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16일 설교

밝히 드러나게!(딤전 5:17-25 ‘존경이 있는 교회’ 22.10.16)

1620년 May flower호를 타고 미국으로 왔던 102명 중에, 청교도가 35명 나머지 67명은 돈벌이를 하러 온 세속인들이었단다. 그렇다면 미국 역사는 시작부터 ‘정반합(正反合)의 법칙’이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을 믿고 교회와 선교를 삶의 중심에 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세속인들은 오직 돈벌이에 온갖 수단과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미국은 청교도들이 주도하는 나라로 시작하였는데, 지금은 그 주도권을 세속인들이 잡아가고 있어서 안타깝다.

It is Perfectly Normal’(‘그것은 완전히 정상이다’, 이 책은 미국에서 10세 이상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한 성교육 교재로 이미 100만 권 이상 팔림). 이 책 5쪽에 여자 동성애자, 남자 동성애자, 양성애자, 성전환자... 이러한 성 소수자들에 대하여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소개하면서 ‘사람들의 성 기호는 제각각’이다.”라고 기록해 놓았단다. 또 9쪽에, 성관계하는 남녀의 모습과 여성 동성애자 2명이 성관계하는 모습, 남자 동성애자끼리 성관계하는 모습도 설명해 놓았단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점은 “성전환 학생의 자살률이 일반인보다 19배나 높다는 연구 조사와 수술 뒤에 후회하는 학생이 많다는 사실이다. 좀 생각해보자.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에게 남녀가 성관계하는 장면과 더욱이 동성애자들이 성관계하는 사진을 보여주며 성전환 수술은 성기호로 결정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아이들이 성전환 수술을 따라 한 후에 인생을 후회하다 자살해도 과연 바람직한 교육인가? 그것도 무식쟁이들이 하는 짓이 아니고, 교육학을 전공한 교사들이 가르치는 수업이다. 가르치는 선생님들이나, 그 책을 본 학부모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꾸만 의문이 생긴다. 꼭 소돔과 고모라 같은 세상으로 돌변해가지 않나요? 사탄은 무섭게 세상을 잠식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올바로 정신을 차리고, 악의 세력을 이겨내지 않으면 우리 가정도 위험하다. 베드로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베전 5:8-9)라고 말씀한다. 마귀를 대적하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엡 6:11)는 필수이다.

오늘 설교 본문에도 빗나간 열심을 지적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23. 이 말씀은 무조건 술을 먹지 않는 게 그렇게 바람직한 신앙생활은 아니라고 여실히 밝혀줌). 이 말씀을 어떤 분은 ‘그리스도인도 포도주를 자유롭게 마실 수 있다.’라는 말씀으로 근거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여기의 “포도주”는 진짜 포도주가 아니라 ‘포도즙’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둘 다 안전인수(我田引水) 식이다. 23절의 “포도주”는 진짜 포도주(οἴνος 오이노스 wine)를 말한다. 그렇다면 이 진짜 술을 바울이 디모데에게 왜 마시라고 권하는지 그 이유가 중요하다.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 위해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ἀλλὰ οἴνῳ ὀλίγῳ χρῶ 알라 오이노 올리고 크로 “but use a little wine”)고 하였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감독(목사)을 세울 때 술을 즐기지 않아야 한다(3:3)고 했는데 디모데 목사에게는 상반된 권면을 하고 있다. 그것은 의료적 치료의 수단으로 포도주를 사용하라는 뜻이었다. 한자의 ‘술 주’는 둘이다(酒, 酎<진한 술 주> 氵+ 酉<닭 유, 닭이 물을 한 모금 먹고 하늘을 쳐다보고 또 물 한 모금 먹고 하늘 쳐다보는 모습>, 酉 + 寸<마디 촌, 닭은 물을 한 마디씩 나누어 먹는다는 것임> 닭은 물을 한꺼번에 다 마시지 않음). 바울도 디모데 목사에게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ἀλλὰ οἴνῳ ὀλίγῳ χρῶ “but use a little wine”)고 권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딤전 4:1~4에서 믿음에서 떠나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선동할 거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 목사님에게 “자주 나는 병을 위해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라고 권하였는데, 그것은 균형 잡힌 성경 지식이라야지 지나치게 독선주의에 빠져서 신비한 방법만 고집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목회를 정상적으로 하려면 목회자 자신의 건강은 당연하다. 그런데 디모데 목사는 나이도 적고, 마음도 연약했다. 게다가 위장도 허약하였다. 그러니 아무리 열심히 복음을 전하려 해도 건강이 약하면 충성은 어렵다.

22절이다.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새 번역 성경은 “남의 죄에 끼어들지 말고, 자기를 깨끗하게 지키십시오. 각주에 “아무나 성직에 임명하지 마십시오.” 영어 성경 NRSV는 “and do not participate in the sins of others; keep yourself pure”라고 번역하였다. 다른 사람이 죄짓는 일에 공모하지 말고 오히려 자신을 깨끗하게 유지하라는 뜻이지요. 시편 1:1-2의 말씀처럼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말며, 교만한 자들과 앉지도 말아야 한다. 그렇다. 죄악은 전염성이 있다. 바울은 롬 12:21에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다.

그렇다면 정결을 위해 위장병을 가지고 옹색하게 목회하는 게 나은지? 아니면 포도주를 먹으면서 위장병을 치료하고 하나님의 뜻에 건강하게 충실히 헌신하고 상을 받는 게 더 나은지? 장단점이 있다. 정답은 하나님 앞에 썼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인정받는 자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9:27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느니라.”라고 밝혀져 있다. 설교 본문 25절 말씀도 동일하다.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자 그러면 어떻게 믿음생활을 하여야 올바른 믿음생활로 존중받는 교회를 이루어갈 수 있는지 바울이 디모데 목사님에게 권면하는 바를 좀 더 자세히 들어보고 챙기자. 아멘.

1) 존경(17)

잘 다스리는 장로들과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는 그 수고에 대하여 교회가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여 존경하고 그 일을 지속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존경”(τιμῆς 티메스 τίμαω 티마오 to respect of worth, to honour with reverent service. 그 가치를 인정하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존경하는 것. 예수님의 표현대로 하면 “삯꾼”이 아닌 “선한 목자”로 예우하는 것임). 그래서 바울은 성경의 두 말씀을 인용하여 그 근거를 제시하였다.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18, 신 25:4)과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마 10:10)이다.

목사가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생활을 교회가 마땅히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장의 삶을 감당하지 않았을 때 제사장들은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없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의 삶은 타락하여갔는데 그때가 사사시대였다. 이러한 비극을 예방하는 처방이 “존경”이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 대한 신뢰와 사랑, 존경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불행하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장로와 목사에 대한 존경이 살아있다면, 설교 듣기와 순종과 봉사에 기쁨과 감사가 넉넉해진다. 그러니까 품삯보다 마음으로 알아주는 인격적인 존경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2) 두세 증인(19)

“두세 증인”은 확실한 증거를 의미한다. 이것은 장로 목사에게 일부러 악한 공격을 해댈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 지도자들이 양심적으로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충성해도 뜻밖에 비난을 당할 수 있다. 마귀는 그렇게 하여 교회를 위한 사명의 열정을 꺾어 복음전파를 막아버린다. 그래서 신중하여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리고 마 18:15-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범죄한 교인들에 대하여 가르침을 주셨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이토록 ‘신중’하고 또 ‘엄중하게’ 이다. 죄는 관대하면 큰일이다.

그런데 20절의 “범죄한”(ἁμαρτάνοντας 하마르타논타스 현재 분사, 범죄하여 이탈해 있는 사실이 입증되었을 뿐만 아니라 계속 그 죄 가운데 있음). 이렇게 목사 장로가 범죄한 게 확실한데 아직도 회개하지 않았다면 금식하고 눈물 흘리며 교회 앞에 공개하고 꾸짖어 나머지 교우들로 범죄를 두려워하게 하여 예방하는 것이다. 죄를 투명하게 다루는 것은 범죄자에게 수치심을 주려는 목적보다 교회가 거룩함을 유지하려는 열심을 지속하기 위함이다. 이 원칙을 따를 때 여러 가지로 힘들겠지만, 교회는 그 아픔 속에서 성숙해 가는 법이다. 아멘.

3) 편견(21)

“편견”(προκρίμα 프로크리마 προ + κρίνω<judge, decide> 미리 판단하다. 사랑과 정의에 결함이 있는 것). 그러므로 편견이 없이 공평하게 하는 것은 막중하고 필수이다. 바울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천사들을 앞에서 디모데 목사에게 엄청난 공평을 강권하였다. 범죄에 대한 고발을 듣는 일과 그 내용을 밝히고 처리하는 모든 과정을 편견이 없이 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불공평함을 너무 자주 본다. 죄인의 지위나 인맥, 혹은 뇌물 때문에 공정함을 포기해 버린다. 이것은 신앙관이 병든 것이다. “네 집에 두 종류의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신 25:14-15). 법정에서 오른손을 들고 진실을 말하겠다고 선서하는데, 이것은 편견과 거짓을 거절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힌 것이다. 이 의지를 교회에서 엄중하게 실행하라고 바울은 디모데 목사에게 강권하였다.

저는 40년 넘게 목사의 일을 해 왔고, 여러분은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으로 살아왔다. 그 세월에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느냐가 중요하다. 상황이 어려울 때 어떤 충성을 선택하였는지 그것이 핵심이다. 그 선택이 참믿음이며 성령 충만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디모데 목사에게 세 가지, 자신 관리와 존경과 정의실현을 잘하는 교회를 강권했다. 한국 교회의 회복과 깊이 연관된다. 세상의 의사도 충분한 공부와 인턴 과정을 거친다. 하물며 사람의 영혼을 다루는 교회는 더더욱 필요하다. 신학을 마치고 전도사로 텐트를 치고 서민 목회를 하다가 다시 부목사 훈련을 받고 담임사역을 해도 시행착오는 많았다. 이러한 시행착오 때마다 더 올바른 설교와 또 설교 일치에 부끄럽지 삶에 충실하며 믿음의 진보를 이루려 애를 썼다. 유종의 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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