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30일 설교

“채워집니까?”(빌 4:14-20 ‘올바른 임마누엘’ 22.1.30)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인 김형석 철학자는 1920년 3월 5일생임으로 102세가 다 됐다. 그는 작년 말에 ‘김형석 교수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란 책을 출판했고, 올해 첫날 기독교 언론과 신년대담을 했다. 그 대담 중에 이런 말을 했다. “과거에는 교회와 교인들의 수준이 사회와 일반인들의 수준보다 높아서 사회와 일반인들이 교회와 교인들을 향해서 쫓아왔는데, 요즘엔 사회와 일반인들의 수준이 교회와 교인들의 수준을 능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래서 교회는 쇠퇴하고 교회를 떠나가는 교인들이 많아지는 추세이다. 일반적인 교사나 교수 등과 같이 지성인들이 목사의 권위 아래 있는 현 교회의 주조나 교회주의는 잘못된 것이다. 예수님은 큰 교회니 작은 교회니 전혀 언급한 바도 없고, 각 사람의 영혼 구원에만 관심을 두셨다. 제일 나쁜 것은 교파 대립이다.

“6·25 전쟁으로 피난 중에 부산 중앙교회에서 장로교 총회가 열렸습니다. 그때 저는 중앙교회 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한 장로님을 통해 총회 방청권을 얻어 예배당 2층으로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전국의 총대들이 싸우는 것을 보고, 다른 때도 아니고 전란 중인데 하며 혀를 차면서 너무나 실망하자 교회가 꼭 나를 내쫓은 듯한 느낌으로 총회장 밖으로 나왔는데, 부산 미국문화원을 지날 때 어디선가 음성이 들렸습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제가 잘 몰랐던 누가복음 9:60 말씀이 또렷이 기억났습니다. ‘그렇다. 교회에 나가지 않는 학생이나 젊은이들을 위해 성경공부라도 하자’란 마음이 들었습니다. 순수한 마음을 가진 젊은이 한 명을 키우는 게 교회 안에 병든 100명의 젊은이를 키우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을 갖게 됐고, 그렇게 51년부터 피난지에서 시작한 바이블 클래스가 2019년까지 무려 68년간 교회 밖에서 이어졌습니다.” 나라는 땅끝까지 밀려서 위태위태한데 교회는 교회의 특권을 독식하려고 교파끼리 대립하여 투쟁하는 교회주의라는 병이 풍기는 그 악취를 그토록 오랫동안 싫어했던 분이 김형석 철학자였다는 것이다.

오늘 설교 본문도 교회가 풍기는 향기를 보고 최고 최대 최상으로 칭찬하는 바울을 보여준다(18).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이 말씀은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받은 선교헌금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 모세 때부터 제물을 전부 태워 하나님께 올렸던 번제의 그 연기와 같다는 것이다. 선교헌금의 의미를 모세 때 제사 원리로 설명한 것이다. 바울은 선교헌금 자체를 칭찬한 게 아니라 빌립보 교회의 선교헌금이 하나님께 올라가는 향기이었기 때문에 칭찬한 것이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도 향기로운 냄새로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의 행위라야지 우리가 헌금을 드리니까 하나님이 복을 내려 주시는 게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헌금은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함을 시인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헌금을 드릴 때 헌금 액수보다 신앙고백을 담는 게 필요하고 중요하다. 헌금은 바치고 남은 것도 하나님의 것임을 겸손하게 시인하며 감사하는 태도라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5장 8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성도의 기도들이 향기로 천국 보좌에 올라가고 그게 금 대접에 담겨지면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헌금도 기도도 다 향기로 올리는 제물인 셈이다. 레위기에 보면 향기를 위한 제물은 흠 없는 생축에 안수하고 잡아 번제단에서 태웠다. 그런데 오늘날은 짐승 제물을 드리지 않고 예배 중에 기도와 찬송, 헌금에 자신의 신앙고백을 담아 올린다.

우리는 창세기 4장에 기록되어 있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잘 알고 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지라.” 하나님은 헌금자의 중심과 동기를 살피신다. 바울도 빌립보 교회의 순수한 선교헌금의 동기를 잘 알아차렸다. 선교헌금에 담겨있는 빌립보 교회의 선교 열정과 그 믿음과 또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것을 확신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돈은 조폐공사에서 만드는데, 같은 종이에 비슷한 크기지만 어떤 종이는 1,000원이고, 어떤 종이는 5,000원이다. 그리고 어떤 종이는 50,000원이다. 그러니 50,000원짜리는 1,000원짜리의 50배나 되는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종이 자체는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다만 사람이 종이를 그렇게 만들어 사용할 뿐이다. 문제는 어떤 그림이 새겨졌느냐에 따라 돈의 가치가 정해졌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도 인생을 살아가는데 1,000원 가치의 인생을 사는 분들도 있고, 50,000원 가치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친형제들도 다르게 살아간다.

생각해보자. 왜 이렇게 인생이 달라지는가? 사람은 품은 생각에 따라 자신의 인생 됨이 달라지고 있다. 사람의 생각이 시컴하면 그의 인생도 시컴하게 살아간다. 이사야 32:8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 사람의 생각을 모아 정리한 것을 관(觀)이라고 한다(결혼관, 국가관, 신앙관...).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관으로 살아가길 축복한다. 빌립보 교회가 그랬다. 아멘.

자 그러면 빌립보 교회처럼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헌금은 어떻게 하면 되는가?

1) 괴로움(14)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괴로움’ θλιψις 쓸리푸시스 상하 압착. 바울이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다 당하는 핍박과 감옥살이까지 모든 고난. 고후 11:23-27에 기록해 놓았음.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그렇다면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전도현장에서 당하는 고난을 모르는 척하지 않고 선교헌금을 보내 후원하는 일이었다.

고후 4:7-8에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질그릇’과 ‘보배’는 아주 상반된다. 우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갑자기 특별한 능력의 존재로 둔갑한 게 아니다. 슈퍼맨의 삶이 아니다. 이 사실을 오해하지 말자. 성도는 여전히 흙으로 만들어진 토기이다. 여전히 연약하고 한계가 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를 담고 있다. 그래서 내 안에 담긴 보배가 욱여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자족하게 한다. 내가 수많은 한계가 있고, 연약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배’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아멘.

2) 아무도(15)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바울에게 선교헌금을 보내준 교회가 빌립보 교회뿐이었다는 것이다. 또 16절에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주간에 두 번 선교헌금 함. 대단한 열정!) 그리고 18절에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위해 에바브로디도 편에 헌금을 또 보내주었다. 빌립보 교회는 연약한 교회였다(고후 8:1~3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빌립보, 데살로니가, 뵈뢰아, 아덴 소속됨)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순수한 신앙심이었다. 이처럼 믿음이란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 내는 것’이다. 생각만 하거나, 설명만 하는 ‘말쟁이’로 끝낸다면 아무리 설교를 많이 듣고 성경을 읽고 써도 믿음은 아니다. 참으로 중요한 교훈이다.

3) 풍성한 열매(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새번역 성경을 읽어 드리면 더욱 실감 난다. “나는 선물을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장부에 유익한 열매가 늘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향기인 올바른 헌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을 천국 생명책에 기록해놓는 신앙 행위라는 것이다. 빌립보 교회의 선교헌금이 하나님께 큰 기쁨이었음을 밝힌 것이다. 바울은 누구에게 선교헌금이나 선물을 달라고 구걸하지 않았고, 오로지 선교헌금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상급을 만드는 기회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19절에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채우시리라.” 이것은 바울의 확신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풍성하게 주실 때, 조건과 방법과 범위가 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이다.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예수님이라는 범위에서 주신다. 즉 하나님 나라의 전파를 위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은 풍성하게 채워주신다. 따라서 특별히 불법과 조작으로 세워진 예배당이나, 속임으로 하는 목회 승계라면 하나님께 영광이지 못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흥을 이루었다면 그것도 영광이지 못한다. 자신의 이익과 명예를 위한 목회라면 그것도 영광이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채워주심이 아니라 사람의 뜻을 자랑한 바벨탑이다. 그래서 우리는 충성하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도하심과 채워주심과 하나님께 영광됨을 응답받아야 믿음이다. 아멘.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다. 마 6:31~34에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아멘.

오늘 설교는 믿음을 보게 한다. 성경이 보여주는 믿음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이다. 그런데 이 세상이 예수님을 죽인 것처럼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를 이 세상은 비난하고 훼방하며 죽이려 한다.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실존하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도 있다. 바울은 주 안에서 그렇게 살았고, 빌립보 교회도 핍박과 환란과 가난 중에도 바울과 한통속이었다. 그게 천국에서 빛나는 열매이다. 저와 여러분도 천국에서 빛나는 열매를 풍성히 맺어가는 믿음생활을 해가기를 축복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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