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23일 설교

“할 수 있느니라!”(빌 4:10-13 ‘올바른 임마누엘’ 22.1.23)

1993년 임권택 감독은 ‘서편제’라는 영화를 만들었지요.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를 영화로 제작하여 한국영화로는 처음으로 관객 100만 명을 돌파해낸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찬사를 받았다. 서편제는 노래에 미쳐 ‘소리꾼’을 직업으로 먹고사는 가난한 아버지와 그의 딸이 기구한 운명처럼 소리꾼으로 살아가는 소리꾼 인생의 가슴 아픈 사연과 명창의 반열에 올라서는 그 길을 그린 작품이다. 아버지는 자기 딸을 소리꾼으로 만들기 위해 결국 딸을 후천성 시각장애인으로 만든다. 그렇게 하면 사람은 눈으로 뻗칠 기운이 귀와 목청으로 합해져서 사람의 목소리가 비상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장애 인식은 의학적으로 동조하기 어렵지만, 우리 선조들이 ‘명창’에 집중하는 실제 ‘꾼’의 마음가짐을 볼 때 숨을 죽이고 공감하게 되기도 한다.

스승으로 모신 명창으로부터 한가지 체제의 소리만 듣고 잘 다듬어 한목소리로 노래하려고 노력하는 그 마음, 그러한 태도는, 성경을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따르는 제자였던 사도들의 신앙훈련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제자’ μαθητης 마쎄테스, 동사 = μανθανω 만싸노 to learn by practice or experience, to acquire a custom or habit). 사도 바울의 삶을 볼 때 더욱 그렇다. 바울은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 그의 화려한 자랑감인 이력들을 배설물로 여겼다. 오로지 예수님, 오로지 복음, 오직 부활 신앙을 증언하며 전파하는 일을 인생 푯대로 정하고 앞만 보고 달려갔다.

오늘 설교 본문에도 바울은 오로지 예수님의 사회요 나라요 문화를 이루어갈 수 있는 비결을 이렇게 밝혔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 그런데 이 말씀을 크게 써서 자기 집이나 사무실에도 붙여 놓고, ‘하면 된다’는 소위 ‘긍정적인 사고방식에 따라 노력하면 하나님께서도 도와주신다’는 근거로 확신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사업상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은 무슨 일이든 자기 스스로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재확인시켜주는 말씀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성경으로 밝히는 바는 바울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바울은 12절에서 설명한 것처럼 배고픔이나 궁핍에도 잘 적응할 수 있고, 물론 배부름이나 풍부 등등도 잘 활용하고 있으니, 그래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밝힘으로써 빌립보 교회가 격세지감을 실감하겠지만 바울 자신처럼 신앙 삶의 비결에 동참하기를 강권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9절의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에 포함되는 내용이었다.

우리가 바울의 전도 열매와 승리만 강조하기 쉬운데, 바울은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하면서 고통을 많이 당했다. 복음전파를 하려다 오히려 핍박과 훼방에 시달렸고, 기도 응답이 유보되기도 해서 실패로 볼 수도 있었고,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이 자신을 배반하고 떠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모든 희비의 과정에서 자신에게 권능을 주시며 함께 하시는 분이 계신다는 실제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 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7-9.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전지전능하게 도와주시는 신기한 비결을 말해주고 있음<“이라”γαρ 가르 because>. “쳐서” κολαφιζω 클라피조 to beat with the fist. 얼마나 곤경에 시달리겠는가! “온전하여짐” τελειται 테레이타이 τελειοω의 pass, complete, to execute fully, to receive fulfilment. 완성!). 이러한 이치를 깨닫게 되면 신앙 삶의 모든 과정에서 일희일비(一喜一悲)하기보다 전지전능하게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고, 우리는 할 수 있는 최선의 헌신을 지속하며 자족하는 것이다. 바울은 실제로 그러한 삶을 살아갔다.

바울은 엡 5:16에도 자족을 강권하고 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redeeming the time, because the days are evil.”<NKJV> “making the most of the time, because the days are evil.”<RSV> ‘아끼라’를 ‘구속하는 것’, ‘최고의 시간으로 만드는 것’으로 봄. ἐξαγοραζόμενοι τὸν καιρόν, ὅτι αἱ ἡμέραι πονηραί εἰσιν. καιρόν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시간. ἐξαγοραζόμενοι 에크사고라조메노이 현재분사. ἐξαγοραζω to redeem, set free. 값을 지불하고 받는 자유가 진행 중임). 하나님의 언약성취의 시간은 대가를 지불한 시간임으로 합당하게 자기 삶으로 만들어 살아가는 게 시간을 아끼는 것이 된다는 말씀이다! 내 뜻의 성취나 내 성공도 내 자랑의 실현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생각으로 그치지 말고 행할 때 믿음으로 사는 게 되고 순종이다.

자 그러면 바울의 믿음 생활의 비결에 동참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설교 본문에서 바울의 설명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1) 싹(10)

다시 싹이 남”(ανεθαλετε 아네쌀레테 다시 번성하다. flourish again. Aorist, ‘이미 되살아났음’ 봄에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을 연상시킴. 빌립보 교회와 바울의 애정 관계가 다시 가시적으로 드러났음을 말해줌).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보내던 관심이 어떠한 유혹이나 훼방, 핑계로 한동안 단절되었다가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에게 옴으로 바울에 대한 빌립보 교회의 관심과 후원이 다시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빌립보 교회의 믿음과 사랑, 소망이 건강하게 살아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손양원 목사님이 신사참배 거절로 일본 헌병들에게 끌려갈 때 사모님은 조그만 휴대용 성경책을 주머니에 넣어주고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할지언정 실패하지 마십시오.”라고 권했단다. 그런 후에 사모님은 굶어서 젖이 모자라니 아이가 울어대느라고 잠들지 못했다. 이 소식을 일본 경찰이 손 목사님에게 알리며 마음을 흔들었다. 그러자 사모님은 눈물로 밤새 기도하고 경찰서에 가서 면회 신청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래서 감옥 뒷산으로 가다가 허기져서 졸도했단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에 딸기들이 보이더란다. 딸기로 허기를 달래고 면회하는 심정으로 찬송가 336장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를 힘껏 불렀다고 한다. 손 목사님은 1년 7개월 동안 순천 형무소에서 감옥살이하다가 무기형을 받고 서울로 옮겼는데, 그동안 정양순 사모님이 애양원을 지켰고, 노상 철야기도를 하면서, “우리 남편 건강하게 해 주세요. 빨리 출옥하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 대신에 “우리 손 목사님, 신앙을 꺾지 않고 이기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참으로 아멘! 이다.

믿음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신앙 행위가 싹으로라도 나타난 성도가 자족 신앙 삶의 비결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멘.

2) 배웠다(11, 12)

바울은 비천을 당해도 염려하다 낙망도 비굴도 하지 않고, 물질적으로 풍부해도 자만하여 방심하고 타락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을 성실히 이루어간다고 하였다. 이 충성비결을 그는 배웠다(“자족하기를 배웠노니”<11 μανθανω 만싸노 to learn by practice or experience, to acquire a custom or habit>.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12 μεμυημαι μυεω 뮈에오 pass. to be disciplined in a practical lesson. 전수함> 믿음의 비밀을 전수받아 습득했음을 밝히는 말임)고 밝혔다.

우리가 꼭 시인할 사실이 있다. 바울은 결코 슬픔이나 눈물도 고통도 못 느낄 만큼 비정하고 미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와 똑같이 희로애락을 경험하고, 또 감정에 치우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신앙비결을 습득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는 빌립보 감옥에서 죽을 지경인데도 실라와 함께 찬송하며 기도했다. 또 롬 8:28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合力)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소망이 있다. 문제는 우리도 바울처럼 배우려는 신앙의 열정이 있느냐이다.

3) 안에서(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무슨 그림이 그려지는가? 하나님과 연합 관계를 말한다. 하나님이 항상 내 생각에 계시고, 나의 생활 속에 계시니 나머지 환경 여건은 좋든 나쁘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덧입고 ‘즐겁게’ 살아가는 이 비결을 믿음으로 산다고 말하기도 한다. 요한복음 15장에 예수님께서 설명하신 포도나무의 비유에서도 이러한 하나님과 관계를 강조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열매를 맺지만, 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그런데 많은 교인이 환경 조건으로 은혜와 축복을 평가하지만 그러한 평가는 잘못된 일이다. 좋은 환경이 생기면 잠시 기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나 환경 조건은 변하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한다. 또 사람의 권태감 때문에 환경 조건은 만족하다가도 시간이 흘러가면 평범해지고 더 큰 욕심에 빠진다. 그러다 보면 다시 비교되고 불만과 탓에 빠지게 된다. 성도의 신앙 본질이 무엇인가? 예수님 믿어 죄사함을 받으며 얻은 영생을 즐기는 것이다. 요 17:3에 이르길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γινωσκωσιν 기노스코신 현재, 진행 중, 인격적인 교제 중)것이니라.” 그래서 영생은 그리스도인이 죽어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사는 그것만이 아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삶 속에서 함께 사는 것 자체가 영생이라는 것이다. 아멘.

우리는 오늘 설교를 들었으니 이제 어떻게 하려는가? 자족하는 삶은 자율하는 생활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에게 ‘긍정적’이라는 말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실현함’과 연관될 때 해당한다. 그래서 핍박과 상실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고, 풍부해도 그 여건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함에 충실히 한다. 이런 삶은 소중하다. 바울이 그랬다. 우리가 당하는 처지에 따라 환호하고 때로는 불평과 낙심을 한다면 아직 세상적인 축복인식에 오염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관심과 정, 환경 이러한 것들 때문에 쉽게 의욕을 잃지 말자.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 장수 앞에 섰을 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라고 했던 믿음의 행위를 시도할 수 있기를 축복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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