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2일

“본받으라!” (빌 3 : 17 - 21 ‘그리스도인의 시민권’ 22.1.2)

논어에 있는 말이다. 子曰, 聖人, 吾不得而見之矣. 得見君子者, 斯可矣. 자왈, 성인, 오불득이견지의. 득견군자자, 사가의. 子曰, 善人, 吾不得而見之矣, 得見有恒者, 斯可矣. 자왈, 선인, 오불득이견지의, 득견유항자, 사가의. 亡而爲有, 虛而爲盈, 約而爲泰, 難乎有恒矣. 망이위유, 허이위영, 약이위태, 난호유항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성인을, 내가 만나보는 게 안 생긴다면, 군자라는 자를 만나 보는 것, 이것은 가납할 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선한 사람을, 내가 만나보는 게 안 생긴다면, 한결같은 사람을 만나보는 것, 이게 가능일뿐.’ 망하고도 있는 척 행위를 하고, 텅 비어 없는 데도 가득 찬 척하며, 줄어져 있으면서도 큰 척을 하니, 한결같음이 어렵도다.”

공자께서 그 당시 세상을 보면서 탄식했던 말이다. 복잡하게 경쟁하는 세상이라 능수능란하게 삶을 포장하는 사회에서 성자나 군자, 선한 사람은 고사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드물다고. 한결같은 사람을 한자어로 유항자(有恒者 ≠ 유正자 권사님)라고 표현하였는데, 만약 지금 우리의 현실이라면 유항자는 씨가 말랐다고 표현하지 않았을는지?

그런데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공산주의 이론의 기초를 만든 독일의 칼 마르크스는 1883년 3월 14일 죽기 직전에 그의 하인이 “저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시면 제가 기록해두겠습니다.”라고 말했더니, 그는 “시끄럽다. 나가!”라고 소리를 버럭 지르고 끝내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또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은 “내 인생이 불쌍했다”라고 말하며 초라하게 죽었고, 또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으로 미친 사람처럼 마구 소리 지르고 욕하다가 세상을 떴다고 한다.

그러나 부활신앙인들은 전혀 달랐다. 미국의 D. L. 무디 목사님은 죽을 때 “나는 죽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곳으로 옮겨간다.”라고 말하면서 평안하게 눈을 감더란다. 영국의 웨슬레 목사님은 88세에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하고 평안하게 숨을 멈추더란다. 존 깔뱅도 “주님, 나는 더 할 수 없이 만족합니다.”라고 하면서 행복하게 눈을 감았다고 한다.

오늘 설교본문에도 사도 바울이 당당하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있다(20). “시민권”(ἡμῶν γὰρ τὸ πολίτευμα 헤몬 가르 토 폴리튜마 ‘왜냐하면 너희의 시민권은’ For our citizenship is in heaven, -NKJV- πολίτευω 폴리튜오 to be a citizen. 시민의 권리를 누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은 당시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는 전투공로가 있는 퇴역군인들을 빌립보에 살게 하고, 로마의 시민권을 주어 로마 시민의 권리를 누리게 했다. 그러니까 외딴 지역 빌립보에 살아도 로마 시민의 권리를 분명하게 당당히 누렸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현실적으로는 이 땅에서 살아갈지라도 내용상 천국에 속한 시민이다. 그래서 천국 국민이 지상 나그네로 사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이치로 ‘시민권’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변화하는 모습을 신앙적으로 나누면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관계의 변화인데, 결속되는 것이다. 임금과 신하가 묶이면 군신관계이고, 부부, 친구, 주님 관계도 있지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범죄를 범한 이후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가 지배하는 상태로 태어난다.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나 죄인이고 마귀의 종이며 지옥 백성으로 보신다. 하지만 그 죄인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대속제물’로 믿고 받아들이면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물리치고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천국의 영생복락의 길로 들어오게 하신다. 이것을 관계의 변화라고 한다. 죄의 지배를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바꾸고, 성령이 임재하셔서 ‘보혜사’(παρακλητος 파라클레토스 the Counselor)로 계신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죄인이 의인 되고, 지옥과 관계가 천국과 관계로 변화되고, 마귀의 종 되었던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되니 영벌이 영생 복락으로 바뀐다. 이것을 성경전문용어로 ‘중생’이라고 한다. 이 관계 변화는 하나님만이 선언하심으로 단번에 이루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변화는 상태의 변화인데, 관계의 변화를 ‘중생’으로 요약하면 상태변화는 ‘성령충만’이다. 따라서 상태의 변화는 신앙의 상태(신앙생활, 신앙인격, 신앙관)가 변화되어감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전혀 딴사람이 되었지요. 그러고도 전도하다가 방해 벽에 부딪치니까 합심기도로 성령충만함을 또 받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럼으로 성령의 충만함은 승리해가는 삶이다. 그러니 상태의 변화는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인 것이다. 바울은 성화를 굉장히 중요시하였다(12). 이것은 ‘시민권 인식’이 철저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 그러면 저와 여러분도 ‘천국 시민권’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답게 바울처럼 믿음 생활을 해나가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설교 본문에서 바울이 직접 밝혀주고 있는데, 저랑 같이 확인해 보자.

1) 본받으라(17)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강권한다. 언뜻 보면 교만으로 오해하기 쉬워 사실 망설여지는 내용이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이 편지를 보낼 때는 복음서 성경이 아직 없었다. 그러니 본받아야 할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시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을 직접 본받으라고 하면 답답해질 것이다. 그러니 믿음의 이정표로 살아가는,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종을 본받아 결국 예수님을 본받자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을 목표로 삼고 달려갔던 인생이었다. 그래서 예수를 닮아가는 바울 자신을 닮으라고 말한 것이다. 바울을 본받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바울이 얼마나 철저하게 예수님을 본받았는지 가늠하게 하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가르치는 선생이요, 인도하는 안내자였다. 이런 목사님이 선한 목자인데 그립다. 오늘날 지시형 설교와 설법, 선동이 난무하기에 더욱 그렇다.

눅 9:23에 있는 말씀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daily and follow me.” -NIV- come after = ερχομαι<에르코마이 일반적으로 그냥 ‘오고 가는 것’>, ακολουθειτω 아콜루쎄이토 현재 명령형<ακολουθεω 아콜루쎄오, 주로 ‘제자로 따를 때’인데 ‘누구에게 소속되어 확고부동하게 전적으로 추종함’ 제자 μαθητης 마쎄테스 동사 = μανθανω 만싸노 to learn by practice or experience, to acquire a custom or habit. 마 19:27-28은 더 선명하다<“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사람은 무엇을 본받느냐에 따라 인생은 크게 달라진다. 도둑을 본받으면 도둑놈이 되고 속임수를 본받으면 사기꾼이 되고 싸움질을 본받으면 깡패가 된다. 그런가 하면 석가를 따르면 불교인이 되고, 공자를 따르면 유교인이 되며, 예수님을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의 은혜는 같으니 따르라)라고 가르쳤다. 제자 수준의 따름을 시작하길!

2) 십자가 원수(19)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18 下).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이고, 그들은 배를 자기네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 부끄러움를 영광으로 삼으며, 땅의 것만 생각한다.”(19)라고 했다. ‘부끄러움’(αισχυνη 아이스퀴네 nakedness ‘벌거벗음’ 알몸이 탄로 난 것임. 옛 성경은 ‘수치’라고 번역했다. 자기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는다니 자랑해봤자 망신만 당하겠지요. 이런 자들은 배를 하나님으로 삼는데, 먹고 마시는 본능적 육욕대로 자기의 육체적 쾌락과 포만감을 추구하고 만족하면 하나님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바울은 우상숭배 짓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5-6).

그래서 바울은 “내가 여러분에게 여러 번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한다.”(18)라고 실토했다. 빌립보 교회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애탔는지 공감할 수 있게 한다. 사도행전 20장 31절에서도 에베소 장로들과 작별할 때 바울 자신이 어떻게 목회하였는지 밝혔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눈물로 한 영혼 한 영혼을 기도하며 양육했다는 것인데, 자기 자랑이 아니다. 전도자의 열정을 드러낸 말이다. 선한 목자의 기본이 무엇인지 보게 한다. 한없는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목회이다. 목회는 수시로 힘겨운 짐이기에 눈물로 기도한 것이다. 이 눈물은 양들을 위한 눈물이고, 불신시대를 향한 눈물이며, 작은 자신을 통감하는 애통이었겠지요. 이 눈물이 없다면 이미 본능과 탐욕의 노예로 속이는 삯꾼인 것이다. 선한 목자를 따르길!

3) 기다리노니(20)

ἀπεκδεχόμαι 아페크데코마이 long for 소망에 차서 간절하고 꾸준하게 기다리는 모습이다. 재림을! 사도 바울은 다른 서신서에서도 그랬지만, 하나님의 뜻이 이러하니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해야 한다!’라고 지시만 하지 않고 ‘나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17절에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라고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 생활을 말만 앞세우지 말고 나와 함께 재림을 향해 성실하고 꾸준히 순종하자고 호소한 것이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감옥에서 쓰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지나가는 나그네의 말처럼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이다. 어떤 부자가 타국에 갈 때 종들에게 금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각각 맡기고 떠났는데, 다섯 달란트를 맡은 종은 주인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온갖 충성을 다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맡은 종은 달란트를 전혀 활용하지 않고 그대로 둠으로 주인에게 혼날 게 뻔했다. 그렇다면 두 달란트 맡은 종은 위기를 만난 셈이다. 당장 ‘누구처럼 할 것’ 인지 선택의 문제가 생긴다. 즉 다섯 달란트를 맡은 종을 따라 할 것인가? 아니면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을 따라갈 것이냐? 선택할 입장이다. 다섯 달란트를 맡은 종을 따르면 장래에 칭찬과 상을 받을 인생인데 개미처럼 노력과 고생을 하게 되고, 한 달란트를 맡은 종을 따라가면 베짱이처럼 편한데 망할 인생이다. 예수님의 말씀 마 25:17은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두 달란트를 맡은 종은 다섯 달란트를 맡은 종을 따라 했고, 그래서 주인에게 아낌없는 칭찬을 받았다고 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누구를 따라 하느냐’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우리라도 재림을 기다리고 상 받게 선택하길! 아멘.

자 이제 첫 주일 말씀의 이정표를 확인하자. “천국 시민권!” 이건 정체성이고 자긍심이며 높은 품격이고 막중한 책무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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