삶을 조종해보자.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탄의 괴롭힘에서 벗어나 새롭게 얻은 그 자유로 이제 의미 있는 일을 찾아 행하는 것에 보람을 두고, 허약자들이 “참 과부”로 멋지게 살아가게 함께하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 중심의 신앙생활이다. 십자가와 부활 중심의 신앙생활이 뚜렷하게 왕성해지는 교회를 기다린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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