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9일 설교

“함께 멍에를 매라!”(빌 4:1-7 ‘하나님의 평강생활’ 22.1.9)

미국의 한 시골에서 살아온 부부가 결혼 50주년 기념잔치 때 남편이 “결혼한 후에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회고하더란다. 좀처럼 드문 일이지요. 그래서 한 손님이 “거짓말로 들린다.”라고 대꾸했더니 남편이 설명을 해주었다. “우리는 시골에서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갔는데 각자 노새를 타고 출발했어요. 그런데 아내가 탄 노새가 자꾸 가지 않으려고 가다 멈추고, 속을 썩이니까 화가 난 아내가 노새에서 내리더니 노새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게 첫 번째다!” 다시 노새를 타고 가는데 또 노새가 저항하고 말썽을 부렸다. 그래서 아내는 노새에서 내려서 노새에게 “이제 두 번째다!”라고 말하고, 다시 아내는 노새를 타고 가는데 노새가 또다시 안 가려고 버티어댔다. 아내는 노새에서 내리더니 권총을 꺼내 노새의 머리통을 쏴버렸다.

남편은 황당했다. ‘무슨 신부가 신혼여행 길에서 말 못 하는 짐승을 총으로 쏴 죽이다니 말도 안 돼!’ 그래서 한마디 했다. “말 못 하는 짐승에게 무슨 짓이냐?” 아내가 아무 말도 안 하더니 남편의 눈을 딱 쳐다보며 한마디 했다. “이게 첫 번째입니다.” 하지만 남편은 한 마디 더했다. “그래도 참았어야지.” “이제 두 번째입니다.” 남편은 평생 더 대꾸할 수 없었다. 한 번 더 말했다면 탕! 탕! 사망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평생 한 번도 싸우지 못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결혼생활 50년은 화평도 행복도 아니다. 억눌림 속에 억지로 사는 삶은 ‘화평’이 아니라 ‘굴종’이 실제 실체(fact)이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천국 삶’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행복한 삶이 있다.

오늘 설교 본문에는 “하나님의 평강”(7)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평강”(ἡ εἰρήνη τοῦ θεοῦ 헤 에이레네 투 쎄우 평화, 안정, 번영, 복지, 안식, 만족, 염려 걱정 없음. “모든 지각에 뛰어난” <ἡ ὑπερέχουσα πάντα νοῦν 헤 휘페레쿠사 판타 눈, “지각”은 ‘알아서 이해하고 깨닫는 기능’, ‘침착하여 편견 없이 생각하며 판단하는 능력’인데, 휘페레쿠사는 ‘위로 치솟다’ = ‘뛰어난’ 왜 그런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알맞게 조정해주시기 때문임. 예수님께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πεφορτισμενοι 페포르티스메노이 수동태 분사, 억지로 짊어진 짐은 상대적으로 짜증 나고 훨씬 더 무거워진다. 그리고 αναπαυω 아나파우오 안식함<to have a fixed place of rest, refresh>을 말해 줌. 불안이나 괴로움을 일으키는 문제들 그 자체를 평강으로 바꿔주실 분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뿐임).

하나님의 평강이 지켜주는 마음은 불안이나 괴롬이 너울 파도처럼 밀려와도 언제나 끄떡없다. 그런데 불안과 두려움과 괴롬에 시달린다고요? 아무리 부를 쌓고 호화로운 환경에서 산들 날마다 죽을 맛이다. 잠 17:22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라고 했다. 마음이 즐거우면 병이 왔다가도 그냥 돌아서고 만다. 그러나 마음의 근심 불안은 발병의 온상이기 마련이다.

1970.2.12. 이화여대생들이 하얀 상복을 입고 이대총장을 지냈던 김활란(金活蘭) 박사의 관을 메고 발인할 때, 그 모습이 얼마나 장엄하던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이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단다. 특이한 일은 김활란 박사의 관을 따라가며 학생들이 부르는 조가였다. 그 조가는 헨델의 메시아에 나오는 ‘할렐루야’를 합창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평소에 자주 이런 말을 했단다. “나는 인간의 생명이 영원불멸함을 믿고 날마다 하나님께서 힘주시는 대로 더 좋은 생명의 길을 찾으며 살았다. 육체와 환경에 얽매인 것을 극복하면서 나름대로 승리의 길을 걸어오느라고 힘썼다. 흙에 속한 육체의 기능이 퇴폐하여 심장의 고동이 그친다고 내가 죽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육체가 없어졌다고 나를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여 장례식을 해주는 것은 절대로 싫다. 만일 친척이나 친구나 동지들이 원한다면, 세상에서 체험할 수 없었던 더 풍성한 생명의 길로 또 더 화려한 승리의 길로 나를 보내는 환송예배로 장례식을 대신 해주기 바란다. 또한 그것에 적합하게 승리와 영광과 생명의 노래로 엮은 웅장하고 신나는 음악회가 되기를 원한다.”

그녀의 유언대로 장례식은 향불 대신 조문객들이 카네이션 한 송이씩 영전에 바쳤고, 생전의 육성을 들으며 고별형식으로 치러졌다. 장례식 절차도 고인의 뜻대로 승리의 길을 가는 음악예배로 진행되었다. 종래의 침울하고 슬픈 장례식과는 전혀 다른 장례식이었다. 그녀의 묘비에는 화려한 경력이나 학력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단지 무덤 앞에 성경책과 살전 5:16-18이 새겨진 돌판이 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김활란 박사는 아쉽게도 친일파로 변절하였지만 죽음으로 부활 신앙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평강”이 실존함을 입증해주는 일은 다행이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의 평강은 어떻게 누리게 되나요?

1) 같은 마음(2)

바울은 1절 끝에 “주 안에 서라.” 2절도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라고 권하고, 특별히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지적한 것은 두 일꾼이 서로 불화하였기 때문이다. 유오디아나 순두게도 한때 사도 바울의 곁에서 복음전파에 열심을 냈던 충성스러운 여인들이었다. 3절에 “멍에를 같이한”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라는 말씀이 그 증거이다. 맞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성도답게 그 거룩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섭섭하여 상하고 닫힌 마음을 풀고 다시 목회 동역자들로 충성하라는 권면이다. 어찌 되었든 서로 불화하니 본인들은 물론 교회의 분위기도 썰렁해졌고, 목자인 바울도 속상하게 되었다. 이처럼 마음이 합심하지 못하면 봉사나 믿음 삶에 기쁨이 사라진다.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하다. 그래서 바울은 “주 안에 서라”라고 하였는데, ‘서라’(στήκετε 스테케테 군사용어, 전쟁 중에 군인들이 단합하고 사기충천하여 사망을 두려워 않고 계속하여 전진하는 용감무상함을 말해주는 단어이다.

바울은 상대편에게 내 기준에 맞추라 하지 말고, 내가 상대편을 이해하고 맞추어주며 서 보라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내 마음도 버리고 네 마음도 버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바울은 이미 2:1-5에서 강권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러면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2:6-8에 밝혀놓았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의 현실에 맞게 말하면 예수님의 마음은 상대에게 맞춰 희생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하나님의 평강으로 응답해주신다. 아멘.

2) 도우라(3)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빌립보 교회의 충성스런 일꾼들이었다. 충성하는 일꾼의 특징은 대개 하나님의 뜻을 강조한다. 그런데 자기 확신, 자기주장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자주 우긴다. 그리고 혼자 하는 봉사는 잘하는데 함께 협력을 못 하고 독선하면서 그걸 모른다. 물론 충성은 중요한 신앙 덕목인데, 표나게 충성하다 보면 무의식중에 다른 교인을 무시하는 교만에 빠지곤 한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썰렁해진다. 교회의 고충들은 초신자보다 오래된 교인이 돋보이게 헌신하다 주도권을 휘둘러서 생기는 게 많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헌신하고 충성했던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인정해 주고 협력하게 도우라고 권했다. 바울은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 37명을 로마서 16장에 밝혀놓았다. 그중에는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라고 하였다. 바울의 ‘종 생활’은 합작품이었다는 것이다.

조금도 굽히지 않는 쇠와 쇠를 붙일 때 용접공은 불로 양쪽을 녹여서 붙인다. 한쪽은 녹았는데 다른 쪽이 강해서 덜 녹으면 붙여놓아도 다시 떨어지고 만다. 그래서 덜 녹은 쇠에 열을 더 가하여 양쪽 쇠를 다 녹여서 붙이면 한 쇳덩어리로 된다. 이 이치는 인간관계도 믿음 세계도 다 통한다. 고집을 녹이고 하나 되는 신앙생활에 모범이기를 축복한다. 아멘.

3) 기도하라(6 μηδὲν μεριμνᾶτε, ἀλλ᾽ ἐν παντὶ τῇ προσευχῇ καὶ τῇ δεήσει μετὰ εὐχαριστίας τὰ αἰτήματα)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기도’(προσευχῇ 프로슈케 ‘하나님께 예배하는 마음으로 기도함’, ‘드림’ 중심) ‘간구’(δεήσει 데에세이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요청함’, 개인적인 특별한 청원사항), 그렇다면 모든 일은 기도와 간구에 해당하지요. 기도와 간구는 반드시 없애야 하는 것과 꼭 넣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염려’와 ‘감사’이다. ‘염려’(μεριμναω to divide the mind. 할까 말까, 맞다 틀리다) ‘감사’(εὐχαριστία good + joyful, beauty, beneficial, grace, acceptance. 기도 응답을 시인하며 즐겁게 기도함! 빌 2:17-18에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하나님의 사건에 대한 확신으로 기쁨이 가득 차 넘쳐남). 그리고 5절에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라는 말씀을 했는데, 무엇 의미인가? 사람은 세상 끝날을 실감하면 그만큼 진지해지고 진실해지며 겸손해지는 법이다.

고훈 목사님이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을 때 일이다. “권사님도 위암 진단을 받았는데 수술도 못 할 여건이었다. 그 권사님은 예배당으로 와서 눈물로 기도했다. ‘하나님, 나도 말기 암이고 우리 목사님도 말기 암입니다. 목사님의 암 덩이를 모두 나에게 주세요. 그래서 내 생명을 취하시고 목사님의 생명은 연장시켜 복음 전하게 해주세요.’ 그러고 몇 개월 후 그 권사님은 확신하며 천국으로 갔다. 나중에 그 사실을 전해 들은 목사인 나는 이제 천국으로 가게 해달라는 내 기도를 바꿨다. 말기 암에서 해방되어 은혜의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였다. 삼손의 마지막 간구처럼 기도한 권사님을 잊을 수 없다. 끝내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통감한다. 목자는 양들의 기도로 산다. 그 목자도 제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치리라. 기도가 없는 신앙은 사막처럼 황폐할 뿐이다.” (고훈 목사)

자 이제 오늘 설교 말씀 중에 우리의 마음을 흔들었던 하나님의 음성을 확인하자. 하나님의 평강 생활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교회를 협력공동체로 만들고, 매사를 기도와 간구함으로 이루어진다. 체험을!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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