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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16일 설교

“그리하면!”(빌 4:8-9 ‘평강의 하나님’ 22.1.16)

낭​만주의 미술의 시대를 연 프랑스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1798~1863)가 그린 ‘단테의 조각배’라는 그림(1822, 캔버스 유채, 189×246㎝)이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단다. 단​테가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받으며 지옥을 여행하는 그림인데, 들라크루아가 단테의 ‘신곡’(神曲)에서 영감을 받아 그렸단다. 단​테가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배를 타고 이 세상과 사후의 세상을 갈라놓는 스틱스강을 건너고 있는 장면이다. 붉은 두건을 쓰고 요동치는 조각배 안에 간신히 서서 불타는 도시를 뒤돌아보고 있는 사람이 단테이고, 그 오른편에서 단테의 손을 굳게 붙잡아주는 이가 베르길리우스이다. 또 뱃사공은 배의 오른편에서 노를 젓고 있는데, 그의 푸른색 옷은 거의 벗겨졌는데 강한 바람이 얼마나 험악하게 불어대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탐욕으로 지은 온갖 죄 때문에 지옥으로 떨어진 저주받은 영혼들이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고통의 강에서 성난 얼굴로 눈을 부릅뜨고 목을 조르며 허우적대다가 배를 보자 서로 짓밟고 올라타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다. 또 벌거벗은 인간들은 지옥으로 가는 동안 모든 가면이 벌거벗겨졌음을 나타낸다.

들라크루아는 1787 ~ 99년까지 12년 동안 프랑스 혁명을 겪으면서 프랑스의 극심한 혼란을 통해 단테 신곡의 지옥을 공감했으리라. 그래서 들라크루아는 단테에게 지옥 여행을 안내해준 베르길리우스를 그림의 중앙에 배치하여 혼란 시대를 이끌어 줄 위인을 그리워하며 그 중요함을 웅변했다고 본다. 사실 어느 시대나 올바른 삶의 길을 열어가는 시대의 선구자는 위대한 별로 존경을 받아왔지요. 하지만 자기 성취와 자랑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불안한 인생길을 열어주는 참 스승이나 영혼의 인도자를 만난다는 것은 대단한 축복이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이다. 아멘.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올바른 생명 길을 오늘 설교 본문을 통하여 확신 넘치게 알려주고 있다(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ταῦτα πράσσετε 타우타 프랏세테 these practice( fulfill, exact). “these do, and the God of peace will be with you.” -NKJV- 몸소 실행하여 성취하고 정확함<바울의 설교와 성경공부, 전도 생활, 예수님 종으로 철저한 충성... 바울 자신에게 유익한 것들을 예수님을 아는 신앙 삶을 위하여 배설물로 여기고,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전력질주, διωκω. 또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 “행하라” “and the God of peace will be with you.”>). 그래서 예수교는 이론 지식으로 끝내지 않고 믿음의 삶을 이루고 남긴다. 공자도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자신의 스승이 존재한다)’라고 가르친 바인데, 이 말은 설명은 물론 행위와 삶으로도 깨우치는 인성교육을 중요시한 것이다. 사람의 인격함양은 단순히 말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도 요즘 우리나라 대학교수님들은 수업시간에 학과목의 지식을 전하고 그 삶은 본인에게 맡긴다. 그래서 대학 선생님들은 스스로 지식을 파는 ‘보따리장사’라고 말한 지 오래됐지만, 지식만 잘 설명하면 칭송을 받는다. 따라서 지정의(知情意) 인격을 갖춘 지식인이 드문 사회에서 우리가 살아가게 된 것이다.

신학교를 갓 졸업한 전도사님이 밀양에서 첫 목회를 시작했단다. 그 전도사님은 그동안 결석하는 교우들을 심방하는 것으로 목회를 시작했는데, 그중에 시청에 근무하는 집사님을 사모님과 함께 찾아갔다. 집사님이 시청 마당에 나와서 반갑게 맞아주며 “그러지 않아도 전도사님이 새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 주일부터 교회에 나가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참으로 반가운 말이었지요. 목자에게 예배에 참석한다는 말보다 더 좋은 대답은 드물지요. 시청 마당에서 함께 기도드리고 나자, 집사님이 물었다. “전도사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데요? 말씀해보세요.” “어떻게 하면 믿음생활을 잘할 수 있나요?” 순간적으로 초짜 전도사님은 앞이 캄캄해졌다. 그 질문은 성경 내용도, 신학지식도, 교리도 아니었지만, 그리스도인의 가장 기본적이면서 가장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도사님이 잠깐 신중한 대답을 생각하고 있는데, 사모님이 이런 대답을 했단다. “집사님, 직장 생활을 하고 계시잖아요.” “예, 시청에 근무하죠.” “신앙생활도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예, 감 잡았습니다.” 집사님은 전도사님과 헤어진 후에 사무실로 걸어오면서 생각해 보았다. ‘직장 생활은 우선 결석하려면 사전에 알려야 하고, 지각해도 안 되고, 근무 중에는 맡은 업무를 책임감으로 열심히 하지. 신앙생활도 그렇게 하라는 말이구나.’ 그렇다. 바울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and the God of peace will be with you.”)를 위한 명 처방으로 빌립보 교회에 강권했던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와 상통하다.

자 그러면 바울의 명 처방을 저와 여러분의 믿음 삶으로 현실화시키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잘해야 하는지? 설교 본문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명 처방을 좀 더 세밀히 살펴보자.

1) 생각하라(8)

‘생각하라’(ταῦτα λογίζεσθε 타우타 로기제스쎄 λογίζομαι, to count, think about, conclude. 깊이 정확하게 숙고함. “fix your minds on them.” -Amf-, “fill your minds with those things” -GN- 우리의 마음과 대칭되는 것들이 있게 하고, 그 대칭들로 채워지게 하는 것임 = 생각!). 사람의 생각은 자신의 감정과 판단, 행위, 인생까지 영향을 미친다. 어떤 생각을 품었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달라진다. 바른 생각을 품으면 칭송받고 값진 인생을 살 수 있다. 반대로 삐뚤어진 생각을 품으면 악하고, 욕된 삶을 살게 된다. 우리는 주일마다 설교를 듣는다. 그 설교가 어떠한 마음을 얼마나 뜨겁게 만드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달라지는 법이다. 스데반은 돌을 맞고 순교하는 순간에도 천국의 주님을 바라보며 원수들을 용서하였다. 험악한 환경만 바라보지 않고, 모든 형편을 판단하시는 주님 앞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평강을 누릴 수 있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요. 이 말은 인간은 갈대처럼 흔들리는 허약한 존재이지만, 인간이 지정의를 올바르게 활용하면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올바른 것을 알아차리고 높게 평가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이 구제하려면 재물을 갖춰야 한다고 말하기 쉽지만,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구두쇠는 구제하기 어렵다. 네모반듯한 믿음의 가치관을 날마다 완성해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아멘.

2) 이것들(8)

생각의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틀린 정보가 생각을 잘못되게 하고, 잘못된 생각이 믿음과 인생을 빗나가게 한다. 장사꾼은 돈을 생각하고 정치꾼은 권력을 생각하며 사기꾼은 거짓말을 앉으나 서나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보통 무슨 생각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곤 하는가?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불화하는 빌립보 교회에 생각의 내용을 8가지로 핵심정리 해주었다. ① 참되며(ἐστὶν ἀληθῆ 에스틴 알레데 “whatever is true” 하나님의 속성이 실존함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렘 10:10> 그리스도인은 참이신 하나님을 닮아 말로 하는 설명보다 진실한 행위요 신앙 삶에 능하다. ② 경건하며(σεμνά 셈나 “정중”<딤전 3:8> “정숙”<11> “noble” 말이나 행동으로 무게 잡는 게 아니라 구별됨). ③ 옳으며(δίκαια 디카이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 ④ 정결하며(ἁγνά 하그나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처럼 흠 없는 생축, “pure” 시 24:3-4에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예배와 삶의 일치를 말함) ⑤ 사랑받을 만하며(προσφιλῆ 프로스필레 기쁘게 받아들일 만한, 마음에 드는, ‘사랑함을 불러일으킴’) ⑥ 칭찬받을 만하며(εὔφημα 유페마 칭찬의 소문, 롬 14:18에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⑦ 덕(ἀρετὴ 아레테 탁월함) ⑧ 기림(ἔπαινος 에파이노스 “praiseworthy” -NKJV, NIV- 신앙의식과 윤리의식이 높게 살아감.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그리스도인은 성경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알아차린 바를 행하여 삶을 만드는 자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예수님의 홍보대사요, 천국의 홍보대사이며, 교회의 홍보대사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비참히 짓밟히고 있다. 홍보대사의 역할에 무능하기 때문이다. 생각내용을, 생각방향을, 생각수준을 맞추길 축복한다. 아멘.

3) 무엇에든지(8)

8절의 문장에서 핵심 동사는 “생각하라”이다. 그리고 “생각하라”의 내용은 8가지이고, “생각하라”의 내용의 수준은 “무엇에든지”인데,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모든 영역에 8가지 생각을 적용하라는 것이니, 문제가 생긴다. 엄청난 고난도의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8가지 덕목은 선한 양심으로 살아가는 불신자들에게도 어느 정도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8가지 덕목을 실현하는 만큼 ‘거룩’이다. ‘거룩’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1-2). 이 ‘거룩’은 주일에 예배당에서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삶의 모든 시간과 영역에서 생각과 삶을 거룩하게 하라는 것이다. 성령님의 보혜사 되심에 전적으로 의지할 때 가능해진다. 안디옥교회가 그랬다. 행 11:25-26에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13:1-3에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저와 여러분도 보혜사에 민감하게 순종하길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한다. 아멘.

바울은 설교 본문에서 결론을 이렇게 맺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성경 말씀을 듣고, 배우고, 실행하는 분들이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놀라운 축복을 누린다는 것이다. 지금 점검해 보자. 참된 삶을, 경건한 삶을, 올바른 삶을, 정결한 삶, 사랑 삶, 칭찬 삶, 덕 생활, 기림 생활을? 고넬료에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하나님께 사진 한판 찍혔다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종지기 충성’으로 대부분 한판 찍혔다. 우리도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에만 매달리지 말고 8가지 덕목으로 한판 찍히길 축복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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